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뚝이 노교수 이야기
(上편에서 이어짐)
그런데 그로부터 약 1년9개월 뒤, 대법원이 파기환송 판결을 했다. 이렇게 1∙2심 판결의 결론이 대법원에서 뒤집히는 빈도는 대충 가뭄에 콩나는 것과 비슷한 수준인데, 이 사건에서는 그렇게 되었다.
대법원은 먼저 “교원에게는 일반 직업인보다 더 높은 도덕성이 요구되고 교원의 품위손상행위는 본인은 물론 교원사회 전체에 대한 국민의 신뢰를 실추시킬 우려가 있으므로 사립학교법은 사립학교 교원에 대하여도 직무와 관련된 부분은 물론 사적인 부분에서도 품위를 유지할 의무를 규정하고 있는데, 여기서 품위라 함은 국민에 대한 교육자로서의 직책을 맡아 수행해 나가기에 손색이 없는 인품을 말하고 어떤 행위가 품위손상행위에 해당하는가는 구체적 상황에 따라 건전한 사회통념에 의하여 판단하여야 할 것”이라고 길게 썰을 풀었다.
따라서 ▲부총장에게 욕설을 하고 ▲박 이사장에게 문제의 우편물을 보낸 행위는 “원고의 주장이 정당하다 하더라도 OO대학교수로서의 항의행동으로서는 도를 지나친 것이고 그 때문에 사립학교 교원으로서의 체면과 위신이 손상되었다고 하지 않을 수 없는바” 징계사유에 해당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 명예교수와의 대화('박 총장을 죽여야 한다' 등)는 교수들 간의 개인적인 방담일 뿐 교원으로서의 품위손상행위가 아니라고 하였다. “박두리를 죽여야 한다”는 발언은 비록 그 표현이 거칠고 저속하다 하더라도 실제 의미는 (진짜 죽인다는 뜻이 아니라) 학교에 대한 영향력을 완전히 없애야 한다는 것이고, 그렇게 말했다 하여 대외적으로 학교 또는 교원의 명예가 실추된다고는 보기 어려운 점을 대법원은 참작하였다.
결국 3개 행위 중 2개는 품위유지의무 위반으로 징계해야 한다는 것 아닌가? 그렇기는 하다. 다만 대법원은 이 2개 징계사유만으로 ‘해임’에 처하는 것은 과도하다고 판단했다. 징계재량권 일탈∙남용에 관한 대법원 판결의 장황한 설명은 여기서는 생략한다[주1]. 거두절미하고 요약하면, “기록에 나타난 모든 정황”을 고려할 때 교원의 신분을 배제하고 OO대학으로부터 추방하여 연구자, 교육자로서의 지위를 박탈하는 징계처분인 ‘해임’을 선택하는 것은 재량권의 범위를 일탈하였거나 남용한 것이라고 하였다. 물론, 김 교수가 교원으로서 약 23년 동안 성실히 근무해 오면서 행정고시 시험위원을 지낼만큼 학문적 성과를 인정받은 것 또한 정상참작 사유로 고려되었다.
학교 측은 파기환송심에서 결론을 뒤집어보려 노력한 모앙이었으나 김 교수가 승소했고, 학교가 상고하여 또 대법원으로 갔으나 역시 김 교수가 승소하여 징계 취소 판결이 확정되었다.
김 교수가 파면된 때로부터 약 3년 8개월만이었다.
김 교수는 학교로 돌아갔을까? ‘김 교수와는 더 이상 동료교수로 일할 수 없다’고 거듭 진정서를 써내며 그를 쫓아내려 애썼던 행정학과 교수들 틈으로? 여전히 박 이사장이 학교의 실질적 주인인 양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그 학교로?
네이버 검색으로 확인한 뒷이야기는 이렇다.
- 김 교수는 학교로 돌아갔지만 이듬해인 2002년 다른 사유로 다시 파면되었고, 그는 교원소청심사를 청구하여 파면 취소 결정을 받았다.
