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5월 26일. 미국 보스턴 모처에 있는 대학원 석사과정을 졸업했다. 취업이 확정되지 않은 졸업은 한국이나 미국이나 맘 한편에 찝찌름함이 남아있는 마냥 행복하지 않은 졸업식이다. 특히, 외국에 있어보니 학생 신분이 끝나는 순간부터, 내가 합법적으로 거주 할 방안을 당장 생각해내지 못하면 불법체류자가 돼버리는 엄중한 현실이 턱끝까지 다가왔다. 미국의 경우 졸업 후 1년이라는 직업훈련비자(OPT)가 주어진다. 그런데 이 기간 중 90일을 취직을 못하면 취업 의사 혹은 취업 능력이 없는 것으로 간주하고 미국을 나가야 한다. 작년 5월 26일 나는 졸업을 할 때 백수 상태였다. 돈은 떨어지고, 직업이 없으니 신분도 불안정했다. 심지어 직업이 없으면 건강 보험이 없으므로 병원 진료도 못 받는다.
그로부터 1년 후, 모교 근처에 번듯한 직장이 생겼다. 어제 여상하게 출근을 하는데, 익숙한 학위복을 입은 사람들이 길거리에 보여서, 졸업식을 하는 날이란 걸 알았다. 한 번은 과 졸업식을 하고, 이틀 뒤 대학 전체 졸업식을 한다. 어제는 과 졸업식 날인 것 같았다.
길거리에 학위복을 입은 사람들과 내가 출근하는 순간이 겹치며 내가 지난 이 1년 동안 엄청나게 많은 변화와 성장이 있었다는 게 새삼스럽게 느껴졌다. 무엇보다 내가 지금 이 자리에 이 사람들과 있음에 진심으로 감사하게 느껴졌다.
미국에 오기 전 모교 선배님께서 훌륭한 멘토 교수님을 추천해주셨다. 멘토 교수님은 인품, 실력 모두 뛰어난 분이고 그분의 제자들은 모두 잘 돼서 유수의 대학에서 교수를 하고 있다.
나는 이 분의 추천서를 받아, 졸업 후 3달 만에 남들은 다른 곳에서 몇 년씩 경력을 쌓고 겨우 들어오는 곳에 실력도 없이 들어왔다. 미국은 늘 추천인을 확인하기 때문에, 이 분의 도움이 없었다면 일찌감치 짐 싸고 떠났을 것이다. 취업하기 전까지 3달은 살얼음 판이었다. 한국에 돌아갈지 말지 하루에도 수십번씩 생각했다.
실력도 없이 취직을 해서 한참을 헤매는 기간을 거쳤다. 불안장애가 심해진 것도 이 힘든 시간의 소산물이다. 입사 후 9개월 만에 엊그제는 회사에서 발표가 있었다.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매우 흥미로운 결과물이었고, 나 역시 자신감과 확신이 있던 발표였다. 드디어 보스에게도 사수에게도 칭찬을 들었다. 내가 일단 조금씩 적응이 되고 나니 이보다 좋을 수 없는 곳이다. 연봉도 높고, 재택근무로 일하여 출퇴근이 자유롭고, 상사들도 나이스하다.
영어도 네이티브만큼은 아니지만, 이제 식당에서 밥을 시켜먹을 정도는 되었다. 게다가 보스턴이라는 미국의 가장 좋은 도시 중 한 곳에서 살고 있다. 이제 보스턴도 지리도 익숙하고, 사람들도 익숙하다. 어디서 뭘 먹어야 하고, 사야 하고, 어느 계절의 어느 장소가 가장 아름다운지 이제는 안다. 찰스강의 가장 아름다운 뷰를 보려면 MIT로 가서 남쪽을 바라봐야 한다. 코엑스처럼 쇼핑을 하고 싶으면 프루덴셜 타워로 가면 된다. L.A.Burdick은 하버드 대학교 근방 최고의 핫초콜릿 가게다.
이처럼 미국에 와서 좋은 사람들은 만났으니 나는 참 운이 좋은 사람이다. 그러나 이곳이 내 나라가 아니고 나의 가족과 오랜 친구들이 이곳에 없다는 것을 잊고 살 수는 없다. 문득 문득 외로움이 솟아 오른다.
詩. 윤동주
계절이 지나가는 하늘에는
가을로 가득 차 있습니다.
