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긴 서양 사람들이 참 많네. (당연하지. 서양이니까) 마이클무어와 똑같이 생긴 사람이 건들건들 지나간다. 계산대에서 떠들고 있는 저 직원은 모건프리먼 할아버지 아니신가? (아님. 에디 머피랑 더 닮았음) 다코타패닝과 아네트베닝이 마주 앉아서 피자를 먹고 있다. 피자집 주인은 로버트드니로? 서양 사람이 동양인을 보면 장동건이나 김경래나 거기서 거기라지만(그냥 예를 들었을 뿐이다), 내 눈에는 로버트드니로나 피자집 주인 알베르토나 요기서 요기다.
공항에 내렸을 때는 몰랐는데 동네에서 생활이라는 걸 하다 보니 뭔가 좀 까끌까끌했다. 여기가 현실이 아니라 가상세계, 혹은 거대한 할리우드 세트장이라는 느낌이 자꾸 들었다. 사람들은 모두 서프라이즈 서양 재연 배우들 같이 생겼고, 집은 진짜 사람이 거주하기에는 부실한 가건물처럼 느껴진다. 달러는 아무리 봐도 블루마블 게임 머니 비슷하고, 음식은 촬영용으로 대충 만들어서 사람이 먹을 수 있는 음식이 아닌 것 같다.
혹시 2023년 판 트루먼 쇼 아닐까. 방송국을 헤매다 우연히 세트장에 들어왔는데 누군가 밖에서 문을 걸어 잠근 뒤 앞으로 평생 세트장에서 살아야 한다는 말을 남기고 표표히 사라졌다. 나는 이제 여기서 어떻게 살아야 하나. 일면식도 없는 재연 배우들과 말이다. 가짜 밥을 먹으면 배가 부를까. 수도를 돌리면 진짜 물이 나올까. 여기서 흐르는 시간은 진짜일까 가짜일까.
세트장 이곳저곳을 둘러봤다. 낯선 재연 배우들은 말도 통하지 않고 불편하다. 그런데 저 멀리 한국에서도 친숙한 미국 브랜드가 보인다. 맥도널드, 버거킹, 쉑쉑버거를 발견하고 고향에 온 것처럼 마음이 급 편안해진다. 차도에 매달린 신호등 위에 비둘기 한 마리, 건너 빌딩의 웬디스 햄버거 간판을 읽고 있다. 정태춘의 ‘92년 장마 종로에서’에는 나오지만 한국에서는 오래전 사라진 웬디스를 발견했을 때는 콧잔등이 시큰했다. 코스트코는 서촌 통인시장처럼 친숙하고, 스타벅스는 그냥 말 그대로 스타벅스처럼 편안했다. 소비를 할 때만큼은 이민자의 스트레스가 사라진다. 글로벌 자본주의는 무섭고 위대하다.
오래된 대학가의 스타벅스는 뭔가 있어 보이지만 별거 없다.
스타벅스에 들어가서 커피를 고르고 계산을 한다. 스타벅스는 한국보다 미국이 싸다고 했는데 환율도 높고 물가도 많이 올라서 이제 한국보다 비싸다. 여기는 미쿡이니까 아메리카노 한 잔, (톨은 비싸니까) 숏 사이즈로 주세요. 손님, 숏 사이즈 컵이 없는데 톨 사이즈 컵에 드려도 될까요? 슈어. 노 프라블럼. 카드를 꽂고 계산을 하는데 팁을 누르라고 한다. 응? 팁? 테이크 아웃인데 팁? 망설이다 망신당할까 무서워 제일 낮은 18%를 눌렀다. 팁에 세금까지 더하면 3달러 쯤 하던 커피가 4달러가 되는 마술이 눈앞에서 벌어진다. 눈을 부릅뜬다고 야바위를 이길 수는 없는 법이다.
숏 사이즈 커피가 톨 사이즈 컵에서 한강처럼 넘실댄다. 커피 인심은 대륙의 풍모인데 맛은 더럽게 없다. 싱겁다. 역시 스타벅스는 전통(?)의 한국 스타벅스인가. 그런데 테이블은 왜 이렇게 더럽나. 반납대 주변은 거의 쓰레기통이다. 여기는 청소를 열심히 하지 않는 것이 미덕인가 보다. 한국 스타벅스에서 느끼는 팬시함 따위는 여기 트루먼쇼 설정집에 존재하지 않는다.
