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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농반진반 Feb 16. 2023

사이드미러를 접을 필요가 없다

풍요로운 나라, 가난한 사람들

(우당탕탕 미쿡일기 4)

 

미국에서 차를 사려고 알아보면서 신기한 게 하나 있었다. 사이드미러가 자동으로 접히는 옵션이 아예 없는 차가 많다는 점. 한국을 떠나기 전 마지막 차가 경차 스파크였는데 사이드미러를 손으로 접어줘야 했다. 좁은 곳에 주차할 때 꽤 불편했다. 주차를 하고 내려서 양쪽 사이드미러를 손으로 접어야 했고, 다시 탈 때 꼭 잊어버려서 운전을 하다 난감한 적이 많았다. 미쿡 딜러에게 사이드미러가 자동으로 접혔으면 좋겠다고 말하니까 대략 난감해하는 표정이 역력했다. (현대차 대리점에 갔더니 비교적 작은 차에도 그 옵션이 적용돼 있었다.)

 

결국 구매한 차량도 자동으로 접히지 않았다. 일주일 정도 지나서 그 이유를 알게 됐다. 여기 주차장은 어디나 광활했고, 주차면도 굳이 후면 주차를 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여유가 있었다. 뭘 접고 자시고 할 필요가 없었던 거다. 주위를 둘러봤다. 사이드미러를 접은 차가 단 한 대도 없었다. 아. 미국은 넓은 나라였다.

 

밸런타인데이에 학교 선생님들에게 점심을 대접한다고 학부모 자원봉사를 모집한다는 이메일이 왔다. 크게 바쁜 일이 없어 학교에도 가볼 겸 신청을 했다. 미드 속에서 보던 미쿡 학교의 모습. 여기저기 보이는 잔디 운동장. 50미터 수영장. 제대로 된 실내 농구장. 넓은 도서관. 공립 중학교가 웬만한 대학 못지않다.


동네에 있는 대학교 캠퍼스. 이 정도 규모의 잔디 광장이 열 개는 되는 것 같다. 넓기는 참 넓은 나라다.

 

역시 자원봉사자는 아주머니들밖에 없었다. 이상하게 아저씨들만 있는 거보다 아주머니들만 있는 곳이 더 편하다. 크게 할 일은 없었다. 네덜란드에서 온 아주머니가 친절하게 이것저것 설명해 주신다. 저기 저분이 PTO(학부모 단체) 회장님이세요. 저분은 7학년 엄마, 저기 체육선생님 오시네요 호호호. 대부분 알아듣지 못하지만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네덜란드에서는 영어를 쓰나요? 너무 잘하시네요. 공용어는 아닌데 모두 학교에서 영어를 배워요. 한국에서도 모두 영어를 배워요. (침묵)

 

점심시간이 끝나고 본격적인 자원봉사의 시간. 알아듣기 힘든 수다보다 몸으로 청소를 하는 게 훨씬 편하다. 플라스틱 접시, 플라스틱 보울, 플라스틱 칼, 플라스틱 집게, 플라스틱 국자… 이곳은 플라스틱 네이션이구나. 물론 여기까지는 한국도 뭐 크게 다르지 않다. 반도 먹지 않은 음식들. 냅킨과 식탁보. 이것들은 어디에다 모아야 하나요? 저기 쓰레기 봉지 보이죠? 요것들은 어디에? 저기 쓰레기 봉지 보이죠? 입구는 여러 개였지만 출구는 오직 하나였다. 만국의 쓰레기여 단결하라. 불과 2-30명 선생님이 다녀갔는데 쓰레기는 산더미다. 분리수거라는 개념 자체가 없었다. 


종량제 봉투는 커녕 음식물 쓰레기봉투도 당연히 없다. 아파트에서 분리수거를 하지만 박스 정도만 따로 모으는 식이다. 처음에는 꺼림직했는데 금방 익숙해진다. 왜냐하면 편하기 때문이다. 1인당 쓰레기 양 세계 1위가 미국이다. 하지만 아무도 쓰레기에 신경을 쓰지 않는다. 어디 가난한 나라에 떠 넘길 수도 있고, 파묻을 땅도 아직 넓기 때문이다. 맞다. 미국은 넓고 풍요로운 나라였다. 


뉴저지에서 지금 거주하고 있는 곳은 아파트다. 방 2개에 부엌 겸 거실. 한국식으로 보면 21평 정도 아파트에 해당하는 크기다. 호텔처럼 생긴 복도식 구조로 돼 있다. 총 4층으로 이곳에서는 제일 높은 건물에 해당한다. 한국 아파트에 비하면 아담하다는 말도 아까울 정도로 낮은 건물이지만 한 층에 세대수가 줄잡아 백 개는 넘는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리면 영화 바톤핑크 같은 데 나올 만한 길고 어두운 복도를 한없이 걸어야 한다.   


