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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농반진반 Mar 03. 2023

미국 거지는 영어를 잘한다

외식이란 무엇인가

미국일기 #7 (물가 편1)


KBS에서 기자 생활을 할 때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미국 출장을 간(지금은 온) 적이 있었다. 뉴욕과 워싱턴을 오가며 열흘 정도 촬영을 하는 일정이었다. 벌써 15년 전쯤이었나. 젊었고 (실제론 어렸고) 의욕이 (지나치게) 넘치던 시절이었다. 하루에 인터뷰를 다섯 개, 여섯 개나 잡아서 미친 듯이 일정을 소화해 나갔다. 지금 생각하면 요령이 없었다고 할까. 같이 촬영을 갔던 선배 눈에는 참 답답해 보였을 거다.


지난한 출장을 마치고 한국에 돌아와 제작도 끝내고 드디어 가장 중요한 일을 해야 하는 시점이 됐다. 정산. 취재에는 실패해도 정산에 실패하면 무능한 기자(특히 피디)라는 방송가의 오랜 격언이 있다.


영수증을 산더미 같이 쌓아 놓고 식비와 숙박비, 교통비 등으로 분류했다. KBS 출장비는 워낙 짜기로 유명하다. 회사에서 책정해 놓은 식비와 숙박비가 현지 물가에 비해 한참 모자랐다. 통역비 등을 조금 부풀려서 식비 등으로 충당하는 일도 다반사였다. (10년이 넘게 지났으니 하는 말이다. 내가 그랬다는 말은 아니다. 언제나 그렇지만 들은 얘기다.) 다시는 해외 출장을 가나 봐라. 언제나 이런 푸념으로 해외 출장은 마무리 됐다.


이 와중에 가장 놀라운 건 주차 요금. 한국 돈으로 100만 원이 넘게 나왔다. 특히 뉴욕 주차비는 살인적이었다. 계속 이동을 하면서 주차를 급하게 짧게 짧게 해야 하는 상황이어서 발생한 일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주차 요금 100만 원은 한국의 상식과 맞지 않았다. 이렇게 처음으로 미국의 어마어마한 물가를 온몸으로 체험하게 됐다. 하지만 그냥 한번 지나가는 여행 같은 일이었으니까 100만 원이든 천만 원이든 상관없었다. 빌어먹을 미국의 물가가 내 생활이 될 줄은 정말 몰랐다.


얼마 전 뉴욕에 갈 일이 있었다. KBS 특파원들이 일하는 사무실에 잠깐 들렀다. 가족 말고 한국말로 대화하는 게 얼마만인가. 특파원들도 열악한 환경에서 고군분투하고 있는 건 마찬가지였다. 가볍게 점심이나 할까. 맨해튼에서 나름 유명한 집으로 갔다.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노포 분위기였다. (우리 기준으로 보면) 절대 고급스러운 느낌은 아니었다.


브루클린 다이너. '뉴욕 맛집'이라고 해 봤자 햄버거나 핫도그 따위를 파는 (우리 시각으로는) 정크 푸드 식당일 뿐이다. 나이가 지긋한 웨이터 할배가 친근하게 인사를 한다. 식당에 웨이터가 많기도 많다. 조금 과장하면 손님 수나 웨이터 수나 거기서 거기다. (코민스키 메쏘드라는 미드를 보면 마이클 더글러스 단골 식당에서 쟁반을 들고 손을 바들바들 떨면서 나무늘보처럼 움직이는 대략 여든 살쯤 보이는 할배 웨이터가 나온다. 그 정도는 아닌데 몇 년 뒤면 그렇게 될 것 같은 분들도 있었다.)  


열차 식당칸 같이 좁아터진 좌석에 앉아서 메뉴를 봤다. 여기 시그니처는 핫도그라고 한다. 가격이. 헉. 24달러? 아직 달러가 피부에 와닿지 않는다. 네이버 환율 계산기에 넣어보니 응? 3만 원? 핫도그는 3천 원 정도 해야 하는 거 아닌가? 여기 핫도그는 금테를 둘렀나. 아쉬운 김에 반주라도 한잔? 생맥주는 10달러. 글라스 와인 15달러. 슬쩍 보니 밀크셰이크 12달러. 세상에. 여기 카스나 테슬라, 아니 테라는 없어요? 라고 묻지는 않았다.


가격은 맘에 들지 않지만 양은 어마어마하다. 미국 사람들은 기본적으로 대식가인 모양이다. 뱃속에 들어 있는 밥통의 크기가 다르다. 이걸 다 먹는다고? 먹는다. 우리는 남긴다.


