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에피 Jun 10. 2024

연인이라는 증거

#5

연인 간의 사랑은 꼭 육체적인 진도에 따라 깊어지는 것은 아니지만 그 상관관계가 아주 없다고 하지 않겠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사랑이 무르익으면 꼭 이어지는 단계가 있는데, 말하지 않아도 누구나 알겠지만. 


어릴 적에는 그저 짧은 쾌락을 위한 연인의 놀이였다면, 결혼과 이혼이라는 인생의 큰 굴곡을 경험하고 중년이 된 지금은 소위 속궁합이라고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기 때문에 걱정 아닌 걱정도 된 것이 사실이었다.


실제로 나는 동양에서 말하는 음양의 논리를 어느 정도 믿고 따르는 편이었는데, 도교에서 논하는 방중술 같은 음양의 도에 따라 남녀가 더 건강해지고 무병장수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래서 그녀가 나에게 잘 맞는 퍼즐의 파편 같은 여자이길 바랬다. 


우리는 어느 정도 심정적 합의가 되었고 시간이 문제였다. 내 마음은 조급했지만 겉으로 드러내지 않았다.


어느날, 의도치 않게 언제쯤 그런 시간이 올지에 대한 얘기를 하게되었다. 


"우리는 각자 이혼까지 한 마당에 뭐... 시간이 지나면 알아서 되겠지."

오래 기다리게 하지 않기를.


"지금은 딱히 그 생각이 나지 않더라고. 이미 오래돼서 성욕이 사라졌나."

거짓말이다. 아침마다 성욕이란 이름의 에너지가 넘쳐 흘렸고, 밤마다 허벅지를 꼬집으며 잠이 들었다.


혹여나 몸이나 탐내는 그저그런 남자로 생각할까싶어 관련 언행을 자제하고 또 자제했다. 

그래 장기전이야. 하루 이틀 만나고 헤어질게 아니자나. 그리고 여자의 몸은 시기가 있으니까.


불순한 의도를 어느 정도 갖고 있는 데이트는 활력을 주었다. 기대와 긴장, 그리고 실망까지.

 

주도권을 가진 그녀는 담담했다. 오히려 그녀는 무성욕을 자처하며 크게 신경 쓰지 않았는데, 그 모습이 오히려 나를 조급하게 만들었다. 게다가 술을 먹지 않는 나는 야릇한 분위기를 만들려면 장거리 여행이라도 계획해야 하는지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했다.


그러던 어느 날 데이트를 하다가 내가 사는 집에 예정 없이 방문하게 되었다. 평상시 집안 청소는 깔끔하게 하는 터라 당황하진 않았지만 홀아비 냄새라도 날까 걱정하며 집으로 안내했다.


집에 도착한 그녀는 이리저리 둘러보다 말했다.


"우와. 남자 집이 왜 이렇게 깔끔해?"

"아. 치우기 싫어서 어지럽히지 않는 성격이라 그런가 봐."


속으로 뿌듯함을 느꼈지만 대수롭지 않다는 듯 대답했다. 사실 가끔 주말에 오시는 어머니 역할이 컸지만 말이야.


네스프레소 커피머신에서 캡슐 커피를 한잔 뽑아 그녀에게 주었다. 그리고 잠시 쉬라고 한 뒤 샤워를 하고 나왔다. 혼자 편한 옷으로 갈아입으니 조금 미안했다.


"옷 불편하지? 편한 옷을 줄까?"


그녀가 대답하기 전에 어울릴만한 옷을 골라 그녀 앞에 놓았다. 그녀는 잠시 생각하는 듯하더니 이내 말했다.


"오빠. 나도 좀 씻고 입을게."


어... 어라

예상치 못한 전개가.


순간 가슴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내 모든 신경이 지금이 그 때라고 말하고 있었다.


두근두근.


속으로 온갖 상상을 했지만 태연한 척 말했다.


"응. 씻고 갈아입어."


그녀는 갈아입을 옷을 들고 욕실로 들어갔다. 문 뒤로 그녀의 모습이 사라지자마자 나는 헐레벌덕 침실로 달려가 상태를 체크했다.


'남는 베개가 어디 있더라. 혹시 냄새나진 않겠지. 휴.. 휴지가 근처에...'


모든 준비물이 만족스럽지 않지만 나쁘지도 않았다. 잠시 침대에 누워 핸드폰을 보며 그녀를 기다렸다. 물론 눈과 생각은 각자 다른 세상에 머물렀지만.


잠시 후, 거실 너머로 딸깍거리며 욕실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다. 혹시 민망할까 싶어 거실로 나가지 않고 침실에서 그녀가 옷을 입고 신호 주기를 기다렸다. 그런데 갑자기 그녀의 다급한 발소리가 났다.


타다닥. 타다닥. 타타타타타닥.


그녀는 거의 날아오다시피 침실 침대로 달려와 이불속으로 들어왔다. 거대한 밤벌레가 날아오는 착각이 들었다.


'서... 설... 설마....'


심장은 이미 통제를 벗어난 지 오래. 간신히 가슴을 부여잡고 누운 상태로 등을 돌려 그녀 있는 쪽을 바라봤다. 머리만 나와있는 모습이지만 언뜻 보이는 하얀 어깨가 그 안을 짐작케 했다.


'헉! 감사합니다! 예수님! 부처님! 하나님!'


그렇게 우리는 진.짜. 연인이 되었다.


작가의 이전글 정상인 남자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