나는 아무 걱정도 없이
가을 속의 별들을 다 헬 듯합니다.
가슴속에 하나 둘 새겨지는 별을
이제 다 못 헤는 것은
쉬이 아침이 오는 까닭이요.
내일 밤이 남은 까닭이요.
아직 나의 청춘이 다하지 않은 까닭입니다.
별 하나에 추억과
별 하나에 사랑과
별 하나에 쓸쓸함과
별 하나에 동경과
별 하나에 시와
별 하나에 어머니, 어머니
...
이네들은 너무나 멀리 있습니다.
별이 아스라이 멀 듯이,
어머님,
그리고 당신은 멀리 북간도에 계십니다.
미세먼지 한 점 없이 별과 달로 반짝이는 보스턴의 밤 하늘을 보면 고등학교 국어 시간에 배운 윤동주의 별 헤는 밤이 저절로 떠올랐다. 북간도에 계시는 어머니를 떠나 경성에서 유학하던 윤동주의 시를 되뇌는 날이 많았다. 가족과 고향 대한 그리움은 100년전이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다.
나는 엄마랑 영상통화라도 하는데 윤동주는 엄마가 얼마나 보고 싶었을까?
직장에서 처음으로 2주간의 긴 휴가를 얻었다. 미국에 오고나서 처음으로 한국행 비행기를 탔다. 떡볶이, 곱창, 닭갈비를 먹으며 2주는 빠르게 흘러갔다. 다시 인천으로 와서 미국행 비행기를 탔다. 일부러 '비행기를 탔다'는 표현을 쓰는 것은, 미국으로 출국했다고 해야할지, 미국으로 돌아왔다고 해야할지 나 스스로 헛갈리기 때문이다.
미국 동부는 한국보다 13시간이 느리다. 그래서 일요일 아침에 비행기를 타면 시차 때문에 일요일 아침에 보스턴에 도착한다. 14시간이라는 긴 비행시간을 지나니 갑자기 세상이 바뀌어 어질어질하다.
서울의 한강은 보스턴 찰스강(Charles river)에 비하면 거의 바다 수준이다. 두 강은 강변의 풍경이 너무나 다르다. 우리나라는 수두루 빽빽 아파트와 높은 건물이 가득 차 있는데, 보스턴은 리버 뷰는 상대적으로 여유롭다.
아무리 뉴욕 타임스퀘어가 붐빈다고 해도 서울 홍대에는 못 미친다.
보스턴 지하철은 스크린 도어가 없고, 불도 어둑어둑하고 낡았다. 보스턴 지하철은 생긴 지 100년이 넘었으니 어쩔 수 없는 것 같다.
우리나라는 손바닥만 하게라도 빈 땅이 있으면 건물을 짓거나 그도 아니면 먹는 작물을 심는데, 미국 사람들은 땅이 넓어 그런지 아름답지만 먹을 수 없는 꽃들을 정성스레 가꾼다.
나에게 한국과 미국 어디가 더 좋냐고 물으면, 대답을 할 수가 없다. 나름대로 장단점이 존재한다. 어디가 너의 집이냐고 물어도 역시 바로 대답을 할 수가 없다. 나의 마음의 집은 당연히 한국에 있는 우리 집이다. 하지만, 집의 정의를 ‘주로 잠을 자는 곳’ 혹은 ‘주 생활터전’이라고 하면 하버드 대학교 근방에 위치한 40년 된 낡은 아파트일 것이다.
보스턴에 돌아와서, 한국에서 시차 때문에 제대로 못 잤던 밀린 잠을 자고, 다시 컴퓨터 앞 일상으로 돌아왔다. 다음 날인 월요일에 사무실에 출근하니 갑자기 언어가 바뀌었다. 익숙한 한국어는 들리지 않고 불편한 영어가 다시 들린다. 금발, 흑발, 꼬불거리는 머리, 까만 피부, 창백한 피부, 파란 눈, 회색 눈. 다양한 인종과 국적의 사람들이 한 공간에 있다는 게 새삼스럽다. 이렇게 수많은 다른 점에도 불구하고 외국 땅이 여행이 아니라 일상이 되는 순간, 그저 똑같이 사람 사는 곳일 뿐라는 걸 나는 깨달았다. 다만 디테일이 좀 다를 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