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역국
아버지는 산부인과 의사셨다. 내가 아주 어렸을 때, 우리집은 아버지의 병원이 2층에 있는 한 건물의 4층이었다. 유치원을 마치면 나는 집에 가방을 던져놓고는 아버지의 병원에 가서 어슬렁 거리곤 했다. 아버지는 바쁜 와중에 틈틈이 나를 찾아와 반겨 주셨고, 나는 엄마가 아침에 곱게 다림질한 하얀색 가운을 입은 아버지의 모습이 참 멋지다고 생각했다. 의사 가운의 가슴팍에 파란색 실로 수놓은 아버지 이름 세글자가 자랑스러워서, 아버지가 나를 안아주실 때 그 글자를 손으로 만지작거리곤 했다. 간호사 언니들도 아버지의 딸인 나를 언제나 기쁘게 맞아주셨다. 나는 어디를 가나 산부인과집 딸이었고, 아버지의 산부인과 안에서는 공주였다.
병원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뉘어 있었다. 한 부분은 진료를 보기 위한 공간이었다. 정문을 열고 들어가면 접수대가 있었고, 접수대 뒤로는 자음별로 나뉜 서류장에 환자들의 차트들이 수북이 쌓여 있었다. 내가 어렸을 때는 컴퓨터가 없었다. 모든 기록은 종이에 있었다. 환자가 문을 열고 들어와 이름을 밝히면, 간호사 언니가 서류장에서 두터운 종이 한 뭉치를 꺼내 한 장씩 확인하며 한참을 뒤적거렸다. 대기실 소파에는 항상 배가 많이 나온 산모도 있었고 배가 아직 별로 부르지 않은 산모도 있었다. 대기실과 접수대 사이 즈음에 아버지가 계시는 진료실로 들어가는 문이 있었다.
병원의 다른 한 부분은 수술과 입원을 위한 공간으로, 진료를 위한 공간의 뒤편에 자리하고 있었다. 산모들은 끔찍한 비명을 지르며 수술실에서 아기들을 낳고 수술실 옆의 입원실로 옮겨져 쉬었다. 아기를 낳을 때 그토록 아팠는데도 방에서 아기를 안고 있는 산모들의 모습은 저마다 행복해 보인다는 게 다섯살 아이의 눈에 참 희한하게 느껴졌다. 내가 알 수 없는 어떤 마음이 있나보다고 생각했다.
입원실들이 나란히 있는 복도를 지나 가장 안쪽으로 가면, 바로 엄마가 진두지휘하는 부엌이 있었다.
병원 부엌에서는 항상 미역국 냄새가 났다. 아기를 낳은 산모들에게 엄마는 항상 미역국을 제공했다. 엄마가 아기를 막 낳은 산모에게 푹 끓인 미역국을 비롯한 식사를 드릴 때 엄마에게는 따뜻한 친절함과 진통을 겪느라 수고했다는 애틋함, 그리고 한 엄마가 그 날 새롭게 엄마가 된 타인에게 전하는 어떤 마음이 있었다.
그런 엄마에게 왜 산모들에게 미역국을 주는 건지 한 번도 물어본 적이 없었다. 미역국이 산모들에게 어떤 좋은 면이 있는지 유치원생 머리로는 이해할 턱이 없었지만, 설명 없이도 그저 알 수 있었다. 미역국은 새로운 생명을 세상에 내어놓는 이에게 주는 선물이었다.
어느 날, 외할머니가 병원에 찾아오셨다. 미역국 냄비 앞에서 몰입하시는 외할머니의 모습은 주부라기보다 장인이었다. 외할머니는 내가 그 곳에 있는지도 모르시는 것 같았다. 아니, 알아도 상관없어 하셨던 것 같다. 이상한 적막 속에 보글보글 소리만 부엌에 가득했다. 굵은 소금을 한 웅큼 집어 무심한 듯 '툭' 던져 넣으셨는데, 분명, 무심보다는 무아지경에 가까웠다.
이윽고 몰입에서 나온 외할머니가 끓이고 있던 미역국을 작은 그릇에 자작하게 담아 나에게 맛을 보라고 내미셨다. 그 때 먹은 미역국의 맛을 지금도 기억한다. 국물 안에서 어떤 에너지가 용솟음치는 것 같았고, 간이 너무나 완벽해서 한 대 얻어맞은 것 같은 기분조차 들었다. 외할머니는 스스로 간을 보지 않고도 그 오묘한 지점을 정확히 짚어냈다.
엄마가 끓여내던 미역국은 외할머니로부터 온 것이었다. 엄마는 자신의 엄마에게 받은 미역국을 또 새롭게 엄마가 된 이들에게 선물하고 있었다.
기억 속에 있는 미역국의 맛을 내 손으로 만들어 내는 게 쉽지가 않았다. 어느 정도 맛있게 만들 수는 있었지만, '그' 맛이어야만 했다.
그 맛을 찾기 위해 미역국에 관한 많은 레시피를 검색해 보고 시도해 보았다. 하다하다 안 돼서, 살면서 한 번도 연락드린 적이 없었던 둘째 숙모께 용기를 내어 전화를 드렸다. 둘째 숙모가 외할머니에게 가장 음식 솜씨를 많이 전수받으셨다고 해서다. 생전 처음 나로부터 전화를 받고 무슨 일인가 놀라 하시는 숙모에게 물었다.
"숙모.. 외할머니 미역국 만드셨던 방법 좀 알려주세요."
수많은 시도 끝에 나의 미역국 만드는 레시피가 완성되었다.
일단, 미역을 제대로 불려야 한다. 미역은 10분만 불려도 부피가 확연히 늘어나는데, 이 정도면 되었겠지 하면 안된다. 미역을 찬 물에 세 시간 정도 불린다.
불린 미역을 깨끗이 씻는다. 거품이 안 날 때까지 씻어야 비린내가 안 난다.
물기를 어느 정도 뺀 미역을 가위로 먹기 좋은 크기로 퉁퉁 잘라 냄비에 넣고 들기름에 약불로 볶는다. 이 볶는 과정에 정성이 필요하다. 휘리릭 볶고 다음 단계로 넘어가면 맛이 안 난다. 아주아주 오래 볶는다. 15분이든 20분이든 볶다 볶다 보면, 부피가 1/3 정도로 줄면서 미역의 자아가 해체되는 게 느껴진다. 그래도 더 볶다 보면 이윽고 미역의 혼잣말이 들린다.
어어 내가 누구였더라...
그 때 국간장을 냄비 바닥에 부어 마이아르 반응을 일으킨 후 미역과 섞어준다.
물을 붓고 센 불에 끓이는데, 이 때 물을 많이 붓지 않는 게 중요하다. 처음 단계에서는 반드시 물을 자작하게만 붓는다.
물이 어느 정도 끓으면서 미역의 초록색 성분이 물에 녹아나오면, 이제 나머지 물을 부어 센 불에 끓인다.
물이 끓으면 중강불에서 10분 정도 끓이면서 멸치 액젓과 마늘, 그리고 소금(굵은 소금과 죽염을 섞어 넣는다) 넣고, 그 후에는 약불에 뭉근히 끓여준다. 15분 정도 끓이면 맛이 어느 정도 우러나오지만 오래 끓일수록 맛있다.
미역은 약불에서 맛이 우러나오니, 반드시 약불에 오래 끓일 것.
외할머니가 엄마에게, 그리고 엄마가 나에게, 생명과 함께 선물해준 그 맛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