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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술 후, 루틴을 놓은 아스퍼거

달걀감자샐러드

by 청아

유방 상피내암 수술 후 집에 돌아온 남편과 나는 팝콘 대신 두부 과자를 아그작 아그작 씹으며 넷플릭스 안의 세계들을 배회했다. 새로 올라온 영화 <승부> 의 세계에서 이병헌 배우님과 함께 바둑 경기에 끊임없이 나를 내몰기도 하고, 전에 보았던 귀멸의 칼날도 다시 돌려 보면서 검은색 검을 손에 꼭 쥐고 주인공 탄지로와 함께 혈귀들과 싸우기도 했다. 그러다 저녁 여덟시를 겨우 넘기고 잠에 들었다.

아침에 눈을 떠보니 거의 아홉시가 다 되어 있었다. 수술을 받은 나도, 보호자였던 남편도 피곤했는지 둘이서 나란히 열세시간을 내리 잔 거다.


정신이 좀 들자, 내 머리 속에는 한가지 생각 밖에 없었다.

'아침식사로 뭘 먹지?'


우리 부부는 평소에 아침식사로 야채 스프를 먹는다. 양파를 캬라멜라이즈 해서 여러가지 야채들과 함께 볶은 후에 물을 넣고 끓이면서 토마토를 더한다. 이 또한 전날 저녁에 만들어 놓아야 밤 동안 야채들의 맛이 우러나서 풍미가 깊어진다. 아침에 일어나 만들기에는 시간이 좀 걸리기도 하고 맛도 덜하다.


이십여일 전에 유방 상피내암 수술을 받았던 다음날, 퇴원하고 집에 와서 야채 스프를 끓였었다. 평소에 별로 힘들이지 않고 하는 루틴이라 깊은 생각 없이 양파를 씻어서 썰기 시작했다. 양파를 약불에 천천히 볶으면서 다른 채소들을 씻고 써는 단순한 일이 그렇게까지 힘에 겨울 줄 상상도 못했다. 삼일 동안 잠도 거의 못 자면서 나를 살피고, 거기다 장시간 운전까지 해야했던 남편은 야채스프를 끓이면서 극도로 피곤해진 나의 예민함을 받아줄 여력이 없었다. 결국 별 것 아닌 일로 둘이서 티격태격을 하는 동안 애꿎은 야채스프만 조용히 부엌에서 식어가고 있었다.


이 일은 아스퍼거 증후군이라서 대부분의 것들을 루틴대로 진행하는 나에게 크나큰 깨달음을 주었다. 아아... 수술한 다음날에는 야채스프를 끓이지 말 것. 아니, 아예 아무것도 하지 말 것. 딱 샤워만 하자.


덕분에 이번에 다시 수술을 받고 와서는 굳이 힘겨움을 버텨 가면서 야채스프를 끓이는 일 같은 건 하지 않았다. 아스퍼거에게 쉽지는 않았지만, '끓이지 않는' 그 어려운 일을 이번에는 해냈다. 루틴대로 가고자 하는 내 마음을 달래가면서.

'야채스프를 끓여 놓아야 해.'

'정신 차려. 오늘은 아니야.'

'야채스프 끓일 시간이야.'

'아니야. 오늘은 안 하는 거야.'

...... (무한 반복)


수술 전날 미역국을 끓여서 냉장고에 넣어두고 가긴 했지만, 밥이 없었다. 우리가 먹는 현미밥은 현미를 전날 저녁부터 물에 불려 놓았다가 밥을 짓지 않으면 소화하기가 좀 힘들다. 어제 저녁에 쌀 불려 놓아야지 쌀 불려 놓아야지.. 하고 되뇌이며 뒹굴거리다가 결국은 그냥 잠들어 버렸다.


"허 참, 걱정할 것 없어."

남편이 침대에서 아직 일어나지 않은 채 생각에 잠겨 있던 나를 안아주면서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다 안다는 듯 웃으며 말했다.

"우리 평소에 마시는 핸드 드립 커피하고, 마요네즈 만드는 것 - 딱 이 두 가지만 해줘. 아무 생각 하지 말고."