- 김 교수가 다시 학교로 돌아가자 학교는 이듬해인 2003년 그의 재임용을 거부했고, 그는 재임용 탈락처분 취소를 구하는 소송을 하여 승소했다. 재판부는 판결문에서 “세 차례에 걸친 파면과 그 취소 절차의 반복으로 원고가 실제로 대학에 근무한 기간은 1992년 9월 이후 5년 8개월 정도에 불과하다”며 재임용 심사에서 다른 교수와 동일한 기준을 적용하는 것은 부당하다고 지적했다. 한 언론사는 그를 “오뚝이 노교수”로 표현하며 그의 승소 소식을 전했다.
- 박 이사장은 1999년 교비 유용 혐의로 벌금형을 받고도 이사장직을 유지하다가, 이후 또다시 교비 유용 사실이 확인되어 2004년 이사장직을 잃었다. 놀랍게도 그는 2013년 다시 이사장으로 복귀했으니, 세상 일은 정말 알 수가 없다.
김 교수가 박 이사장과 처음부터 악연이었던 것은 아니다. 김 교수는 1970년 박두리 총장(그는 30여년 전부터 총장이었던 것이다)에 의하여 규리대 사무직 주사로 임용되어 총장 비서로 근무를 시작했고, 이후 박 총장의 배려에 힘입어 이 대학 교원으로 순조로이 근무해왔다. 만약 영화나 드라마였다면, 청년 김누리와 젊은 총장 박두리의 우호적인 첫 대면을 아련한 톤의 에필로그 영상으로 말미에 넣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런 사적인 인연을 뒤로 하고, 어느 시점엔가 김 교수는 박 총장이 학교 망치는 꼴을 더 이상 두고볼 수 없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20여년이 흐르는 동안 김 교수도 학내외에서 상당한 입지를 갖게 된 터였다.
그는 나름의 사명감을 갖고 최선을 다해 투쟁하였는데, 그 과정에서 교원으로서의 품위를 약간 손상했던 걸로 보인다. 물론 최종적으로 징계취소 판결을 받기는 하였지만, 품위유지에 실패한 그 몇몇 순간들이 상대방에게 빌미를 주면서 그는 많은 것을 잃었다.
하아…세상살이가 이렇게 어렵다. 비단 대학교수만이 아니라 공무원, 변호사, 심지어 사기업 임직원들도 법령이나 내규에 따라 '품위를 유지할' 의무를 부여받은 경우가 많고, 이를 위반하면 몸담은 조직에서 징계받기 십상이다. 내가 옳고 상대가 그른 때에도(적어도 내가 보기에 그렇다고 생각될 때에도), 숨을 고르고 품위를 잃지 않도록 노력해야 하는 것이다. 말이 쉽지 실제로는 쉽지 않을 것이다.
끝.
[주1] "교원인 피징계자에게 사립학교법상의 징계사유가 있어 징계처분을 하는 경우 어떠한 처분을 할 것인가는 징계권자의 재량에 맡겨진 것이고, 다만 징계권자가 재량권의 행사로서 한 징계처분이 사회통념상 현저하게 타당성을 잃어 징계권자에게 맡겨진 재량권을 남용한 것이라고 인정되는 경우에 한하여 그 처분을 위법하다고 할 수 있고, 교원에 대한 징계처분이 사회통념상 현저하게 타당성을 잃었다고 하려면 구체적인 사례에 따라 징계의 원인이 된 비위사실의 내용과 성질, 징계에 의하여 달성하려고 하는 목적, 징계 양정의 기준 등 여러 요소를 종합하여 판단할 때에 그 징계 내용이 객관적으로 명백히 부당하다고 인정할 수 있는 경우라야 하고, 징계권의 행사가 임용권자의 재량에 맡겨진 것이라고 하여도 공익적 목적을 위하여 징계권을 행사하여야 할 공익의 원칙에 반하거나 일반적으로 징계사유로 삼은 비행의 정도에 비하여 균형을 잃은 과중한 징계처분을 선택함으로써 비례의 원칙에 위반하거나 또는 합리적인 사유 없이 같은 정도의 비행에 대하여 일반적으로 적용하여 온 기준과 어긋나게 공평을 잃은 징계처분을 선택함으로써 평등의 원칙에 위반한 경우에 이러한 징계처분은 재량권의 한계를 벗어난 처분으로서 위법하다 할 것인바..." (대법원 2000. 6. 9. 선고 98두16613 판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