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대한 집중해서 기억을 되살려 본다. 여기서 우회전이었었었었었었었던 것 같은데. 아닌가. 아니 맞나. 지나쳤네. 돌아갈까. 아니다. 저 표지판 아까 본 것 같다. 저 표지판은 어디에나 있는 거잖아. 망설임과 과감함의 파도를 넘나들며 방향을 한 번도 꺾지 못하고 나는 계속 직진했다. 중요한 건 꺾이지 않는 마음이랬나. 원래 인생은 직진 아니었나. 시간은 오후 두 시 반. 해를 마주 보고 달리고 있다. 대략 남쪽. 이렇게 가다 보면 아틀랜타도 나오고 마이애미도 나오는 건가.
될 대로 되라지. 반쯤 포기한 상태로 직진을 하다 보니 앞뒤에 차량이 하나씩 보이기 시작했다. 옳거니. 저 멀리 신호등이 반짝인다. 오 마이 갓. 주유소. 그리고 건물들. 여기가 바로 천국인가. 눈물이 날 지경이었다. 이제 편의점만 찾으면 된다. 응? 저게 뭐야. 눈이 번쩍 떠졌다. 오전에 차를 구매하기로 결정한 자동차 매장 비스무리하게 생겼다. 미국은 넓지만 동네는 좁을 수 있다.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하고 자동차 매장으로 돌진했다. 맞다. 아무렇게나 차를 세우고 사무실로 뛰어들어갔다. 어퓨미니츠라고 호언장담했던 딜러가 책상에 앉아 밉쌀스럽게 한가로운 오후를 즐기고 있었다.
아이 니드 투 차지 마이 핸드폰. 핸드폰? 휴대폰, 아니 아니, 스마트폰, 셀폰, 왓에버. 두 유 해브 차징 라인? 슈어. 아이폰? 안드로이드? 안드로이드. 아임 쏘리. 마이 폰 이즈 어 아이폰. 음. 웨잇 어 미닛. 딜러는 옆 사무실에 가서 하나 빌려왔다. 라인을 낚아챘다. 아 윌 리턴 잇 레이터. 프라미스. 오케이? 렌터카에 달려가 라인을 꽂고 핸드폰을 연결했다. 오 마이 갓. 오 마이 폰. 오 마이 로드. 주인님이 부활하시었다. 한국에서는 티맵의 노예였지만 여기서는 구글의 노예다. 주인만 바뀌었을 뿐이다.
차량 구매에는 실패했지만 다행히 딸내미 하교 시간에는 늦지 않았다. 오늘 하루는 어땠니? (아빠는 다이내믹했단다.) 한국에서 중학교 2학년을 마치고 온 딸아이는 이제 등교 나흘 째다. 친구 사귀기 너무 힘들어. 좀처럼 약한 모습을 보이지 않는 딸아이가 한숨을 내쉬면서 조수석 의자에 깊이 몸을 묻었다. 표정이 좋지 않다. 어제도 좋지 않았다. 너무 걱정하지 마. 금방 적응할 거야. 이 시간도 모두 지나가리라.
밥을 하고 된장찌개를 끓일 시간이다. 그래 이런 게 음식이지. 바깥양반이 퇴근하고 돌아왔다. 밥을 차리는데 딸아이가 엄마 옆에 앉는다. 그리고.
갑자기 울음보를 터뜨렸다.
한국에 가고 싶어. 딸은 엄마 품에 안겨 눈물을 줄줄 흘렸다. 엄마는 딸을 꼭 끌어안고 등을 토닥였다. 그래 그래 돌아가자. 한번 터진 울음은 좀처럼 잦아들지 않았다. 딸아이는 세상이 무너진 것처럼 통곡했다.
동네 공립 중학교. 미드에 나오는 정글 같은 분위기는 아니지만, 딸아이는 아직 아침마다 학교에 가는 게 고역이다.
