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기해야 하는 것은 과감하게 포기하기
가끔 느낀다. 내가 아무 일이 없더라도 종종 힘든 이유는 욕심이 많아서이다. 어떤 욕심이 많아서 날 이렇게 힘들게 하는가를 생각해 보니 나는 두 마리, 아니 세 마리 토끼를 잡고 싶어 하는 욕심이 많은 사람이었다. 그렇다. 나는 내 인생의 중요한 결정을 할 때 한쪽을 과감하게 포기하지 못하고, 우선순위를 정한 뒤 순서에 맞게 원하는 것을 다 쟁취하고 싶어 하는 사람이다. 그래서 늘 마음속에서 끓는다. 모든 것을 다 해내고 싶어 하는 이상과, 시간과 체력의 부족인 이 물리적인 현실 사이에서의 내적 갈등이 항상 존재한다.
나는 어렸을 적부터 아이를 둘 이상 낳고 싶었다. 다산이 꿈이었다. '사운드 오브 뮤직' 뮤지컬을 나의 인생에서 본 모든 극 중에서 좋아하는데, 나의 다산의 꿈은 거기서부터 시작되었는지도 모르겠다. 예전에는 다섯까지도 낳고 싶었지만, 아이 둘을 양육하며 깨달은 것은, 현실과 타협이 필요하며, 나로서는 지금에 만족하거나 아니면 많아도 셋이 맥시멈이라는 것이다.
여기서 나는, 아이 셋 맘으로 전업주부로 살고 싶은가? 아니다. 나는 일이 하고 싶다. 내 일을 찾아 언제든지 사회로 다시 나가고 싶다. 4년 전, 첫째를 낳고 그 내적갈등이 최고조였던 시절, 19개월을 어린이집에 보내며 전업주부로 산지 7년 만에 다시 직장에 나간 적이 있었다. 결혼 전 퇴사 후 7년 만에 나간 직장은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20대 중반의 싱글로 한국에서 직장생활을 하는 것과 미국에서 30대 초반의 워킹맘의 직장생활은 180도 달랐다. 내 자세도 달랐고, 사회에서 날 바라보는 시선도 달랐다. 싱글 때는 회사에 불만이 너무나 많았는데, 집에서 밥, 빨래, 설거지, 청소, 육아만 하다가 7년 만에 사회에 나갔을 땐 회사에게 너무나 많은 것을 감사하고 있었다. 나에게 이 미국이라는 땅에서 다시 일을 할 수 있는 기회를 준 것에 감사, 나에게 나만의 자리와 책상 하나일 뿐일지라도 나만의 공감이 있는 것에 감사, 내가 듣고 싶은 노래를 실컷 들으며 커피 한잔을 들고 출근하는 출근길에 감사, 그리고 내가 내 이름으로 내는 세금과 각종 비용들을 지불할 수 있는 경제력에 감사. 워킹맘은 딱 1년 했는데 그 1년은 나에게 엄청난 꿀이자 스승이었다.
물론 힘든 부분도 너무 많았다. 유난히 엄마와의 애착관계가 끈끈했던 우리 첫째는 처음 일을 시작한 뒤 7개월 동안 매일 아침 엄마와 헤어지는 순간에 오열했다. 나는 아이를 어린이집에 냉정하게 내려놓고 뒤돌아서서 혼자 눈물을 닦으며 출근을 해야만 했다. 그 나이 때의 아이는 면역력 형성이 덜 된 시기였기 때문에 매달 1주일씩 아팠고, 나의 몇 안 되는 휴가는 매달 한 번씩 아이를 돌보기 위해 써야 했고, 당연히 남편과 시댁의 도움으로 그 시간들을 버텨낼 수 있었다. 매일 같이 주변 모든 사람들에게 죄송합니다 혹은 감사합니다 라는 말들을 입에 달고 살았던 것 같다.
나는 정확하게 1년 뒤, 팬데믹으로 인해 미국의 어린이집들이 락다운이 되면서 그렇게 힘들게 결정해서 큰 마음먹고 다녔던 꿀같았던 직장생활을 종료하게 되었다. 그때는 직장과 아이 사이에서 선택을 해야 했는데, 나는 아이를 선택했다. 어렵게 나갔던 내 인생 두 번째 직장을 다시 그만두게 되면서 뼈저린 가슴앓이를 했다. 그때의 가슴앓이는 흡사 사랑하는 사람과 이별하는 듯한 아픔이었다. 그 직장에 대한 미련보다는 내 용기와 내 도전을 다시 내려놓는 것에 대한 안타까움이 상상 이상으로 컸다. 다시 일을 하기 위해 너무나 큰 용기를 내고 재취업에 성공하고 그 어린아이를 품에서 떼어냈는데, 하필 그 순간 전 세계가 팬데믹이라니. 자유의 국가 미국이라는 나라가 전국 락다운이라니. 그 당시를 생각하면 아직도 어처구니가 없다.
