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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농반진반 Feb 23. 2023

친절한 스미스 씨①

당황스러운 스몰 토크

(우당탕탕 미쿡 일기 5) 


딸아이 전학 절차를 미리 알아보지 못한 건 여유가 없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현장 박치기(맨땅에 헤딩이라도 한다)가 가장 빠르고 정확하다’는 기자 시절 한국적 노하우(?)가 미국에서도 통할 거라는 자신감이 마음 한편에 자리 잡고 있었기 때문이다. 


숙소에서 가장 가까운 미들 스쿨을 구글맵으로 검색해서 찾아갔다. 아따 중학교가 넓기도 넓다. 주차장이 서울광장이다. 차를 세우고 딸아이를 앞세워 메인 출입구쯤으로 보이는 곳으로 걸어갔다. 현관문이 굳게 잠겨 있다. (나중에 보니 미국의 관공서는 현관문이 열려 있는 경우가 거의 없었다. 한국은 민원실의 경우 개방돼 있는 경우가 보통이어서 처음에는 적응이 되지 않았다. 아마 안전 문제 때문일 거다.) 한국 학교는 교무실까지 언제나 열려 있는데. 쩝. 초장부터 예상이 빗나갔다. 좋지 않은 조짐이다. 초인종이 보인다. 마음을 가다듬고 눌렀다. 


헬로우. 하이톤의 목소리. 메이 아이 헬프 유? 맞다. 나는 도움이 필요하다. 예스. 아이 원 투 트랜스퍼 투 디스 스쿨.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이 흘러나온다. 뭐라도 대답해야 했다. 오 노 낫 미 마이 도터. 아마도 애스크 이스트 앤서 웨스트였을 거다. 잠시 침묵. 웨이러섹. 그래 답답한 놈이 나와라. 


입구에 웰컴이라고 쓰여 있지만 문은 언제나 굳게 잠겨 있다. 안전 문제 때문인지 관공서 문이 열려 있는 경우를 본 적이 없다.


교사로 보이는 안경 쓴 여성이 문을 열고 나왔다. 만면에 웃음을 지으면서 인사를 했다. 넷플릭스 웬즈데이에 나오는 식물 선생을 닮았다. 나는 다짜고짜 (예의가 없는 게 아니라, 언제나 준비한 걸 잊어버리기 전에 말해야 한다. 스몰 토크는 사치일 뿐) 딸아이를 소개하고 이 학교로 전학을 와야겠다고 선언(!)했다. 식물 선생은 잠시 당황한 눈치였지만 곧 정신을 차렸다. 그리고 학교에 오기 전에 먼저 Board of Education에 가서 등록을 하라고 설명했다. 포스트잇을 주머니에서 꺼내 (그게 왜 거기 있는지 신기했다) 친절하게 약도까지 그려줬다. 멀지 않은 곳이었다. 오케이. 땡큐. 씨유 레이터. (하지만 그 선생님은 다신 볼 수 없었다.)

 

교육청 현관문도 잠겨 있었다. 초인종을 누르고 다시 내 딸이 전학을 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두 번째는 언제나 쉽다. 디쥬 메이크 언 어포인트먼트? 어라. 젠장. 아임 쏘리. 아이 디든트. 인터폰에서 뭐라뭐라 설명이 이어진다. 낫 어베일러블 나우 블라블라 원 아우어 레이터 블라블라… 담당자가 없으니 1시간 뒤에 다시 오라는 뜻으로 추정이 된다. 오케이. 커피를 한 잔 마시고 다시 오면 되지.

 

얼굴에서 입이 압도적으로 큰 담당자는 큰 입으로 환하게 웃으면서 우리를 맞이했다. 환영한다. 축하한다. 잘 왔다. 말이 많고 빠르다. 하지만 친절하다. 어이없는 질문을 해도 차근차근 잘 설명해 준다. 결론은 온라인으로 전학생 등록을 먼저 해야 한다는 말이었다. 바이더 웨이. 캔 아이 씨 유어 어드레스? 숙소 계약서를 보여줬다. 돋보기안경을 꺼내 서류를 보더니 담당자는 더 환하게 웃었다. 


