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킹스 오브 컨버니언스(Kings Of Convenience)’란 듀오가 있다. 노르웨이 청년들인데 편안하고 소박한 포크(Folk) 음악을 한다. 그 언젠가 들으며 “이 시대의 ‘사이먼&가펑클(Simon & Garfunkel)’이구나, 대충 들어도 충분히 좋구나.” 란 생각을 했다. 같은 포크지만 그들의 음악은 밥 딜런(Bob Dylan)이나 우디 거스리(Woody Guthrie), 피터 폴 앤 메리(Peter, Paul and Mary)의 그것과 다르다. 포크의 포용범위가 넓어 그렇고 큰 만큼 원소 각각의 특성이 달라 그렇다. 딜런은 그 어지간히 못난 노래솜씨로 그 어지간히 깊은 사정을 긁어낸다. 거스리는 마치 판례나 교보재처럼 “이것이 포크의 원형이며 이것이 포크가 원래 해야 하는 역할입니다.”라 말한다. 피터 폴 앤 메리는 누구나(심지어 경험한 적 없는 사람도) 추억하는 그 목가적 풍경 속으로 초대한다. 그들 서로가 다른 것처럼 킹스 오브 컨비니언스나 사이먼&가펑클 역시 그들과 다르다. 가볍고 편안하다. 마치 봄가을용 구스 차렵이불처럼 가볍고 폭신하다. 또 생각했다. 이들 음악에서 느껴지는 편안함의 정체는 무엇인가?
곧 그 모든 게 고도의 기획을 따른다는 추론에 도달했다. 그들의 앨범을 듣고 있으면 필요할 때 멜로디가 나오고 필요할 때 리듬이 나오며 필요할 때 악기가 나온다. 필요 없는데 관성적으로 나오는 게 없다. 딱 필요한 요소들만 있고 그것들은 충실히 기능한다. 무엇을 말할 것인지 고민하는데 그치지 않고 그 어투까지 고민한 게 느껴진다. 여기선 적당히 풀고, 여기선 좀 더 풀고, 여기선 아예 지워버리고. 깔끔하게 정돈된 풍경 같은 소리를 들으며 사람들은 편안함을 느낀다. 쨍하지 않은 햇살, 매섭지 않은 바람, 완만한 언덕과 잘 다듬은 풀밭. 윈도우XP 기본바탕화면 같은 풍경 싫어할 사람이 몇이나 있겠는가? 그래서 윈도우XP 기본바탕화면이 그렇지 않겠는가? 그 위에 엑셀 창도 올리고 워드 창도 올리고 인터넷 창도 올리라고 만든 그 바탕화면 사진 말이다.
사이먼&가펑클은 (내가 알기론) 고작 여섯 장의 스튜디오 앨범을 냈건만 그 명성을 얻었고, 킹스 오브 컨비니언스는 20년 넘게 활동하며 낸 앨범이 고작 다섯 개다(역시 내가 알기론). 두 듀오(2x2) 모두 과작했고 그 이유는 역시 최선을 찾기 위한 과정이 길었기 때문이리라. 물론 너나 나처럼 게을러 과작을 하는 사람이 있긴 하다만, 내가 아는 세계적 명성을 얻은 과작자들 중 우리 같은 경우는 없다. 두 듀오 역시 마찬가지다. 과작한 그들의 디스코그라피는 과작하는 수밖에 없었을 만큼 신중하고 꼼꼼하게 만든 앨범들로 채워져 있다. 내가 그 둘이 비슷하다 느낀 이유, 그들의 음악이 편했던 이유 역시 그것 때문이리라.
데스먼드와 홀이 과작한 것은 아니다. 잘 하는 사람들인 만큼 제법 많은 앨범과 대단히 많은 연주를 남겼다. 데스먼드는 주로 데이브 브루벡(Dave Brubeck)과 함께 하며 제법 많은 결과물을 냈고, 홀은 나름 한 시절을 풍미하며 온갖 레이블 온갖 연주자와 함께 결과물을 만들었다. 다만 각자의 이름을 먼저 건 앨범을 내는 일에는 박했다. 내가 데스먼드를 좋아하는 그 많은 이유들 중에는 앨범이 몇 없어 쉽게 모을 수있다는 점도 있는데, 1950년대부터 70년대까지 30년 가까이 활동했음에도 불구하고 본인 이름 걸고 낸 앨범은 열다섯 장이 안 된다. 홀은 50년 넘게 활동하며 제법 많은 본인 앨범을 냈지만 활동기간을 생각하면, 그리고 그 무렵 재즈 연주자들의 방식을 생각하면(이틀 녹음해서 앨범 네 개 낸 마일스 데이비스!) 그 수는 놀라울 정도로 적다.
