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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농반진반 Feb 03. 2023

외로움을 이기는 완벽한 방법 ①

내비게이션 없이 운전하기

# 우당탕탕 미쿡 일기 1


미국으로 이민을 '가는' (이미 미국에 있는 지금은 '오는') 건 꽤나 즉흥적인 결정이었다. 출국일까지 남은 기간은 불과 석 달 쯤이었나. 그 즈음 너무 많은 일이 있었다. 암수술을 했고, 기자를 그만뒀고, ‘초보 작가 김경래의 첫 소설’이 출간 됐고, 출판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는 ‘도서출판 농담과 진담’의 김경래 사장은 파주 출판단지와 교보 문고 어딘가에서 헤매고 다녔다. 아내는 그 즈음 미국 회사에 취업을 해서 한국에서 재택근무를 막 시작한 터라 사정은 비슷했다.   


아무도 차분하게 이민을 준비할 시간이 없었다. 둘 다 처음 하는 일에 신경이 곤두서있어서 뭔가를 검색할 여유조차 없었다. 내일 걱정을 오늘 하지 말자. 오늘 걱정도 가급적 내일로 미루자. 거기도 사람 사는 곳이다. 가면 어떻게 해결이 되겠지. 언제나처럼 게으름과 여유의 모호한 경계에서 출국일까지 버텼다. (애를 어떤 학교에 어떻게 넣을지도 챙기지 않았던 건 지금 생각해도 너무했다.)  


-내일 걱정은 지금도 내일 하고 있지만, 예상하지 못한 사태는 '오늘' 줄기차게 벌어졌다.

-여기도 사람 사는 곳은 맞지만, ‘다른’ 사람들이 사는 곳이었다.

-결국 어떻게 해결이 됐지만, ‘어떻게’는 다종다양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이민가방 8개로 시작한 미국 생활. 먹을 걸 더 들고 왔어야 했다. 옷은 없어도 산다.


그렇게 뉴저지에 도착했고 열흘이 흘렀다. 하루하루가 240시간 같았다.  


천신만고 끝에 딸내미를 공립학교에 집어넣었고, 6개월짜리지만 그래도 호텔을 벗어나 집 비스무리한 곳에 입성했다. 온라인으로 유심을 하나 사서 미쿡 전화를 개통했고, 사회보장번호를 받았고, 운전면허 시험을 예약했다. (면허 시험만 40일 대기라니… 미국은 정말… 할 말이 많지만 나중에 하겠다.) 우여곡절 끝에 은행 계좌도 트고 카드도 만들었다.


그리고 오늘은 중요한 날이다. 드디어 렌터카를 벗어나 차를 사는 날이다. 렌터카 비용은 줄이고 줄여서 보험까지 하루 50달러 선이었다. 그래도 가급적 빨리 차를 구매하는 게 이득이다.


이곳저곳을 판매점을 들러 구경을 하다가 어렵게 구매할 차량을 확정하고 계약을 하려는데 딜러가 두 가지를 요구했다. 은행에서 체크를 끊어 오고, 보험에 먼저 가입해야 차량을 인수할 수 있다고 한다. (뉴저지 운전면허를 요구하는 딜러도 있고, 아닌 딜러도 있다. 콩글리시로 케바케, 다 엿장수들이다.) 딜러가 보험사 번호를 하나 알려준다. A few minutes면 가입할 수 있단다. 그래? 오케이. 이제 영어가 두렵지 않다. 영어가 나를 두려워할 뿐이다. 답답한 건 내가 아니라 상대방이다…라는 자세로 마음을 고쳐먹은지 오래다.


은행 계좌는 아내 이름으로 돼 있다. 점심시간에 아내 회사로 픽업을 가서 근처 은행을 들러 처리하고 시간이 남으면 간단하게 점심을 때우기로 했다. 이름도 거창한 뱅크오브아메리카는 점심시간인데도 대기 인원이 한 명밖에 없었다. 수표 한 장 끊는데 15분 넘게 걸렸다. 계좌 이체를 하지 않고 수표로 거래를 하는 것도 이해가 되지 않는데, 그 수표 한 장을 끊는 데 써야 할 것도 많고 시간도 많이 걸린다. 그리고, 그런데, 아무도 바쁘지 않다. 은행 텔러는 옆 사람과 커피를 홀짝거리면서 한참을 잡담했다. 꾹 참고 항의하지 않았다. (영어로 해야 하니까.) 차 사서 축하한다고 덕담도 길게 한다. 땡큐. 너의 친절한 마음은 알겠다. 그러니까 어여 수표를 달라.  