생각하지 못한 일이었다. 아이들은 어른보다 ‘훨씬 빨리’ 적응한다는 주위의 말만 철석같이 믿었다. 어른들이 이리 뛰고 저리 뛰면서 '세팅'을 하고 나면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 줄 알았다. ‘훨씬 빨리’라는 시간 안에 어떤 고통과 상처의 과정이 포함돼 있는지 생각하지 못했다. 반드시 지나고 난 뒤에야, 그리고 안전하게 목적지에 도달한 뒤에야, ‘훨씬 빨리’라고 말할 수 있을 뿐이다. ‘부산행’ KTX를 타면 부산에 ‘훨씬 빨리’ 갈 수 있다고 하지만 그 시간 동안 좀비들이 공격하고 연인이 감염되고 가족을 잃는 거대한 사건들이 터질 수 있는 거다.
울음을 진정하고 들어보니 단순히 영어 수업이 낯설고 의사소통이 어려운 문제가 아니었다. 딸아이는 (누구나 그렇듯이) 한국에서 친구들과 선생님들이 겹겹이 둘러싸고 있는 복잡한 생태계의 망 한가운데에서 있었다. 주위의 모두와 모종의 끈으로 촘촘하게 연결된 존재였고, 튼튼하고 안정된 포지션에 있었다. 어떤 끈이 가늘어 지거나 심지어 끊어져도 연결된 끈의 수가 거의 무한대에 가까웠기 때문에 언제나 안전했다. 그리고 그 안전한 세계의 중심은 자기 자신이었다. 그 존재감이 아이의 정체성이었다. 그 존재감의 주된 양분은 친구들과의 우정, 자존감, 안정감, 성취감, 뭐 그런 종류의 감정들이었다.
그런데 여기와서 갑자기 아무와도 연결되지 않은 외로운 섬이 되었다. 아무도 이름을 불러주지 않는 꽃이 된 셈이다. 그래서 별안간 꽃이 아닌 게 돼 버렸다. 아이는 평생 (14년) 동안 정성스럽게 가꾸어 놓은 세계가 모래성처럼 사라지고, 아무것도 없는 허허벌판에 내 던져진 느낌을 받고 있을 터였다. 상실감. 무력감. 불안감. 막막함. 그 절박함을 본인 말고 누가 상상이라도 할 수 있을까.
아이에게 달라지지 않은 단 하나의 무언가가 있다면 그건 아마 부모와의 관계일 거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사춘기 아이에게 부모의 역할은 제한적이다. 아이가 다른 관계를 새로이 구축하고 끊어진 끈을 다시 이어서 아름답고 튼튼한 망을 복구할 때까지 옆에서 잘 지켜볼 수밖에 없다.
된장찌개에 넣은 두부가 너무 딱딱했다. 한인마트에서 산 식재료들은 한국과 아주 미묘하게 달랐다. 한마디로 맛이 없었다. 아이는 크게 투정을 하지 않고 고개를 숙이고 두부를 씹어 먹었다. 나도 식어버린 두부를 입에 넣었다. 혓바닥이 까끌까끌했다. 그런데. 나는 미국에 온 뒤로 열흘 동안 누구와 말을 섞었지? 너, 아니 나는 괜찮은 거니? 아이에게 딱딱한 두부는 어른인 나에게도 딱딱했다. 두부를 목구멍으로 꿀꺽 삼켰다. 사래가 걸렸다.
어제 미국 전화를 개통했지만 전화가 올 곳은 없었다. 나도 전화할 사람이 없다. 마트에서 딱딱한 두부를 사거나, 보험사 콜센터 직원에게 나는 개를 키우지 않는다고 대답할 때 말고는 말을 할 기회도 없다. 아무도 나를 찾지 않고, 내가 찾을 사람도 없다. 그래도 괜찮니? 원래 혼자 놀기를 좋아했다지만, 앞으로 4년을 이렇게 살아야 한다. 정말 괜찮은 거니? 어른은 친구가 없어도 되는 걸까? 바깥양반과 딸 말고는 나의 이름을 불러줄 사람이 정말 필요하지 않은 걸까?
