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래너리 오코너 『오르는 것은 모두 한데 모인다』 중「제라늄」 현대문학,
< 소설분석과 창작기법> 기말과제로 냈던 감상문이다.
아직도 감상문이 무엇인지 잘 모르겠지만, 말 그대로 오코너의 소설을 읽으면서 느꼈던 점 그대로 담백하게 담고 싶었다.
식곤증 인가 아님, 진통제 때문일까. 새벽녘에 죄책감에 시달리다 깬 이유 말이다. 읽어야 할 당위성을 이겨버린 잠, 책 편지 십 분도 안 돼서 연이은 하품에 턱이 빠질 듯 아팠고, 슬플 때보다 눈물이 더 났다. 잠의 승리는 머리를 책 속에 박게 했다. 이십여 분쯤 됐나. 마른 트림 게워 내며 다시 눈알에 힘을 주고 책을 팠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머리가 책 속에 파였다. 미련 없이 흰 수건을 던졌다. 아예 자리 펴고 누웠다.
이부자리에서도 연필을 움켜쥐고, 벽돌만큼 두꺼운 책을 손에 붙들었으나, 병든 닭처럼 또 졸았다. 그렇게 새벽 다섯 시까지 일곱 시간 동안 잠과 사투를 벌였다.
처음 읽었을 때 온통 물음표였다. ‘짧은 단편에 왜 많은 등장인물이 필요할까?’, ‘제라늄은 무엇을 의미할까?’, ‘왜 모욕적인 단어인 ‘검둥이’가 페이지마다 빠지지 않게 나오다가 ‘깜둥이’까지 썼을까?’ 느낌표까진 아니더라도 물음표라도 없애고 싶었다.
새벽 다섯 시, 바닥에 대충 깔아 놨던 이부자리를 정리했다. 차가운 물에 세수하고 다시 책상 앞에 앉았다. 처음부터 다시 읽었다. 이십 분도 안 지났는데 마지막 문장에 다다랐다. 밤새도록 고통스러웠는데, 이리 쉽게 끝날 일이었다니. 여전히 작가가 이 작품에서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잡히지 않았다.
오코너의 배경을 읽고 나서 몇 개의 물음표가 해결됐다. 오코너는 남북전쟁이 끝나고 60여 년 후 태어났지만, 여전히 인종차별이 지속되는 남부 출신이라는 것. 그 시대 남부에서 자행되던 흑인에 대한 보편적인 편견을 담아냄으로써 역으로 그 시각 자체가 잘못되었음을 표현했달까.
등장인물이 많은 편이라, 나오는 모든 등장인물을 메모했다. 두드러진 특성이 하나 있었다. 이름을 가진 자와 못 가진 자. 독특한 것은 이름을 못 가진 자는 더들리 영감과 혈연으로 맺어진 가족이 대부분이었다. ‘검둥이’를 제외하면 딸, 사위, 손자에겐 이름이 없었다. 왜 가족에겐 이름을 주지 않았을까. 자식 된 도리 한다고 더들리 영감의 살아온 터전을 딸이 버리게 만들어서였을까. 가족이지만 소통하지 못하는, 아니 소통할 마음이 없다는 편이 맞겠다. 사랑과 관심은 없고 의무만 남아버린 공허한 관계였기에 이름을 주지 않았던 것인가.
고향의 카슨부인, 그리스비, 루티샤, 레이비에게 친절했던 더들리 영감은 원하지 않는 곳으로 옮겨진 후 만난 검둥이에게 반감을 내보였다. 흑인에 대한 반감이 아니라 자기가 처한 처지에 대한 반감 아니었을까.
밑줄 쳐둔 부분만 다시 읽었다. 공통점이 보였다. 글을 쓸 때마다 묘사할 장면이 입에서 맴돌 뿐 표현하지 못해 답답한 적이 한두 번이 아녔다. 오코너는 아주 쉽고 속 시원히 보여줬다. 예를 들자면 ‘자기 몸의 형태로 빚어지는 의자’, ‘그가 천둥처럼 말했다’, ‘웃음을 참듯 입술을 아래로 당겼다’ 등. 몇 개 안 되는 단어로 상황을 간결하게 눈에 보이듯 그려냈다. 점점 오코너에게 빠져 들었다. 톺아보고 싶어졌다. 삼독 째.
‘그는 제라늄을 기다렸다.’ 여기서 잠시 멈췄다. 왜 제목이 제라늄인가. 제라늄에 관한 관심이 서서히 증폭됐다. 제라늄은 단순한 꽃이 아니라 과거와 현재 시공간을 여는 문으로 사용되었다. 시간과 공간이 달라질 때, 어떻게 자연스럽게 그려낼 것인가가 항상 의문이었다. 어떤 장치를 어떻게 써야 할지 늘 헤맸다. 오코너는 제라늄 하나로 가뿐히 과거와 현재를 오갔다.
더들리 영감의 모든 통증은 목과 연결됐다. 제라늄이 있어서는 안 될 자리에 있을 땐, 그의 목이 빳빳해졌다. 검둥이 덕에 계단을 오르고 집에 도착한 후엔 목 놓아 울었다. 표면적으로 보면 별일도 아닌 것에 그리 고통스러워할 일인가 싶을 수 있겠다. 더들리 영감에게 고향에 있는 제라늄이 더 이쁜 이유. ‘그런 일이 있을 수 없는 곳’이라 부르짖으며 예전 살던 곳에 대한 그리움. 닭장 같은 곳에서 숨조차 안 쉬어지는 답답함을 눈구멍과 목구멍이 좁아지는 아픔으로 그려냈다. 옛 시절의 그리움을 이보다 더 잘 표현할 수 있을까?
표면적인 내용을 쓰기에도 바쁜 나로서는, 오코너의 깊이가 부러웠다. 잠과 사투를 벌이게 할지언정, 멱살 잡고 다시 읽고, 또 읽고, 또 읽게 했던 힘. 의도를 파악하려고 곱씹고 또 곱씹어 사라질지언정, 또 머리 굴리게 만들었던 힘. 이 작품이 오코너가 스물한 살 때 쓴 첫 작품이라니 나야말로 목 잡고 넘어갈 지경이다. 그의 두 배수가 넘는 나이에도 소설 쓰는 일이 그저 어렵기만 하다. 밑줄이 많아질수록, 사유가 깊어질 테니 한숨은 접어두고, 다른 밑줄을 그으러 「이발사」로 떠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