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이무침
오랜만에 눈물을 뚝뚝 흘렸다.
3일 전이었다. 보통은 8시 반에 아침 식사를 하지만 그 날엔 9시 반쯤 아침 식사를 했다. 그리고 나서 나의 모든 지식과 직감을 동원해 내가 만들 수 있는 최상의 카레를 마침내 완성해 낸 오후 1시 쯤, 남편 방의 방문을 열고 물었다.
"식사 하실래요? 배 고파요?"
내 말에 남편은 대답 대신 대화를 청했다.
"청아야, 우리 얘기를 좀 하자."
그 동안 우리의 생활 패턴에 엇박자가 좀 있었다. 오전 중에 주로 주식 매매를 했던 남편은 아침 식사를 마친 후 줄곧 앉은 상태로 집중을 했다. 그 동안 나는 설거지부터 시작해서 빨래, 집안 정리, 장보기 등등 이런저런 집안일을 했기 때문에 오전 내내 몸을 움직이는 일정이었다. 그렇게 3시간에서 4시간 정도가 지나고 나면 남편은 아까 먹은 아침이 아직 소화가 되지 않은 채 배 안에 그대로 남아 있었고, 반면 내 배는 텅텅 비어 꼬르륵 소리가 났다. 보통 8시 반에 아침 식사를 했으니 12시나 12시 반쯤 점심 식사를 하는 게 적절하다고 생각했던 나는 그 시간대에 점심 식사를 차려 놓고 남편을 청하곤 했다.
남편은 "벌써 먹어? 허허..." 하면서도 "먹자~" 하며 그릇에 든 음식을 싹싹 비우며 맛있게 먹었다. 내가 얼마나 열심히 준비했을지 아니까.
그렇게 배가 고프지 않은 상태에서 얹어 먹는 상황이 반복되자 남편이 이제는 스트레스가 쌓이기 시작했던 모양이었다. 짜증이 나는 단계로 진입하기 전에 대화로 해결책을 찾아보려는 생각에 청한 대화였다.
"요즘 점심을 차릴 때마다 웃으면서 내가 아직 배가 안 고프다고 했던 얘기를 아무래도 청아야 잊어버린 것 같아. 아침 식사를 적게 하고선 한두 시간만 지나도 배가 고프다고 하니 내가 힘들어. 점심을 일찍 먹으니 저녁 때가 되면 배가 고파져서 또 많이 먹게 되니까 내가 배가 나오고 잠을 깊게 못자는 것 같아."
여기에서 마음 속의 빨간색 주의등이 깜빡 거리기 시작했다.
남편은 문과적 성향이고 나는 이과적 성향이다. 남편이 '한두 시간' 이라고 표현하는 건 '금방' 이라는 의미다. 그러나 내가 듣는 '한두시간'은 그야말로 1시간 내지 2시간이다.
"한두 시간요?? 아니 그럼, 요즘 아침 식사를 보통 8시 반에 하는데 내가 9시 반에 배고프다고 했다고요?? 어머나 그랬을 리가 없어요!!"
"내가 한두 시간이라고 표현한 건 그런 뜻이 아니잖아! 그리고 청아가 모든 걸 다 정확히 기억한다고 그렇게 확신해?"
"그렇지만 아무리 그래도 내가 9시 반이나 10시 반에 배고프다고 한 적은 없는 것 같애요."
......
"그리고 나 오빠 말을 잊지 않았어요. 그러니까 아까도 배가 고픈지에 대해 먼저 물어봤잖아요!"
내 마음은 억울함으로 가득차 버려 한 시간 넘게 티격태격이 이어졌다. '한두시간' 의 의미를 규명하고 내가 남편의 말을 기억을 한 건지 못한 건지에 대해 옳고 그름을 주장하는 동안 부엌에서는 카레가 식어갔다.
남편은 대화의 목적이 중요하다면 한두시간이라는 사소한 말 한마디에 왜 그렇게 집착하냐며 나에게 선택을 하도록 했다. 해결책을 찾기 위한 대화를 할 것인지 한두 시간이라는 말에 계속 억울해 할 것인지.
해결책을 찾고 싶다고 했다. 그리고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가 내쉰 후 일단 떠오르는 해결책을 제안해 보았다.
"우리가 저녁으로 빵와 샐러드를 먹는데, 앞으로는 빵은 생략하고 샐러드도 반으로 줄이는 게 어떨까요?"
한두 시간의 의미를 반복해서 설명하다 안 그래도 마음이 지쳐있던 남편은 내 제안을 듣고 이제는 정말 마음이 상해버려, 공격적으로 말하기 시작했다.
"나하고 따로 가겠다는 거야??"
내 생각을 설명만 하면 남편이 화낼 일이 아니라는 걸 이해할 것 같았다. 설명을 하려고 했지만 남편은 이미 마음이 상해버린 후라 내 설명을 차분히 들을 상태가 못 되었다. 몇 번이나 설명을 하려 했지만 남편의 화에 몇 마디 못하고 계속 말이 잘렸다.
"아니, 그런 뜻이 아니구요...... 그게 아니구..."
그러다 결국 눈물이 터져 버렸다.
나의 제안의 숨은 의도는 이랬다.