그 몇 없는 앨범들은 다들 듣기 참 편하다. 서로 다른 악기 다루는 두 연주자가 서로 다른 시절에 낸 앨범들인 만큼 전혀 다른 음악들이 들어 있건만 신기하게도 다들 참 쉽게 들어온다. 귀 기울여 들으면 훌륭한데 대충 설거지하며 들어도 좋다. 악기 특성이라 보긴 어려운 게 아트 페퍼(Art Pepper)의 알토나 웨스 몽고메리(Wes Montgomery)의 기타처럼 같은 악기로 선명하고 활기차게 연주하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에 그렇다. 그렇다고 연주자 특성이라 보기도 어려운 게 데스먼드와 홀이 세션으로 참여한 앨범들 중 속도감 있고 화려한 연주를 한 앨범도 있기 때문이다. 할 줄 아는데 안 한 것이다. 본인 이름 건 앨범이라면 스스로의 연주실력이 얼마나 뛰어난지 자랑하고 싶었을 법도 하건만 말이다.
결국 ‘편한 포크의 논리’를 여기에도 적용한다. 둘은 각자 이름 건 앨범들을 심사숙고하며 만들었다(먹고 살 돈은 세션으로 벌고). 심사는 할 말을 정하는데 그치지 않았고 숙고는 듣는 사람 생각까지 이어졌다. 질과 빈도를 병행할 수는 없는 법. 품질을 끌어올리다보니 자주 앨범을 내진 못했다. 결국과작했고 결국 앨범마다 출중하며 결국 듣기 편하다.
과작한 사람들이건만 음악에 다가서는 관점이 비슷해서 그랬는지 그냥 잘 맞아서 그랬는지 둘이 만난 지점이 몇 있다. 그 모든 앨범에서 둘은 아름다운 합주를 펼친다. 각 앨범의 주제를 충실히 따르는 동시에 군더더기가 없어 듣고 있으면 편안한 연주들을 들을 수 있다. 이 앨범도 그렇다. 그 무렵 유행한 보사노바를 쫓으며 둘은 단정하고 편안한 연주를 펼친다. 홀의 정확하고 풍성한 기타 리듬 위로 데스먼드의 비단결 같이 섬세하고 부드러운 알토 멜로디가 날린다(실크 스카프가 몇 장 있는데 느낌이 대충 비슷하다). 보사노바건만 이토록 정교하다니 놀랍고, 모던 재즈건만 이토록 곱다니 고맙다.
어느 목공방의 가구를 살피며 감탄한 적이 있다. 얼핏 봤을 때 모양은 이케아에서 파는 것과 비슷했거늘 살펴보니 이케아 두 트럭 줘도 못 바꿀 물건이었다. 못 하나 안 보이는 장은 니스도 칠하지 않았건만 쓰다듬을 때 거슬리는 결 조금이 없었고 모든 각은 둥글게 다듬어져 있었다. 물건의 수준을 보니 만든 사람의 수준과 노력도 자연히 그려졌다. 자랑은 수줍어하지만 실력은 빼어난 사람이 최선을 다해 만들었구나. 이 앨범도 그렇다. 잘 하는 사람 둘이 심사숙고하며 만들었다. 모는 커녕 티 하나 없이 매끈하다. 내가 느끼는 편안함은 그 단단한 토대 위에 있다.
엘피 이야기
둘 다 화려한 인기를 누린 사람들은 아니다. 최소한 쳇 베이커(Chet Baker), 존 콜트레인(John Coltrane), 빌 에반스(Bill Evans)처럼 재즈 별 관심 없는 사람도 이름 한번은 들어봤을 사람들은 아니다. 데스먼드도 그렇고 홀도 그렇고 재즈 좋아해야 들어봤을 이름이다. 그 중 홀은 콘시에르토(Concierto) 같은 앨범도 있고 그나마 사정이 좀 나은 편이지만 데스먼드는 정말 놀라울 정도로 인기가 없다.