그때 첫째 나이 두 돌 반, 첫째를 돌보기로 마음먹고 직장을 그만두게 되면서 평소 숙제처럼 가지고 있던 둘째 계획을 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 뒤로 3년이 지난 지금까지 두 번째의 임신과 출산, 그리고 산후조리와 둘째를 19개월까지 키우면서 계속해서 전업주부의 길을 다시 걸어왔다. 팬데믹이 오지 않았다면 둘째가 그때 생겼을까. 그 건 아직도 잘 모르겠다. 당시엔 참 힘들었고 후회도 있었던 순간이었지만, 지나고 보니 둘째가 나에게 생긴 것은 첫째 못지않는 축복이었다. 팬데믹이 왔기 때문에 나는 둘째를 가지는 숙제를 제 때 할 수 있었다. 내 인생에서 그 순간 전업주부를 선택함으로 인해 결코 나의 것을 포기하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결혼 생활 10년 중 1년의 워킹맘 경험은 내게 너무나 큰 레슨을 주었다. 모든 것에는 기회비용이 따르는데, 경영학과를 졸업한 내가 기회비용의 뜻을 몰랐을 리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지나고 보니 나는 워킹맘을 경험하기 전까지는 인생에 있어서 진짜 기회비용이 무엇인지 잘 몰랐던 것 같다. 뒤를 돌아보니, 나는 두 마리 토끼든 세 마리 토끼든 내가 하기 나름이고 모두 잡을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워킹맘을 하면서, 나는 어떤 선택이든 가족 구성원 누군가의 희생이 따른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내가 일을 나가게 되면 남편과 아이의 희생이 필요하고, 내가 전업주부의 길을 선택하면 남편과 아이들은 자유로워지지만, 내 커리어를 희생해야 한다. 어떤 엄마들은 본인의 커리어를 유지하기 위해 친정부모님이 손주 육아를 전적으로 24시간 대기하며 지원해 주는 것을 봤는데, 그 경우엔 친정 부모님의 엄청난 희생이 따른다. 타지생활을 함으로 인해 지구 반대편에 있는 친정 부모님을 둔 나에겐 그것 또한 해당사항이 되지 않기에 나는 다시 직장을 구해 나가는 것에 대한 생각이 점점 사라지고 있는 중이다.
현재 아들 둘 엄마로 살아가면서 셋째를 낳을지 말지를 매일같이 고민하고 있다. 아들 둘로도 너무 감사하지만 주변 지인들의 딸들을 볼 때마다 내 마음에서 딸을 가지고 싶다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다. 이것만 봐도 내가 얼마나 욕심이 많은 사람인지 알 수 있다. 요즘 세상에 애 둘을 낳은 것도 많이 낳은 건데. 아들이 둘에 만족이 안되어 딸을 꼭 가지고 싶다니. 보장도 안되는데 내려놓지를 못하는 것을 보면 나 자신이 답답하다. 이제 조금 살만한데 그냥 내 일을 찾아가도 충분히 괜찮은 것 같은데. 나는 지금 시점에서 둘째를 어린이집에 보내고 다시 한번 내 커리어를 찾아가야 할 것인가, 아니면 그 또한 3년 뒤로 보류하고 지금밖에 할 수 없는 나의 마지막 임신과 출산에 도전해야 하는 것일까에 대해 매일 같이 생각이 바뀌고 있다. 이 문제는 올해 안에 결정하려고 한다. 내 커리어는 3년 뒤로 미루고 올 하반기에 마지막으로 임신을 계획할 것인지, 아니면 과감히 포기하고 내 커리어를 찾아갈 것인지.
내가 그리는 이상적인 삶은 아이 셋을 키우는 워킹맘이다. 실제로 내 주변에 너무나 멋진 아이 셋의 워킹맘이 있다. (그분은 친정어머님이 전적으로 서포트를 해주긴 한다.) 그 이상을 해내기 위해 나는 나의 욕구들의 우선순위를 정하고 순서에 맞게 갈 것인가, 아니면 하나를 위해 과감히 포기할 것인가, 그것이 문제로다. 당연히 이대로도 너무나 감사하고 만족하며 살아갈 자신이 있다. 그러나 나에게 남은 30대 후반을 어떻게 보내느냐에 따라 나의 삶이 크게 달라질 것을 알기에. 나는 아직 그 기로에 서서 어떤 길을 갈 것인가를 정하고 있다. 남들이 들으면 아들 둘을 키우면서도 아직도 고생을 덜 했다 말하겠지만. 그렇게나 일을 다시 하고 싶으면서도 아이를 하나 더 가지고 싶다는 생각이 내 안에서 꿈틀거리는데 별 수 있는가. 기회비용을 잘 따져보자. 포기해야 할 것은 과감히 포기하고, 선택할 때는 뒤도 돌아보지 말자.
나는 아이들에게 선택과 포기를 동시에 아주 잘 알려주고 싶다. 우리는 어렸을 적부터 선택하는 것에 더 많은 집중을 두고 결정을 내리는 것이 습관이 되어 있다. 그래서 우리는 포기하는 방법을 제대로 배워본 적이 없다. 무언가를 선택할 때 포기해야 하는 것과의 기회비용을 따지는 것이 자동으로 계산이 되지 않는다. 선택하는 순간이 오면 항상 힘들고, 또 지나고 나면 후회하는 것들이 생긴다. 우리의 아이들은 선택과 포기하는 것을 함께 잘 배워나갔으면 좋겠다. 어떤 선택을 해야만 할 때 마음으로만 하는 것이 아니라 포기하는 것과 비교, 대조하여 가장 현명한 선택을 할 수 있도록. 선택의 기로에서 늘 최선을 다하되 반드시 기회비용을 잘 따져보고 자신에게 가장 맞는 선택을 잘해나갈 수 있도록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