여기서부터는 의사소통에 다소 난항을 겪었다. 딸아이의 도움을 받아 가며 이야기를 나눈 결과, 내가 살고 있는 곳은 이 교육청 관할이 아니었다. 담당자는 큰 입으로 더 크게 웃으면서 다른 교육청 주소를 알려줬다. 현장 박치기도 준비를 어느 정도 했을 때 유용하다. 하지만 미국 선생들은 참 친절했다.   


모로 가도 중학교만 가면 된다. 어쨌든 수속을 마치고 등교를 시작했다. 처음이니까 딸아이와 며칠 동안 등하교를 같이 했다. 숙소에서 멀지 않았다. 주택가 소방도로 정도로 보이는 길을 10분 정도 걸어야 한다. 그 사이 교차로를 대여섯 개 건넌다. 좁은 길이고 차량 통행도 그리 많은 편이 아니어서 신호등은 없었다. 


등하굣길 모든 교차로에는 경찰이 배치된다. 미국이나 한국이나 경찰은 극한 직업임에 분명하다.


등하굣길에 있는 모든 교차로에는 경찰이 배치돼 있었다. 언제나 형광색 옷을 입고 있는 경찰은 학생들이 길을 건널 때마다 STOP이라고 쓰여 있는 커다란 팻말을 들고 같이 건넜다. 굿 모닝. 유 캔 크로스. 해브 어 굿 원. 일일이 학생들과 인사를 나누고 엄지척을 보낸다. 


아이를 학교에 데려다주고 집으로 돌아가는데 교차로에서 경찰과 눈이 마주쳤다. 디스 웨이? 예스. 경찰은 빨간 팻말을 들고 나에게 와서 같이 길을 건넜다. 이건 좀 오버인데. 도로에 다니는 차는 없었다. 아이 쏘 유 위드 유어 키드. 오 땡큐. (그에게 고마울 건 없지만 딱히 대답할 말이 없었다.) 같이 길을 건너는 4-5초가 꽤 길었다. 해브 어 나이스 위크엔드. 다시 엄지척. 아. 오늘은 프라이데이. 유 투. 조금 부담스러웠지만, 미국 경찰은 참 친절하다.  


도서관에서, 은행에서, 가게에서, 식당에서, 아파트 관리실에서, 직원에게 뭘 물어보면 대부분 지나칠 정도로 친절하게 응대한다.  그 친절하다는 일본에 절대 뒤지지 않는다. 이게 쉬운 일 같아도 그렇지 않다. 대학 시절 서점에서 꽤 오랫동안 알바를 한 적이 있다. 처음 시작하면서 손님들에게 언제나 친절하게 대하겠다고 스스로 다짐을 했다. 서비스업에 종사하는 사람이 불친절하다면 그건 자격도 없고 능력도 없다는 거라고 생각했다. 손님이 오면 어서 오세요. 손님이 나가면 안녕히 가세요. 책이 어디 있는지 물어보면 바람처럼 달려가서 찾아줬다. 하지만 딱 일주일이 한계였다. 친절해도 되고 안 친절해도 되면, 친절해도 아무런 보상이 없으면, 인간은 결국 쉬운 쪽을 택하기 마련이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의지가 박약했다. 


그럼 미국 사람들은 천성이 친절한 걸까. 아니면 여기 뉴저지 프린스턴 사람들이 유달리 친절한 걸까? 


우리는 길을 걷다 눈을 마주치면 보통 민망해서 고개를 돌리거나 딴청을 하게 된다. 하지만 여기 사람들은 눈을 피하지 않고 환하게 웃어 준다. (다 그런 건 아닌데 그런 사람이 꽤 많다.) 아파트 복도에서 지나칠 때도, 엘리베이터를 같이 타도, 인사를 나누고 짧은 스몰 토크를 하는 사람들이 많다. 미국은 정말 이토록 친절한 나라였단 말인가. 


하지만 그 친절함에 대한 감동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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