인기가 있든 없든 내게 중요한 가치는 아니지만 인기가 없는 바람에 생긴 아쉬움은 있으니 리이슈가 잘 안 나온다는 점. 좋은 앨범을 듣다보면 잘 뽑은 리마스터링 리이슈가 나오는 것을 기대하게 되는데 데스먼드는 그런 게 없다. 그의 이름을 건 앨범 대다수는 일반판 몇 나오고 끝났다. 이 앨범도 마찬가지. 1980년대 초에 나온 일반판을 마지막으로 리이슈가 끝났고 그 중 특기할만한 에디션은 없다. 결국 선택지 중에선 퍼스트가 제일이다. 1965년 미국에서 나온 것을 사면 되는데 퍼스트부터 모노와 스테레오로 나눠져 나왔으니 취향에 맞게 선택하면 된다. 나는 스테레오가 좋았다. 스테이지가 넓어 그 공간감을 즐길 수 있다.
다행인 게 둘 있으니 일단 RCA빅터(RCA Victor) ‘다이나그루브(Dynagroove)’ 시절 재즈 녹음들의 음질이다. 이 무렵 RCA빅터 음반들의 음질 평균은 컨템포러리(Contemporary)나 퍼시픽(Pacific Records), 버브(Verve) 같은 곳들보다 한 끕 높다. 정규 분포를 벗어나는 음질의 앨범이 종종 튀어나오는 그 레이블들과는 달리 RCA빅터 앨범들 음질은 균일하게 좋다. 각 앨범과 곡이 좋은지 나쁜지와는 별개로 음질은 레이블과 시리즈 믿고 갈만 하며 이 앨범 역시 그렇다. 녹음과 마스터링과 프레싱 모두 잘 되었다.
그리고 싸다. 다이나그루브 재즈 앨범 치고 비싼 거 몇 없고 이 앨범 역시 저렴하다. 2023년 기준 상태 좋은 퍼스트도 5~6만 원 정도면 구할 수 있으니 쉬이 시도할 수 있다.
같이 들어볼만한 앨범들
폴 데스먼드의 1970년작 ‘험한 세상 다리가 되어(Bridge Over Troubled Water)’: 놀라웁게도 사이먼&가펑클 곡들만 리메이크한 앨범이다. 원곡과는 다른 맛인데 원곡 만큼 편한 변안곡들을 들을 수 있다.
폴 데스먼드 쿼텟과 돈 엘리엇(Don Elliott)이 함께 한 1956년작 이름 없는 판타지(Fantasy) 3-235 앨범: 그의 초기작이거늘 연주 스타일은 후기작들과 별 다름이 없다. 커리어가 긴 연주자들 중 대다수가 진화하거나 타협하며 스타일을 바꾼 것에 반해 그는 한결 같았다. 자신이 있었던 건지 이거면 탈은 안 나겠다 싶었던 건지는 모르겠다.
폴 데스먼드의 1969년작 ‘프롬 더 핫 애프터눈(From The Hot Afternoon)’과 ‘썸머타임(Summertime)’: CTI(CTI Records) 레이블 초기의 수작. 잘 하는데 자기주장은 약한 데스먼드를 크리드 테일러(Creed Taylor, CTI의 설립자이자 프로듀서)가 얼마나 탐냈을지 눈에 선하다. 다른 CTI 3000번대 앨범들과 마찬가지로 레이블의 캐릭터를 만든 앨범이며 크리드 테일러의 디렉션과 에스테틱이 선명하다. 그 틀 안에서의 데스먼드는 역할을 충실히 수행한다.
폴 데스먼드와 모던 재즈 쿼텟(The Modern Jazz Quartet)이 함께 한 1981년작 ‘The Only Recorded Performance Of Paul Desmond With The Modern Jazz Quartet’: 1971년 녹음인데 1981년에야 음반으로 나왔다. 원래 인기가 없었던 데스먼드와 이 무렵 인기가 시들했던 모던재즈쿼텟이 함께 한 녹음인지라 음반화 할 것인지에 대한 고민을 10년이나 한 게 아닌가 싶다. 아무튼 이름 그대로 둘이 함께 한 유일의 앨범이다. 아싸 데스먼드와 인싸 모던재즈쿼텟이 만난 각별한 지점이기도 하고, 데스먼드와 밀트 잭슨(Milt Jackson)이 맞붙는 희소한 지점이기도 하다. 치고 나가는 데스먼드의 연주라니, 이 얼마나 진귀한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