지겹고 지겨운 햄버거로 점심을 급하게 때우고 아내를 다시 회사로 데려다줬다. 아침저녁으로 딸내미와 아내를 픽업하다 보면 내가 우버 기사인지 타다 기사인지 모르겠다.


아내의 회사는 숙소에서 13마일 정도. 킬로미터로 하면… 몰라몰라 20킬로 정도 될 거다. 굽이굽이 산길이 이어지고 길가에는 저 푸른 초원 위의 그림 같은 집들이 즐비하다. 저런 집에 무서워서 살겠나. 미국 사람들이 왜 총을 가지려고 하는지 이해가 될 듯도 하다. 숙소까지 가기에는 시간이 없다. 따님 픽업까지 남은 시간은 1시간 30분 남짓. 보험 가입하고 차량 인수하려면 빠듯하다. 길가에 차를 대고 보험사에 전화를 걸었다. 미션 오브 투데이. 스따뜨!


영어는 언제나 어렵지만 전화로 뭔가를 처리하는 건 더더욱 어렵다. 대화를 시작하면 내가 항상 선수를 친다. 아이 캔 낫 스피크 잉글리시 베리 웰. 스피크 슬로울리 프리즈. 이 구절은 베리 플루언틀리하고 패스트하게 발음한다. 오브 코얼스. 노 프라블럼. 콜센터 직원은 히스패닉(으로 추측 혹은 상상되는) 억양의 영어로 천천히 대화를 이끌었다.  


한국도 마찬가지지만 미국도 보험 가입은 복잡한 일이다. 어 퓨 미니츠는 개코나. 직업이 뭐냐. 소득은 얼마냐. 애는 몇 살이냐. 개나 고양이는 있냐. 주택은 자가냐 렌트냐. 별걸 다 물어본다. 30분이 훌쩍 넘어갔다. 핸드폰을 살짝 보니 배터리가 7%. 웨잇 어 미닛. 아임 쏘리. 마이 폰 배터리 이즈 아웃. 유 노? 아웃? 캔 아이... 레이터? 개떡 같이 말해도 찰떡 같이 알아먹는다. 하지만. 잇 윌 비 던 인 어 퓨 미니츠. 또 어퓨미니츠다. 5%. 3%. 임파서블. 안 되겠다. 아임 쏘리. 아윌 콜 유 어겐. 전화를 끊었지만 3%의 배터리는 곧바로 허망하게 사라졌다. 아뿔싸. 마이 핸드폰 이즈 데드.


그런데! 여기가 어딘가.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깊은 산속. 왕복 2차선 도로. 저 멀리 사슴인지 노루인지 풀을 뜯어먹고 있다. 깨달았다. 나는 지금까지 구글 내비의 노예였다. 렌터카에는 내비가 없었다.

도로 주변이 다 이렇다. 사유지에 들어서는 순간 총을 맞을 수도 있다는 매우 개연성 있는 걱정이 들었다.

어느 방향인지도 모르겠다. 두세 번 다녔던 길이지만 전혀 기억이 나지 않았다. 인가도 드물었고 편의점 같은 건 본 적도 없다. 아내의 전화번호도 모른다. 딸내미 학교까지는 어림잡아 20분. 아마 15킬로 정도. 찾아갈 엄두도 나지 않았다.


그래도 여기서 죽을 수는 없는 일이다. 무작정 출발했다. 가다 보면 어딘가 가게나 주유소 같은 게 나오겠지. 그럼 거기서 충전을 하면 된다. 하지만 가도 가도 끝이 없는 숲길.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다. 5분. 10분. 15분. 갈래길마다 표지판이 붙어있다. 제퍼슨 로드. 엘름 로드. 웰링턴 로드. 앨버트 로드. 도대체 너희들은 누구냐. 두려움이 엄습해 온다. 낯선 곳에 도착했는데 주민들이 모두 다 죽은 사람들이었던 미국 드라마 '환상특급'이 생각났다. 딸내미는 곧 학교에서 나와서 나를 찾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없을 것이다. 나는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 걸까.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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