나름 격조 있는 식사를 하고 정산을 할 시간. 아직까지 미국에서 하는 모든 활동은 출장의 연속이다. 정착에는 실패해도 정산에는 실패하면 안 된다. 식사가 48달러에 생맥주 20달러. 68달러. 그러니까 9만 원. 어이구야. 징하다 징해. 물론 이게 다가 아니었다. 뉴욕 주세 4%, 뉴욕 시세 4%, 메트로폴리탄 교통세(??????) 0.375%. 결국은 한국의 부가세 10%와 비슷한데 상품 가격에 포함이 되지 않고 따로 계산한다. 동네 식당에서 밥을 먹어도 세금을 따로 내는 6성급 특급 호텔에서 식사를 한 것과 비슷한 기분을 느낄 수 있다. (적어 놓고 보니 좋은 느낌인가.) 이제 75달러. 10만 원이 됐다.  


여기에 결정적으로 팁 18%. 15년 전 출장 때는 팁이 10% 정도였던 것 같은데 지금은 가장 낮은 옵션이 18%가 됐다. 팁이라는 문화에 익숙하지 않은 한국인에게 18은 강력한 욕설이면서 또한 강력한 저항이 느껴지는 숫자다. 18. 속으로 욕을 하면서 저항을 이겨냈다. 그리하야 최종 85달러. 12만 원. 둘이 ‘간단하게’ 점심을 했는데 두당 6만 원이 됐다. 이 정도 금액이면 고급 스시 오마카세 정도는 먹어야 하는 거 아닌가. 핫도그 한 그릇(?) 먹고 내기에는 아까운 돈이다.  


미국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아 저녁을 먹으러 중국 식당에 간 적이 있다. 계산을 할 때 아이패드 같은 걸 이용해 팁을 누르는 시스템이었다. 객관식이었다. 1번 20%. 2번 22%. 3번 25%. 최저 비율이 20%였다. 그 이하로 누르려면 직접 적어야 한다. 15% 입력했다. 팁이 이 정도면 되는 거 아닌가? 그렇게 생각했다. 종업원은 생각이 달랐던 모양이다. 눈에 쌍심지를 켜고 물었다. “내 서비스가 문제가 있었냐?” 내가 당신에게 특별히 서비스를 받은 적이 있었나. 누가 내 담당이었는지 기억이 나지도 않았지만, 누군가 주문받고 누군가 음식을 가져다준 게 다였다. “노. 낫 액추얼리.” 나도 쌍심지를 켜고 어글리 코리안의 진정한 얼굴을 보여주고 싶었다. 하지만 영어로 그러기는 힘들었다. 종업원은 중국말인지 영어인지 뭐라 뭐라 계속 떠들었다. 참다못해 나도 한마디 쏘아붙였다. “아이 씽크. 잇 이스 이너프.” 종업원은 아주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태블릿을 보다가 뭐라 말도 없이 쌩하고 뒤돌아 사라졌다. 나는 그 뒤로 팁은 20%를 누른다.


한국에서 외식은 집에서 밥 하기 싫으면 선택하는 차선책이었고 매일매일 벌어지는 일상이었다. 주말이면 방에서 뒹굴거리다가, 귀찮은데 삼겹살이나 먹으러 갈까? 하고 일어나 동네 식당에 걸어가면 끝이었다. 세 식구 삼겹살 3인분. (식구들이 모두 양이 적다.) 공깃밥 두 개. 된장찌개. 소주 한 병. 사이다 한 병. 6만 원이면 충분했다. 그것도 귀찮으면 배달의 민족. 족발 대짜. 소주 한 병. 5만 원이면 떡을 친다.


회사에서도 그렇다. 퇴근하면서 소주 한잔? 세 명이서 감자탕 대짜 하나. 공깃밥 3개. 소주 3병, 맥주 2병. 7만 원이면 나쁘지 않다. (물론 2차를 가고 3차를 가면 술값은 눈덩이처럼 불어나기 마련이다. 그걸 생각하면 한국이 더 비싸다는 이상한 결론이 나온다.)


여기서 한국에서처럼 외식을 하다가는 거지꼴을 못 면한다. 미국 거지야 영어라도 잘 하지만, 내가 거지가 되면 한국어로 구걸을 해야 한다. 미국에서 외식은 특별한 날에 하는 이벤트여야 한다. 돈을 펑펑 (내 기준에서) 쓰면서 기분을 내고 싶을 때. 그렇게 돈을 써도 괜찮은 날에 하는 게 외식이다. 그래야 팁을 줄 때 즐겁고 손이 떨리지 않을 거다.


그래서 이제 대부분의 식사를 집에서 해결할 수밖에 없게 됐다. 그게 속도 편하고, 맛도 있다. 그런데 여기서도 또 문제가 생겼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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