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콩 두유
내일 이 시간에는 아마도 서울 가는 고속 버스 안에 앉아 있을 것이다. 손을 잡아주는 남편도 내 옆에 앉아 있을 것이고. 나는 가는 내내 내 마음을 바라보고 있겠지. 내 인생이 어떻게 흘러갈지를 신에게 맡기려고 할 것이다. 그렇지만 언제나 그래왔듯, 집착과 두려움을 자꾸만 움켜쥐려는 내 마음의 손가락들을 어떻게든 펼쳐 보려고 할 것이고, 가까스로 좀 놓으려다가 또다시 붙들었다가, 아까보다는 조금 더 많이 내려놓았다가, 안되겠다 싶어 다시 가서 붙들었다가 하는 과정을 버스가 강남 터미널에 나를 데려다 놓기까지 빙글빙글 돌고 있을 것이다. 아니, 어쩌면 전보다는 조금은 더 초월한 듯 이 과정에 마음을 열 수 있을지도 모른다. 남편의 미소와 내 손을 잡아주는 그의 손의 온기가 가는 내내 내 몸과 마음이 얼어붙지 않게 따스함을 줄 것은 분명하다.
내일은 2주쯤 전에 했던 유방암 수술의 결과와 앞으로의 치료계획을 들으러 서울에 가는 날이다.
"가슴을 열어보니, 이번에 제거한 암세포 옆에 어떤 이상한 세포가 있는 걸 발견했습니다. 조직검사를 해보고, 검사 결과 이 세포 또한 암이라면 이번 수술보다 더 큰 재수술을 해야 합니다."
의사 선생님의 말씀이 지난 2주 동안 내 머릿속에서 알게 모르게 몇 번 정도 반복 재생이 되었을까. 백 번? 천 번? 전신마취를 또 할 수도 있다고? 내 몸의 소중한 한 부분을 떼어내야 할 수도 있다고?
얼마 전에 남편이 말했었다. 인생은 강물이 흐르는 것과 같은데, 우리는 강물에 빠진 채로 그 흐름에서 벗어나려고 발버둥을 치며 허우적대면서 인생을 살아갈 수도 있고, 강물 위의 나룻배에 몸을 싣고 강물의 흐름을 신뢰하면서 강물이 흐르는대로 따라가며 그 흐름이 허락하는 모든 것들을 즐길 수도 있다고.
유방암이 재발하면서 선택지가 내 앞에 날아와 펄쳐졌다.
펼쳐진 종이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당신은 지금 이 순간 아래 두 항목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합니다. 선택한 항목에 체크하세요. 체크할 펜은 당신의 마음 속에 있습니다.
1번. 나에게 펼쳐지는 현실이 싫다는 마음을 꼭 붙들고 두려움과 슬픔으로 내 마음을 채웁니다.
2번. 모든 것이 완벽하다는 사실을 적극적으로 인정합니다. 신이 나를 사랑한다는 사실을 깊이 느낍니다. 나에게 펼쳐지는 현실의 완벽함이 어떤 것일지에 대한 깨달음을 믿고 기다립니다.
선택지는 지긋지긋할 정도로 하염없이 날아왔다. 밥을 한 숟갈 뜨려고 하는 순간에도 밥그릇 안에서 펼쳐지고, 밤에 잠자리에 누워 잠을 청하는 중에도 감고 있는 두 눈 속에 펼쳐지고, 남편과 유튜브 동영상을 보며 웃고 있는 중에도 맥락없이 모니터에 펼쳐지고, 설거지를 하는 중에도 세제 거품 속에 펼쳐졌다. 지금도 또 한 장 날아와 펼쳐진다.
두려움과 슬픔으로 살고 싶은 사람이 어디 있겠냐 싶지만, 놀랍게도, 1번을 선택하고 싶은 마음도 만만치 않게 크다. 내 모든 에너지를 모아 저항하고 싶은 마음, 극도의 우울함 속으로 들어가 숨어버리고 싶은 마음도 있다. 그렇게 하면 현실이 내 뜻대로 될 수도 있을 것만 같은 느낌도 든다. 현실은 그런 식으로 움직이지 않는다는 걸 알면서도 말이다.
마음아, 마음아, 진짜로 원하는 게 뭐니... 선택지가 날아올 때마다 묻고 또 묻다보니, 내가 원하는 것은 그저 사랑하는 것 뿐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의 삶을 있는 그대로 진정성 있게 사랑하는 것.
어떤 일이 펼쳐진다 해도, 펼쳐지는 그대로가 완벽한 신의 세팅임을 신뢰하는 것. 그렇게 신을 사랑하는 것.
암이 다시 생겼다는 걸 알게 되고, 이 과정에서 느껴지는 나의 감정들을 온전히 느껴보면서, 그리고 무섭다고 생각했던 것들이 실은 진정으로 무서운 것들이 아니라고 느껴지기 시작하면서, 나는 나 자신에게 한 걸음 더 가까이 다가가게 된 것 같다. 내가 어떤 존재인지에 비로소 마음을 열기 시작한 것도 같다. 그러지 않으면 내 삶 전체가 불행해져 버릴까봐 어쩔 수 없이 택한 선택지이긴 했지만, 이 선택지가 나의 내면에 변화의 진동벨을 울려준 것도 사실이다.
나의 생각이 다시 내일 가서 앉아있을 버스로 돌아갔다. 아침 8시에 버스를 타야 하는데 우리가 평소에 먹는 아침 식사를 하기엔 시간도 빠듯하고, 준비하고 정리하다 피로해질 것도 같다. 그렇다면 빈 속으로 가는 게 좋을까, 간단한 무언가를 좀 먹는 게 좋을까. 지금까지의 나를 살펴보면, 나는 뱃 속이 비면 몸이 쉽게 차가워지는 것 같다가도 무언가를 먹으면 몸에서 온기가 생겨나곤 했다. 게다가 마음까지 차가워질 수도 있는 상황이니, 따뜻한 무언가를 약간만 먹어주면 좋을 것 같았다.
그렇다면, 내일 아침에는 따뜻한 검은콩 두유가 딱이다.
검은콩을 씻어서 낮에 8시간 정도 불려 놓았다가, 저녁 때 삻은 후 좀 식혀서 콩을 삶았던 물과 함께 갈아주고, 체에 걸러서 검은콩을 삶았던 냄비 안에 다시 넣고 냉장고에 보관해 주면, 내일 출발 전에 간단히 데펴서 따뜻하게 먹을 수 있을 것이다.
냉장고에 보관할 땐 미지근하게 식은 두유 위에 랩을 얹어서 공기와의 접촉을 최소화해 주면 고소함이 좀 더 유지된다고 한다.
오케이. 이제 내일 있을 일정에 마음도 아침식사도 모두 준비된 것 같다.
브라보 마이 라이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