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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하랑 Nov 23. 2023

왜 미운 아이 떡 하나 더 줄까?

속담 중에 미운 아이 떡 하나 더 준다는 말이 있다. 나는 이 말을 좋아하지 않는다. 왜 미운 아이에게 떡 하나를 더 줄까? '미운 아이를 잔소리하고 구박하면 미운 아이가 더 미워지지만, 잘해주고 더 관심 가져주면 나쁜 마음도 안 쌓이고 미안함에 미운짓을 안 한다.' 뭐 이런 이유에서란다.

하지만 미운 아이 떡 하나 더 줄 때 옆에 있던 착한 아이는 괜히 가만히 있다가 떡 하나 덜 먹게 된다. 그럼 그 아이는 '떡을 더 먹고 싶으면 미운 짓을 해야 되는구나' 이렇게 생각 안 할까?


자녀를 훈육할 때도 비슷한 상황이 있다. 형제, 자매 간의 싸움이 잦아지면 부모는 아이들이 무엇 때문에 싸우는지보다 아이들이 싸우는 자체에 더 스트레스를 받는다. 좀 그만 싸워라, 사이좋게 지내면 안 되니, 너희는 매번 왜 그러냐.. 그리고 이럴 때 평소 말을 잘 듣던 착한 아이를 혼내는 경우가 많다. ‘넌 안 그러던 애가 뭘 이런 걸로 동생(또는 언니)과 싸우니?', '쟤는 원래 예민하잖아, 네가 동생(또는 언니)이니 참아줘야지'

나 같은 경우도 그랬다. '엄만 왜 맨날 언니 편만 들어..', 그러다가 또 생각했다. '그럼 평소에 말 안 들으면 나도 나 하고 싶은 대로 해도 되겠네?'

문제는 어른이 된 나도 딸 둘을 키우면서 안 그래야지 하면서 똑같이 그러고 있다는 것이다. 'ㅇㅇ아, 제발 네가 좀 져주면 안 돼? 동생은 어리잖아.' 내가 잘못을 하기 전에 알면 좋겠다만 늘 아이에게 화는 낸 뒤 잘못된 육아를 대물림하는 것 같은 후회가 밀려오니 나도 문제다. 더 늦기 전에 바로잡으려 애써본다. 'ㅇㅇ이가 많이 참아줘서 고마워. 엄마가 ㅇㅇ이한테만 자꾸 참으라고 해서 미안해.'  


진짜 미운 아이 떡 하나 더 주는 거 아니다. 옛날에는 그래도 되었을지 모르지만 이제는 그러지 말자. 아니, 애초에 속담이 왜곡되었는 건지도 모른다. '떡 하나 더 얻어먹으려면 미운 짓을 해라'가 원래 의도였는지도. 쓰고 보니 그런 말도 있는 것 같다. ‘우는 아이 젖 준다’였나..?

진상이 가만히 있는 사람보다 떡 하나 더 먹을 수 있게 되면 안 된다. 호의가 계속되면 권리인 줄 안다고 괜히 '목소리 큰 놈이 이긴다.'는 말이 생긴 게 아니겠지만 그건 정의롭지 못한 것이다.

미운 행동은 야단쳐야 되고 못하게 해야 한다.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지 떼를 써도 울어도 달라지면 안 된다. 어쩌다 미운짓 하는 아이 떡 하나 더 주게 되었다면 착한 아이에게는 떡 두 개 더 챙겨 주자. 착한 아이는 미운 짓 할 줄 몰라서 안 하는 게 아니다.




사실 글을 쓰는 지금도 혼란스럽다. 살다 보니 세상은 착한 아이를 그렇게 챙겨주지 않는데, 차라리 아이에게 네가 원하는 것을 너도 큰소리로 요구하라고, 떼를 쓰라고, 양보하지 말라고 가르쳐야 할까? 가끔 이해심 깊은 사람이 늘 이해만 하고 양보만 하며 사는 것 같아 손해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미운 아이라고 진상 어른이라고 무시하고 공평하지 않게 대하자는 건 아니지만 굳이 더 잘해줘야 할까? 난 미운 아이를 보듬어 줄 만큼 마음 넓은 어른은 아닌데.


요즘 큰 아이 친구들이 하교하면서 동생까지 데리고 집에 놀러 와서 저녁 먹기 전까지 놀다가 간다. 아이의 친구가 부모들끼리 연락이나 선약 없이 집에 놀러 오는 경우는 처음이라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몰라 우물쭈물하는 사이에 우리 집이 그들의 아지트가 되어버린 것이다. 같이 오는 친구의 동생 중에 좀 얄미워서 안 왔으면 하는 아이가 있다. 저녁 준비를 하다가 잠시 한눈을 팔면 식탁 위 반찬을 손으로 쏙쏙 집어 먹기도 하고, 1층이나 2층 거실에서만 놀라고 해도 안방에 들어가서 침대에서 뛰어 이불을 엉망으로 만들어 놓기도 한다. 뭐라고 해도 그때뿐이다. 지켜보고 있지 않으면 하지 말라고 하거나 만지지 말라고 한 것들을 몰래 꼭 건드리고 간다. 내가 그 아이에게 간식을 더 챙겨줄 수 있을까?


개인적으로는 나는 미운 아이 떡 하나 더 주기 싫다. 착한 아이는 예쁨 받고 미운아이는 외면받는 세상을 원한다. 그런데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든다. 여기에 '밉다'의 주체는 무엇일까?

미운 감정은 주관적이다. 아이가 미운 것이 아니라 내가 아이를 미워한다는 말이다. 내가 한 아이의 행동을 밉게 보고자 하면 한 없이 미워지고 예쁘게 보려 하면 한 없이 예쁘게 보인다. 그렇다면 결국 미운 아이 떡 하나 더 주라는 말은 결국 밉더라도 애정을 가지고 보라는, ’떡 하나 더 주는 행위‘가 아닌 ’더 관심 주고 예뻐하라‘는 내 마음가짐에 초점을 두고 하는 말이 아닐까? 아이를 미워하는 행위는 그 아이가 아니라 결국 내 마음이 하는 것이기 때문에.


잠시 후면 또 아이가 하교할 시간이다. 옛말에 틀린 말은 없다던데, 속는 셈 미운 아이에게 떡 하나 더 줘 볼까 싶다. 그로 인해 내 마음이 그 아이도 미워하지 않고 예쁘게 바라볼 수 있다면.


미운 아이 떡 하나 더 주면 정말 예뻐지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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