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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나다 가을 풍경

밴쿠버 - 비와 단풍이 섞여 만든 고요의 결

by 캐나다 마징가

가을이 되면 도시의 속도는 조금 늦춰진다.
아침마다 짙어지는 차가운 공기와 가을의 그림 같은 풍경들은, 어딘가로 바쁘게 달려가던 우리의 발걸음을 잠시 멈추게 한다. 밴쿠버의 가을은 화려하게 치장하거나 자신을 과장하지 않지만 파스텔톤의 풍경화처럼 조용한 방식으로 사람을 앉혀놓고, 오래 묻어둔 생각 하나를 꺼내보게 만든다.

도시 전체가 아름답게 물들어가는 이때, 생각의 결을 따라 걸으며 가을을 온전히 즐길 수 있는 장소들이 도시 구석구석에 자리한다. 자연과 도시, 오래된 것과 새로운 것, 과거와 현재가 교차하는 곳들이다.


1. 니토베 정원 (Notobe Memorial Garden at UBC)

UBC 캠퍼스 한쪽 모퉁이에 숨어 있는 니토베 정원에 들어서면, 단아한 일본식 정원을 마주하게 된다.

천천히 흐르는 연못, 얇게 쌓인 낙엽, 바람에 흔들리는 단풍의 그림자까지 이곳에서는 시간도, 바람도, 생각도 둥글게 흐른다. 서두르던 마음이 자연스럽게 낮아지고, 오래된 일들이 처음부터 그렇게 일어났던 것처럼 천천히 정리된다.

니토베 정원은 일본 학자 니토베 이나조를 기리기 위해 만들어졌지만, 정작 이곳의 힘은 그 인물의 역사보다 ‘서양에서 만든 동양의 미와 정신을 품은 공간’이라는 모순에 있다.
이질적인 것들이 한 공간에서 어색하지 않게 조화를 이루는 모습은, 우리가 살아온 방식과 닮아 있다. 진짜 조화는 ‘같음’에서 나오지 않는다. 다름이 서로를 해치지 않을 만큼 느슨해질 때 비로소 생긴다.

가을의 니토베는 말한다. "끝난다는 건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이야기가 온전히 닫히는 순간이다."

그래서인지 낙엽이 쌓인 모습이 쓸쓸하기보다 충만해 보인다.

https://botanicalgarden.ubc.ca/visit/nitobe-memorial-garden/

tempImagetoQuKo.heic (University of British Columbia)


2. 스탠리파크 할로우 트리 (Stanley Park - Hollow Tree)

스탠리파크 깊숙한 곳에는 700년을 버틴 시트카 스프러스 나무의 빈 몸뚱이가 서 있다.

할로우 트리(Hollow Tree)로 불리는 이 나무는 오래전에 이미 죽었다.

그러나 도시는 그 죽음을 버리지 않고 쓰러져 가던 나무를 지지대와 케이블로 세워두며, ‘이 흔적을 지키겠다’는 결정을 내렸다.

그 앞에 서면 묘한 감정이 든다. 밴쿠버 도시의 탄생부터 성장을 묵묵히 지켜오다 생을 다한 고목을 왜 굳이 보존하기로 결정했을까? 왜 사람들은 이 텅 빈 껍데기 앞에서 수많은 사진을 남기고 지나간 추억들을 이야기할까?

아마도 살아 있는 것, 화려한 것들만 살아남는 현실 속에서, ‘흔적의 가치’를 지켜내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우리가 기억하는 것들 대부분은 사실 이미 지나간 일들이다. 그 지나간 것들이 현재의 우리를 만드는 것이기에 이렇게 지키는 방식도 필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눈에 보이는 것만이 삶을 지탱하는 것은 아니기에.... 낙엽은 떨어졌지만 그 세월의 흔적은 뿌리 깊게 남아 있다. 우리는 그 흔적 위에서 새로운 계절을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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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llow Tree (Tourism Vancouver)


3. 퀸 엘리자베스 파크 (Queen Elizabeth Park)

퀸 엘리자베스 파크의 한가운데 위치한 Quarry Garden은 과거에 돌을 캐던 채석장이었다.
깊이 파헤쳐지고, 상처 난 땅 위에 새로운 아름다움을 만들어냈다.

가을의 퀸 엘리자베스 공원을 내려다보면, 단풍이 채석장의 벽면을 따라 부드럽게 물든 모습을 볼 수 있다. 깊이 파인 지형은 오히려 빛을 머금고, 색은 더 진해지고 가을빛이 더 고요하게 내려앉는다.

상처투성이인 우리의 삶 속에서 누군가는 그 상처를 드러내고 누군가는 감추고 살아간다.
그러나 가을은 상처를 숨기지 않고 오히려 활짝 드러낸다.

상처가 있다는 사실이, 우리를 더 깊게 만든다고 이야기한다.

밝음만 있는 곳에서는 깊이가 생기지 않는다.
고난이 있어야 회복이 있고, 공백이 있어야 채움이 있다.
가을의 채석장은, 그 사실을 조용히 이야기해 주고 있는 듯하다.

tempImagegdtqZm.heic Queen Elizabeth 공원 내 식물원


4. 린 캐니언 (Lynn Canyon in North Vancouver)

노스쇼어의 숲은 어떤 계절보다 가을에 가장 온전히 제 모습을 드러낸다.
비에 젖은 흙냄새, 차가운 강물, 이끼가 덮인 바위.
린 캐니언은 상업적 장식이 거의 없는 숲이기에, 도시의 소음이 닿지 않는다.

이곳에서는 걷는 것만으로 마음이 정리된다.
사람이 적은 날, 고요함 속에서 우리는 비로소 더 깊고 더 진정한 자신을 듣게 된다.

린 캐니언의 가을은 질문을 던지지 않는다.
대답도 요구하지 않는다.
대신 우리가 불필요하게 붙잡고 있던 것들을 자연스럽게 내려놓게 만든다.
그 침묵이 주는 힘은 생각보다 크다.

tempImageREI9ML.heic Twin Fall at Lynn Canyon


5. 개스타운(Gas Town in Vancouver)

가을의 개스타운은 특히 독특하다.
노란 단풍이 붉은 벽돌 건물 사이로 떨어지면, 도시가 갑자기 한 세기 전의 모습으로 변한다.
증기 시계의 하얀 연기가 차가운 공기와 섞이며 만들어내는 풍경은, 마치 다른 두 시대의 시간이 겹쳐지는 듯한 느낌을 준다.

밴쿠버의 시작은 크지도 화려하지도 않은 이 작은 거리에서 비롯되었다.

가을의 개스타운을 걸으면 사람들이 남긴 발자국이 시간 위에 층층이 쌓여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우리가 현재라고 믿는 것도 사실은 오래된 기억의 연장선일 뿐이다.

그래서 가을의 개스타운은 오래된 이 거리 위에서 피어난 화려한 도시를 지긋이 바라보는 듯하다.

과거를 지우지 않는 도시만이, 미래를 설계할 수 있다는 어느 건축가의 말이 떠오른다.

tempImageXdKaXS.heic Steam Clock at Gastown

가을은 무엇을 주기보다는 주변을 바라보는 방식을 바꿔준다.

그리고 이 도시에서의 가을은, 우리가 놓치고 살았던 생각들을 다시 꺼내 조용히 바라보게 한다.

삶도 계절처럼 흘러간다.
지나가는 것들을 무서워하지 말고, 남아 있는 것들에만 집착하지도 말며, 상처 난 자리에서 피어난 것들을 외면하지 말자.

밴쿠버의 가을은 그렇게 익어가는 삶의 방식을 가르쳐주기에 너무 감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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