미국 스타벅스는 내가 아는 한국 스타벅스와 다른 종류였다. 남쪽 귤나무를 북쪽에 옮겨 심으면 탱자나무가 된다고 했다. 여기는 겨우 강남과 강북을 가르는 회수가 아니라 수십만 배쯤 넓은 태평양을 건넌 곳이다. 귤은 탱자가 아니라 커다란 오렌지가 돼 버렸다. (사실 거꾸로인가.)
교통 법규라든가 금융이나 교육 시스템 같은 것들은 그냥 다른 거라고 여기고 배우고 적응하면 된다. 어렵지 않다. 저기 대통령이 윤석열이고 여기 대통령은 바이든이라는 사실도 생활인에게는 크게 중요하지 않다. 어려운 건 오히려 아주 사소한 것들이다.
여기 주택은 신발을 신고 걸어 들어가도록 설계 돼 있다. 그럼 우리 한쿡살암은 신발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까. 샤워실에는 긴 호스가 아니라 벽에 붙어 있는 샤워 꼭지만 달랑 달려있다. 씻을 때는 편리하다. 여행할 때는 괜찮다. 청소를 하려면 문제가 생긴다. 호스를 끌어서 구석구석 물을 뿌려 깨끗하게 헹궈야 하는데. 어쩌란 말인가. 조명은 왜 이렇게 어두운 것이며, 왜 방에는 먼지 풀풀 날리는 양탄자를 깔아 고정해 놨고, 왜 아직 번호키가 아닌 열쇠를 가지고 다니며, 음식물 쓰레기봉투는 왜 없고, 결정적으로 왜 여기는 220 볼트가 아니라 죄다 110 볼트인 것인가.
신발을 둘 곳이 없다. 미개한 나라다. 신발을 신고 방을 드나들다니.
정말 짜증 나는 건 노안이 와서 니켈과 다임과 쿼터가 분간이 가지 않는다는 점이다. 100원과 500원은 눈 감고도 구별할 수 있다. 이건 나의 잘못인가. 유나이티드 스테이츠 화폐 주조 당국의 잘못인가. 다이아몬드를 감별하는 자세로 동전을 노려보고 있으면 마트 캐셔의 눈초리가 점점 따가워진다. 포기하고 지폐로 계산하고 동전은 점점 쌓인다.
‘살인적인’ 물가(상상을 초월한다. 서부는 더 하다고 하는데 정말 먹고살기 힘든 곳이 미국이다. 물가 얘기는 다음에)에 우울해하던 중 통인시장 같은 코스트코에서 5달러에 두 개를 묶어 놓은 멜론을 발견했다. 보기에는 평범한 멜론인데 이름은 칸탈루프? 이건 학명인가? 구글에 쳐보니 멜론의 한 종류라고 한다. 오. 득템.
잘랐다. 누구냐 넌. 색깔이 초록이 아니라 주황이다. 멜론인가 호박인가. 너마저 나를 기만하는 것이냐. 입에 넣었다. 응? 뭐야. 야. 너무 맛있잖아. 앉은자리에서 한 접시를 다 비웠다.
실제로 맛있다.
보통 사람은 ‘걱정 편향’적이다. 나도 그렇다. 23시간 편안해도 1시간이 불편하면 그날은 문제가 있는 날이 된다. 그리고 다음날 24시간은 모두 불편해진다. 불편한 1시간이 편안한 23시간을 압도한다. 사람은 또 ‘다름 편향’적이다. 눈 코 입이 똑같은데 피부색 하나 다르다고 불편하다. ‘작은’ 다른 점에 집중하면 ‘큰’ 같은 점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 뭔가 공평하지 않다. 왜 작은 게 큰 걸 지배하도록 내버려 두고 있나.
제까짓게 주황색이어도 멜론은 멜론이다. 스타벅스가 맘에 들지 않으면 다른 커피숍이 백만 개쯤 대기하고 있다. 110 볼트야 변압기 하나면 해결될 문제 아니겠나. 영어를 써도 쏘련말을 써도 우리는 모두 휴먼빙이고 스마트폰을 쓰는 호모사피엔스다.
기대와 다르기 때문에 실망한다. 하지만 가끔은 예상하지 못한 곳에 즐거움 숨어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호박 같은 멜론이 맛있을지 맛없을지 먹기 전에는 알 수 없는 일이다. 그리고 한 번 발견한 즐거움은 차차 일상이 될 것이다. 혀가 빨갛게 물들 때까지 멜론을 먹어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