남편은 작은 조각들로 썰은 감자와 달걀 다섯 알을 삶았다. 그리고 감자 껍질 벗기는 칼로 양배추를 채썰었다. 냉장고 채소칸에 넣어둔 사과를 잘게 썰고 건조한 블루베리도 넣었다. 이 모든 것들을 큰 볼에 다같이 담아 두었다.


나는 남편이 요청한 대로 마요네즈를 만들었다. 믹서기에 달걀 노른자 5개를 넣고 홀 머스타드 한 티스푼과 레몬차 두큰술 정도를 더한 후 소금과 후추를 뿌렸다. 거기다 엑스트라 버진 올리브유 한 티스푼 정도를 넣고 갈기 시작했다. 내용물이 갈리는 동안 믹서기 뚜껑을 살짝 열고 올리브유를 실오라기만한 두께로 천천히 부어주었다. 첨벙이는 물 같던 질감이 점차 크림처럼 질퍽해 지기 시작한다. 믹서기를 작동시키면서 올리브유를 천천히 부어주는 과정을 계속하다 보면 내용물이 더 이상 질퍽해질 수 없어, 내용물은 더 이상 섞이지 않고 믹서기의 날만 혼자 돌아가는 순간이 온다. 마요네즈가 완성되었다는 신호다. 이 때 쯤이면 샛노오랗던 노른자의 색깔이 연한 노랑 혹은 아이보리색에 가까워져 있다.


모든 재료들을 한데 모아놓은 큰 볼에 남편이 내가 만들어준 마요네즈를 부었다. 내가 마요네즈와 볼 안의 재료들을 골고루 섞으면서 연한 노란빛의 윤기가 자르르한 달걀 감자 샐러드가 완성되었다.


"땡"

오븐에 넣었던 냉동된 식빵이 마침 노릿노릿 구워졌다.

남편은 마치 그림을 그리는 듯 스스로의 예술성에 취한 표정으로 큰 접시 두 개에다가 각각 한 켠에 달걀 감자 샐러드를 얹고, 맞은 편에는 구운 식빵을 놓고, 그 옆에는 알맞게 썰은 토마토를 놓았다.


"수술하면서 찢어 놓은 부위를 회복시키는 데에는 달걀이 최고지."

남편이 두 접시 중 하나를 나에게 건네며 말했다.

"어때. 루틴대로 안 해도 아무 문제 없지?"

두 손에 받아든 큰 접시 안에 달걀의 노란색, 토마토의 붉은 색, 블루베리의 푸른색 등등 여러가지 색깔이 어우러져 있었다. 예쁜 선물을 받은 것 같았다.


나도 남편에게 선물을 건넸다. 내가 주는 선물은 연한 듯 진한 고동색. 남편을 위해 정성껏 만든 커피 한잔이었다. 전신 마취를 받은 직후에는 뇌가 편안히 회복할 수 있도록 커피는 마시지 않는 것이 좋다고 해서 내 것은 만들지 않았다.


아침 식사를 마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다시 잠에 빠져들었다. 이번에는 다음 식사의 루틴에 대해서 아무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있었다. 아침 식사를 편안하고 맛있게 하고 나니, 식사 준비에 대해 루틴이 아닌 남편의 리드를 따르는 게 한결 편안해졌다. 내가 잘 회복하기 위해서는 어떠어떠한 것들을 먹어야 한다는 강박에서도 놓여났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런 갖가지 강박들이 나의 회복을 더디게 했던 것 같다.


아스퍼거 증후군이다 보니, 새롭게 경험하는 상황들이 혼란스럽고 그에 대해 어떻게 대처하면 좋을지 생각하는 게 어렵다. 그렇다고 상황에 따른 변화 없이 하던 대로 하는 건 더더욱 힘겹다.

이럴 때 남편의 한마디 한마디가 나의 마음에 등불이 된다.


걱정할 건 아무것도 없어.

맞고 틀린 건 없어.

내가 옆에 있으니 마음을 놓아도 돼.

그저 하던대로 하지 않아도 돼.

모든 게 다 괜찮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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