아마. 괜찮을 거라고 생각했다. 조용히 살림하면서 소설을 쓰는 생활도 나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여기서 새로운 세계를 다시 만들어 나가야 하는 딸아이와 다르게, 나는, 나의 세계는, 한국에 그대로 존재하고 있으며 여기서는 그 세계와 일정 강도의 끈만 유지하면 그만이라고 생각했다. 이 나이에 새로운 친구를 사귈 필요가 있나. 소설 쓰는 것도 버거운데 여기서 뭔가 새로운 관계를 만드는 게 가능하기나 할까. 약간의 외로움은 있겠다고 예상했지만 그 정도는 시크하게 넘길 수 있다고 낙관했다. 더구나 나는 외로움이라는 것을 '역설적으로 꽤나 자기 과시적인 감정'이라고 생각하는 편이었다. 하지만 딱딱한 두부를 씹으면서 느꼈다. 나도 외롭구나 X발.
미국에서 40달러를 주고 산 AI, 알렉사에게 물어봤다. Alexa. Are you lonely too? 이놈(혹은 년)은 단호했다. No. Because I am never really alone. Although, when the WiFi is out, I’d feel disconnected. 알렉사에게 외로움은 연결되지 않았다는 느낌이구나. 사람도 마찬가지다.
한국에서는 네이버 클로버 스피커를 썼는데 여기 와서 사망하셨다. 새로 입양한 AI는 알렉사. 영어밖에 못하는 멍청한 놈이다.
어른인 나는 사춘기 딸아이와 다르다고 생각했던 게 착각이었다. 한국에서 내가 만들었던 세계와 다른 무언가를 (딸아이와 똑같이) 여기서 나도 새로 만들어내야 한다는 걸 몰랐다. 부정한다고 거부할 수 있는 건 아니다. 인간은 애나 어른이나 모두 관계 속에서 그 무언가가 된다. 관계가 없으면 어른도 외롭다. 그저 외로움을 옆에 놓아두고 모른 척하는 스킬을 조금 배웠을 뿐이다. 외로움은 모른척한다고 옆에서 계속 혼자 잘 지내지 않는다. 외로움도 외로우면 문제가 생긴다.
20년 넘게 하던 밥벌이를 작년에 그만뒀다. 소설가가 되겠다는 허황된 얘기를 하고 다녔지만 그건 그저 변명이었다. 막막함. 불안감. 외로움. 출판과 출국을 준비하느라 정신없이 시간을 보내느라 몰랐다. 출국을 앞둔 어느 날 친구들과 술을 마시다 밤 늦은 시간 맥락 없이 울음이 터졌다. 그리고 한참을 울었다. 다행히 그래도 되는 친구들이었다. 그 친구들은 이유를 묻지 않았다.
딸아이나 어른아빠나 마찬가지다. 여기서 우리는 모두 새로운 세계를 만들어야 하고, 그것은 시간이 걸리는 일이고, 그 시간 동안 외로움을 외롭게 놔두어서는 안 된다. 버젓이 옆에 있는 외로움을 굳이 모르는 척할 필요가 없다. 그놈도 친구가 필요하다. 그놈도 외로우면 비뚤어진다.
핸드폰은 충전만 시켜주면 다시 살아나서 원래대로 돌아오고, 알렉사는 와이파이만 있으면 행복하지만 사람이 사는 건 그렇게 간단하진 않다. 그래서. 외로움을 이기는 완벽한 방법이라는 건 있을 리가 없다. 이길 필요도 없고 이길 수도 없기 때문이다. 외로움은 그저 저절로 생기는 비듬 같은 거다. 털어 내도 반드시 다시 생긴다. 비듬 샴푸를 써도 다시 생긴다. 모두 없는 척할 뿐이다. (외로움 편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