바깥양반 회사에서 비용을 충당해 주는 집이다. 안타깝게 공짜는 6개월. 곧 옮겨야 한다. 여기저기 집을 알아보고 있다. 부동산 사이트를 드나들다가 충격적인 사실을 알게 됐다. 이 작은 아파트 월세가 무려 5천 달러를 넘었다. 관리비 빼고 월세만 그렇다. 우리 돈으로 한 달 6백만 원. 그래 여기가 뉴욕이면 그래도 이해는 된다. 하지만 내가 보기엔 여기는 정말 시골이란 말이다. 저렴한 집을 알아봐도 방 두 개면 3천 달러 이상, 방 3개면 4천 달러는 넘어야 한다. 젠장, 미국은 넓고 풍요롭고 비싼 나라였다.   


운전면허 시험을 접수하는데 직원이 한국 면허증을 달라고 했다. 유효기간이 언제냐고 묻는다. 적혀 있다고 짚어줬다. 이게 유효기간인 줄 자기가 어떻게 아느냐고 묻는다. 다시 짚어줬다. 영어가 아니라 자기는 모른다고 한다. 오케이. 그래서 준비했다. 국제운전면허증을 줬다. 이건 필요 없다고 밀어낸다. 그래서 또 준비했다. 영문 운전경력 증명서를 줬다. 유효기간이 없다고 다시 밀어낸다. 운전면허증을 영어로 번역해서 공증을 받아 오란다. 헐. 뉴욕에 있는 영사관까지 가야 했다. 


뉴욕지하철. 홈리스와 비홈리스의 공존. 뒤쪽 홈리스는 신발까지 벗고 편안하게 주무신다.   


기차를 타고 뉴욕 펜실베니아역에서 내려서 지하철을 탔다. 같이 사는 바깥양반이 신신당부를 한 게 생각이 났다. 절대로 지하철을 타지 마라 위험하다. 하지만 걷기에는 좀 멀다. 지하철을 타면 금방이다. 에라 모르겠다. 지하철 표는 3달러. 와. 한국과 비교하면 세 배다. 뉴욕 지하철은 1904년에 개통했다고 한다. 지하철로 들어가는 길은 백 년 전 그곳으로 들어가는 느낌이다. 백 배는 낡았고 세 배는 더럽다. 술 냄새 땀 냄새 오줌 냄새. 


언제 무너질지 모를 것 같은 역에서 벗어나기 위해 열차에 얼른 올라탔다. 좌석에 노약자와 임신부가 앉아 있는 게 아니라 홈리스들이 침대로 이용하고 있다. 신발까지 벗고 코를 골면서 숙면을 취하고 있었다. 현재 시간 아침 8시 30분. 출근 시간 뉴욕 맨해튼 지하철의 모습. 뉴욕 지하철의 주인은 홈리스였다. 홈리스가 아닌 사람들은 한쪽 구석에 몰려서 아무렇지도 않게 핸드폰을 바라보고 있었다.

  

뉴욕시 홈리스서비스국 통계를 찾아보니 시설에 거주하는 홈리스는 7만 명 정도다. 뉴욕 인구를 850만으로 잡으면 120명 중 한 명이 홈리스라는 얘기다. 거리에서 지내는 노숙인은 3500명 정도. 서울시 통계가 700명 정도니까 서울보다 5배 정도 많다는 뜻이다. 


이상한 일이다. 그렇게 넓고 풍요로운 나라에서 지하철 청소는 왜 제대로 하지 않는 걸까. 한국에서 지하철이 이 정도 수준이면 민중봉기라도 일어났을 거다. 홈리스 숫자는 왜 줄어들지 않는 걸까. 넓고 풍요로운 대신 비싸기 때문일까. 아니면 크게 신경을 쓰지 않는 걸까. 그것도 아니면 포기한 걸까. 넓기는 한데 풍요로운 게 맞기는 맞는 걸까. 


지하철에서 나와서 영사관으로 걸었다. 세계의 중심 맨해튼이다. 브로드웨이가 있고, 타임스퀘어가 있고, 센트럴파크가 있다. 비가 살짝 내리는 겨울 아침 공기가 쌀쌀하다. 청소차에 도로공사에 출근 차량까지 뒤엉켜서 도로가 엉망이다. 여기저기에서 하얀 수증기가 뭉게뭉게 피어오른다. 뉴욕 특유의 난방 시설인 증기 배관이 새서 나오는 거라고 한다. 영화 블레이드 러너에서 묘사된 디스토피아가 도쿄인 줄 알았는데 뉴욕이었다. 넓고 풍요롭고 비싼 나라 미국의 심장 뉴욕 맨해튼의 거리는 복잡하고 축축하고 암울했다. 


뉴욕의 아침 거리. 활기찬 도시의 생생함 따위는 없고 디스토피아의 기운이 물씬 풍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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