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생채
추운 건 너무 싫지만서도, 겨울을 미워할 수 없는 건 고구마, 귤, 사과, 굴, 그리고 무 때문이다. 그중에서도 무는 요리하는 주부인 나에게 중요한 비밀병기다. 된장찌개를 끓여도 겨울 무를 넣으면 다른 조미료로는 낼 수 없는 깊은 단맛과 시원한 맛이 나고, 조림을 해 놓아도 양념을 빨아먹은 탱탱한 무의 식감에 무 자체의 풍미까지 더해진다.
요즘따라 “요리하는 손맛이 깊어진 것 같네” 하는 남편의 찬사는 사실 많은 부분, 추위를 견디며 당을 축적해준 무 덕분이지만… 나는 왠지 그 비결은 비밀에 부치고 싶은 마음이 들어 아무 말 없이 어깨만 으쓱해본다. 별일 아니라는 듯.
남편이 드라마에 빠져 있는 동안 나는 냉장고 야채칸에서 큼직한 무를 꺼냈다. 깨끗하게 씻어 도마 위에 놓고, 잘 갈아둔 칼을 손에 쥐었다. 며칠 전 <흑백 요리사>에서 어느 셰프가 연근을 종잇장처럼 얇게 포뜨듯 써는 모습을 눈에 담아 둔 게 도움이 되었다. 나도 무를 가능한 한 얇게 한 장씩 썰어서, 둥근 종잇장 같은 무를 열댓 장 정도 살짝 비스듬히 포개고, 그걸 채 썰었다.
드라마의 남녀 주인공이 가벼운 대화를 주고받는 동안, 볼 안에는 굵은 실 같은 무채가 수북히 쌓였다.
이제 양념.
고춧가루를 넣고 비볐다. 진간장과 액젓을 조금씩 넣어 섞었다. 깨도 넣었다. 향이 올라왔다. 색도 그럴 듯했다. 보기만 해도 맛있어 보였다.
그럴 듯하군.
강한 확신을 느끼며 반찬통에 무생채를 담고, 마지막으로 남은 무생채를 입에 넣어 맛을 보았다가… 크게 실망했다.
아니었다. 내가 기억하는 맛있는 무생채는 이 맛이 아니었다. 간이 싱겁지는 않은데, 가장 중요한 무언가가 빠져 있었다. 뭔가 ‘아는 맛’이 있어야 하는데, 그 맛이 없다.
간은 맞는 것 같은데. 부족한 게 뭘까?
나는 손에 끼고 있던 장갑을 벗고 명상에 잠겼다. 뒷짐을 지고 현자처럼 부엌을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다섯 바퀴쯤 돌았을 때, 이윽고 마음에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아 맞다. 생강.
나는 냉장고로 걸어가 구석에 놓인 생강청 병을 꺼냈다. 생강청은 참 신기하다. 설탕인데, 그냥 설탕처럼 달기만 한 게 아니라… 생강과 함께 시간이 지나면서 단맛이 ‘맛’이 되어 있는 느낌이다. 지금 무생채에 필요한 게 바로 그거였다.
생강이나 계피처럼 향이 도드라지고 강한 재료는 아주 조금씩, 조심스럽게 더하는 편이다. 정말 조금. 티스푼 끝으로만. 그리고는 반찬통 안의 무생채가 넘치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비볐다.
맛을 보니…
그래. 이 맛이었다.
그날 밤, 무생채를 창가 쪽에 하룻밤 두었다.
다음날, 냉장고에 넣어 둔 무생채를 황태국과 함께 식탁에 올렸다. 남편은 무생채를 한아름 집어 입에 넣고는 한참 동안 인상을 쓰고 눈을 감은 채 그저 씹기만 했다. 한참을 씹더니, 남편이 드디어 입을 열었다.
“살면서 무생채를 임팩트 없는 반찬으로만 여겼지, 이렇게까지 맛있다고 느껴본 적은 처음이야.”
내 요리를 맛보는 단 한 명의 고객이 이토록 진심으로 감동할 때, 나는 마치 시상식에서 호명이라도 된 것 같은 기분이 된다. 설거지를 하면서 상상했다. 앞치마 모티브의 드레스를 입고, 양손에는 무생채 트로피를 들고, “이 모든 영광을 무와 생강청에게 돌립니다”라고 소감을 말하는 장면. 짝짝짝.
문제는 그다음 날이었다.
나는 또 신이 나서 무생채를 반찬으로 냈다. 잠들기 전에도 무생채 얘기를 할 만큼 무생채에 빠진 남편은 기대감을 한아름 안고 무생채를 집어 먹었다. 그리고 말했다.
“어어… 왜 어제 먹었던 그 맛이 아니지?”
네? 같은 반찬통인데?
몇 초 뒤, 머리에 스치는 것이 있었다. 생강청을 넣는다는 걸 무생채를 다 만들고 난 마지막에 생각해 내서, 반찬통에 든 채로 섞다 보니… 어제 먹은 윗부분에는 생강청이 더 많이 섞이고, 지금 꺼낸 아랫부분에는 상대적으로 덜 섞인 것이다. 사실 큰 차이가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남편은 알아봤다.
세상에. 그걸 다 알아보다니.
남편을 처음 만났을 때, 내가 느낀 그는 ‘맛도 멋도 아는 남자’였다. 시각적으로도 미각적으로도 감각이 좋은 사람. 데이트를 할 때마다 센스 있게 맞춘 양복을 입고 와서는 가장 맛있는 음식이 있는 곳들로 나를 데려갔다. 모태솔로 출신인 나는 그런 남편에게 홀딱 반하지 않고는 베길 수 없었다.
처음 만난 날로부터 십년도 더 지난 지금, 맛도 멋도 아는 이 남자는 나로 하여금 매일 끼니를 만드는 데 있어서 최선 중에서도 최선을 다하게 만든다. 내가 만든 음식이 맛있을 때마다 이렇게 기뻐하며 진지하게 음미해 주는 사람에게, 어떻게 대충해 줄 수가 있겠나.
남편은 한 번도 음식을 만드는 나의 수고를 허투루 지나친 적이 없다. 작은 노력 하나까지도 세심하게 알아보고 칭찬하고 감사해 준다. 내가 “요리를 잘 해봐야지”라는 생각을 스스로 하기도 전에, 요리를 열심히 하도록 만드는 남편은… 분명 고수임에 틀림없다.
그래서 그날 저녁, 나는 다시 냉장고에서 무를 꺼내 들었다. 이번에는 생강청을 잊지 않고, 처음부터, 골고루, 아래까지 잘 섞어줄게요.
무생채의 감동을 내일 또 줄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