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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환 관찰일기 (5)

"고통이 파고든다면"

인간은 인간에게서 상처를 받거나 위로를 받고 슬픔을 느끼고 행복을 맛보며 절망을 하고 희망을 발견한다. 고통이 떠나간 자리에는 새로운 문이 만들어진다. 문이 열리는 시간은 아무도 알 수 없다. 다만 어떠한 문이 만들어지는지는 자신에게 달려 있다. 치밀하고 섬세하게 문을 만드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빠른 탈출을 위해 조악한 공사를 하는 사람도 있다. (…) 영화 OOO은 무엇으로부터 고통받은 사람이 그 무게에 짓눌려 좌절하거나 주변의 도움을 통해 문제를 해결하는 이야기는 아니다. 오히려 스스로 고통의 불 속에서 헤쳐 나오거나, 심지어 자신이 타인에게 고통을 줬다면 스스로가 그 비극을 책임으로 바꾸는 ‘타협’을 하는 영화다.


라는 뉘앙스의 글을 "고통이 파고든다면"이라는 제목으로 몇 년 전에 쓴 적이 있는데, 몇 년이 지나 다시 읽어볼 기회가 생겼다. 아마 그 기회가 나의 또다른 '문'이었나보다. 다른 차원으로 넘어가기가 무서워서 문을 열지 않으려다가 회사 게시판에 누군가 올린 글귀를 보고 정중히 노크를 해봤다. 계신가용~


내 자신이 스스로의 고통에 반응하지 못하고 이득을 따져서 불합리함에 굴복하면 나는 평생 외부에 휘둘리는 사람으로밖에 남지 못할 거라는 생각이 바탕이 된 것이었는데, 이 생각을 빚어준 글귀의 원문은 한나 아렌트님의 말씀으로 정확한 워딩은 기억나지 않는다. (나는 각인이 잘 안 되는 사람이다)


스스로를 구원하려는 기특한 마음과 노력이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어깨를 짓누르고 거북목을 하게 만드는 화면이 간간이 재생된다. 그럴 때는 눈과 귀를 가린다. 손가락 사이로 들어오는 화면의 빛과 소리는 어쩔 수 없지만 안 본 척 해야 한다.


생각과 마음을 잊지 않기 위해 글을 쓰는데 이게 바람직한 것인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나는 나를 어느 정도 알기 때문에 이 작업이 나에게 도움이 되리라는 것도 추정할 수 있다. 청춘의 어느 순간부터 나의 인정욕구는 관계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강하게 믿기 시작했다. 그것이 아니고는 나를 설명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내가 가진 갈증은 나를 인정해주는 사람으로부터 해결된다고 여겼다. 그리고 그가 지향하는 방향을 나도 원하는 척 했다.


난 뱁새가 아니고 상대 역시 황새는 더더욱 아니지만 (갑자기 왜 뱁새 가랑이 찢어진 비유가 떠올랐는지 모르겠다) 뱁새가 신은 빨간구두를 벗을 수 없다면, 그 다리를 절단해서라도 미친 춤을 추지 않는게 이롭다. (그렇지 않으면 수십마리의 황새떼와 미친춤을 추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전설의 고향 작가님보다 찰지게 무서운 안데르센 아저씨...


아무튼, 차원의 문에 노크를 하긴 했는데 답이 없어서 우선 손잡이를 당겼다. 나이를 이렇게 먹었는데도 당기시오(PULL)와 미시오(PUSH)는 여전히 헷갈린다. 영어를 못해서가 절대 아니다. 나는 오른손잡이 이기 때문에 오른발을 살짝 들이밀게 되었는데, 웬걸 허공이다. 문 너머에 나같은 뱁새들이 붉은 융단을 깔아줄 것이라 기대했던 것이다. 택도 없이.


왜 나는 당연하게도 "(거기 누구) 계신가용"이라고 했을까?

이 시점에서 어느 심리학 교수가 했던 한 가지 실험이 떠오른다.


칠판이 있습니다. 지인의 이름을 스무 개 적어보세요.

다 쓰셨나요? 그 중에서 다섯 개를 지워봅시다.

자, 이제 그럼 다섯 개만 더 지워봅시다.

아직 열 개가 남았네요. 다섯 개만 더.

이제 다섯 개가 남았죠? 세 개만 더 지워봅시다.

두 개가 남았네요. 울지마요, 단순히 지우는 행위일 뿐이에요.

잔인한 그 교수는 마지막 한 마디를 덧붙였다.

하나만 더 지워볼까요?


이 실험의 피험자였던 한 여성은 남편과 아이의 이름을 남긴 채 울음을 그치지 못했다고 한다.


실험에 따르면 여러 개의 가치들이 나열되어 있고, 우리는 그것들의 위계를 정해야 한다는 교훈을 얻을 수 있다. (교수님한테 혼나니까 우는건 안된다) 우선순위를 설정해야 하는 이유는 사회구조적 문제, 자원의 한계 때문이기도 하지만, 궁극적으로는 철학의 문제에 가깝다. 뱁새A는 자신의 행복이 그 어떤 것보다 중요하다고 여기는 인간이다. 순간의 쾌락 혹은 황새들의 군무를 행복이라고 여기던 뱁새A는 그 어떤 장애물이 있어도 '행복'을 쟁취하기 위해 수모와 불의에도 굴하지 않았다. 그래서 뱁새A에게 '단순히 지우는 행위'는 '단순하지 않은' 공포로 다가왔다. (내가 좋아하는 한 작가님은 미지에 대한 공포와 무지에서 오는 불안을 구분해야 한다고 하셨으니, 이것은 공포보다는 불안에 가깝겠다)


왜 나는 문 너머에 내가 지운 단어를 대체해 줄 누군가가 혹은 무언가가 있을 것이라 기대했을까.

이 오만함에 대한 해답은 차차 찾아가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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