남편이 어릴 때부터 중이염 치료를 받느라 독한 항생제를 장기간 달고 사느라 장내 미생물 환경이 좋지 않을 터라, 내가 남편의 장 건강을 특별히 유념하고 챙겨야 한다는 생각이 있다. 그래서 익힌 야채와 생야채를 매일 섭취하려고 노력한다. 우리가 보통 아침 식사로 야채 스프(익힌 야채)에 빵을 곁들여 먹고, 점심으로는 밥이나 면 요리를 먹고, 저녁으로 샐러드에 식빵 한 쪽을 곁들여 먹으니, 저녁식사를 생략하게 되면 생야채를 먹을 시간이 없어지게 될 것 같았다. 그래서 생야채를 조금이라도 먹자는 뜻이었다. 일단 그렇게 제안해 놓고 또 이야기를 나누면서 식사 시간이나 메뉴 선정에 대해서 이리저리 조율을 해볼 생각이었다. 꼭 저녁을 먹어야 겠다고 고집 부리는 게 아니었고...
결국엔 내 뜻을 전했다. 아니, 내가 전한 게 아니라 남편이 스스로 해석을 해냈고 나는 거기에 동의를 했다.
"....... 혹시 이런 뜻이었던 거야?"
"오빠 내 말 뜻이 바로 그거였어요.... 엉엉엉..."
...
"내가 지금 눈물이 너무 나와서 더 이상은 대화가 힘들 것 같애요."
"왜 그렇게 우는 건데?"
"왜 눈물이 나는지조차 지금 당장은 생각을 정리하지 못하겠어요. 나 혼자 좀 있을게요."
그리곤 이불 속에 웅크리고 누워서 엉엉 울었다. 뭐가 그토록 서러운지 모르면서도 큼지막한 눈물 방울들이 계속 흘러내려 베개를 적셨다.
곧 남편이 다가와 우는 나를 안아주었다. 그리고 눈물을 닦아주며 말했다.
"청아야 오빠는 섭섭했던 거야. 4시 이후에 음식을 안 먹고 공복 시간을 늘려 보는 게 좋은 것 같다고 여러번 얘기 했었는데, 청아가 오빠가 했던 얘기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도 없이 그저 저녁으로 샐러드를 먹자 하니까 오빠가 거절감을 느끼게 되잖아.
우리 둘 다 성장해 가는 과정이야.
청아가 설명을 잘 못하잖아. 그건 청아도 인정하지? (끄덕끄덕...) 아까처럼 말하면 오빠 아닌 누구라도 섭섭하거나 화가 날 거야. 그렇지만 청아는 자라나면서 상대방의 마음을 배려하면서 말하는 법을 배우지 못했잖아. 소통을 잘 하는 오빠랑 살면서 조금씩 배워가게 될거야. 끝끝내 못하더라도 괜찮아. 오빠는 청아를 있는 그대로 사랑하니까.
오빠는 청아가 그런 사람이라는 걸 자꾸 잊어버려. 그래서 화가 나는거야. 오빠도 모르게 소통을 잘 하는 사람을 대하듯 하면서 내가 소통하듯 해주길 기대하다가 짜증을 내곤 해. 오빠도 사랑하는 법을 배워가고 있어... 그걸 청아가 알아주었으면 좋겠어."
나의 부모님은 소통에 자유로운 분들이 아니셨다. 참거나, 더 이상 참기 어려울 때를 맞닥뜨리면 화를 내시곤 했다.
그래서 나는 지금도 소통이 어렵다. 조금이라도 불편한 일에 대해 소통을 하다 보면 이렇게 마음의 방패를 들이밀고 나는 그 뒤에 숨어버린다. 그 순간에는 나 자신도 타인도 사랑하기 어렵다. 말하는 걸 원래도 잘 못하는데, 더군다나 불편한 소통을 하는 상황에서는 생각이 잘 안 되다 보니, 나의 의도와는 다르게 상대방을 더 화나게 하는 말을 불쑥 하게 되곤 한다.
내 남편은 무조건 내가 맞다고 해주거나 억지로 져주는 남편은 아니다. 그렇지만 나를 위한 따뜻한 배려와 친절은 잃지 않는 사람이다. 남편과의 어떤 대화도 내 마음 안에 상처로 남지 않도록 애써주는 사람이다.
남편 품에서 남편이 다독여 주는 말을 듣고 나니 눈물이 쏙 들어갔다.
꼬르르르륵...
3시 반쯤이었던가. 우리 둘 모두의 배에서 거의 동시에 배고픔의 신호가 왔다. 우리는 식은 카레를 다시 데웠다. 맛있는 카레를 먹으면서 좋아진 기분으로 다시 의논을 시작했고, 이렇게 임시 결론을 냈다.
아침 식사는 하던대로 8시 반쯤. (저녁을 안 먹으니 아침에 배고플 수 있으니, 원하면 이보다 더 빨리 먹어도 된다.) 샐러드와 빵과 커피. 야채스프를 곁들여도 된다.
점심 식사는 3시 반이나 4시쯤. 제대로 된 식사.
저녁은 먹지 않기.
만약 중간에 배고프면 야채 스프를 먹기.
이렇게 해보고 불편한 점이 있으면 다시 의논해서 조정할 것.
< 오이 무침 >
요즘 남편이 내가 만든 오이무침을 너무 좋아한다. 오늘도 오이 무침을 도시락에 싸서 도서관으로 가볼 예정이다.
오이를 얇게 썰어 소금을 뿌리고 잘 섞어 30분 정도 둔다.
오이를 잘 짜서 물기를 제거한다. 물기가 많으면 양념이 흘러나와 나중에 간이 좀 싱거워진다.
고추가루를 잘 섞는다.
원하는 빨간색이 나오면 이제 까나리 액젓(이미 오이에 소금기가 있다는 걸 감안해서 액젓의 양을 조절한다.), 설탕(갈색 비정제), 매실, 사과식초, 갈은 깨, 그리고 들기름을 잘 섞어준다.
사진은 오이 2개 분량. 물기를 짜니까 많이 쪼그라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