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에서 영어는 권력이다. 대학을 갈 때도, 공무원 시험을 봐도, 대기업에 들어가려고 해도, 대학 편입시험을 봐도, 로스쿨에 가려고 해도, 영어 성적을 본다. 한국에서 영어는 언어가 아니라 ‘얼마나 똑똑한지 혹은 열심히 공부하는지' , 더 나아가 '학원비 낼 돈과 시간이 있는지', '부모님이 유학 보내줄 돈이 있는지'를 평가하는 수단이 되었다. 그래서 그런지 미디어에서는 영어를 잘하는 사람을 신격화한다. 외국에서 살다 온 연예인이 나오면 영어로 아무 대화나 해보라고 시켜보고, 청중들로부터 ‘우와~’ 하는 반응을 이끌어 낸다.
나는 늘 외국인과 영어로 유창하게 대화하는 사람을 동경했다. 이태원을 지나가면 외국 사람과 웃으며 이야기하는 사람이 너무나 부러웠다. 그래서 영어 공부를 죽어라 하거나, 어학연수를 가면 어느 순간 ‘짠!’하고 귀가 뻥 뚫리고, 입도 뻥 뚫려서 외국인과 쏼라쏼라 떠드는 마스터 레벨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미국으로 유학 오기 전까지 나의 새해 다짐 리스트이다.
1. 영어 마스터하기
2. 다이어트
3. 돈 모으기
미국에 온 지 1년 반이 되던 올해 초, 작심삼일로 근 10년 동안 변함없던 새해 다짐 목록이 갱신되었다.
1. 영어마스터하기
2. 다이어트
3. 돈 모으기
영어 마스터하기를 드디어 목록에서 지웠다!
미국으로 유학 와서 나의 영어 발전 단계는 다음과 같다.
초기 2-3개월
상대가 하는 말을 거의 못 알아들음. 내가 하고 싶은 말은 한국어를 머릿속으로 번역하느라 천천히 말함. 문법이 자주 틀림.
초기 3-6개월
조용한 곳에서 일상대화는 어느 정도 알아듣기 시작함. 특히 가게, 식당 등에서 매번 하는 말이 있으므로 눈치껏 알아듣기 시작. 짧은 문장은 영어로 생각하기 시작.
초기 6개월-1년
하이, 하우아유, 아임쏘리 등 간단한 문장은 무의식적으로 나오기 시작. 라디오처럼 깔끔하게 이야기하면 어느 정도 들리기 시작. 웅얼거리며 빠르게 하는 말이나 특히 농담은 알아듣기 힘듦. 전문적인 내용은 알아듣기 힘듦.
1년-
웃고 떠드는 일상적인 간단한 대화는 가능. 말하기 능력은 한국어의 20프로 수준. 말할 때 문법은 크게 신경 안 씀. 심도 깊은 대화는 상대방의 인내심이 필요하고 준비를 해야 함. TV나 미드가 예전보다 잘 들림. 영어 자막을 켜면 더 잘 이해 가능 하지만 편하지 않음. 전화도 덜 무서워지기 시작. 시끄러운 장소에서 웅얼 대며 말하는 소리는 여전히 잘 안 들림.
이렇게 시나브로 가랑비에 옷 젖듯이 영어에 노출되고 나면, 어느 순간 미국인들과 웃고 떠드는 나 자신을 발견하게 되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나의 영어 능력은 한국어 능력의 20-30프로 정도밖에 안 되기에, 하고 싶은 말을 다 못 하니 답답함을 느끼고 종종 멍청하게까지 보이는 모습에 속상하기도 하다.
그리고, 막상 미국에 오면 영어 노출빈도는 늘지만, 영어를 공부할 시간은 없다. 밖에서 영어를 쓰기 때문에 신경이 곤두서고 지쳐서, 집에 오면 한국어로 된 컴포트 존(comfort zone)을 저절로 찾게 된다. 물론, 영어에 반강제로 노출되기 때문에 영어가 안 늘 수가 없지만, 그 한계선이 분명히 존재하는 점은 여전히 나에게 숙제이다.
어린아이가 어느 날 하루아침에 성인처럼 말하는 건 불가능하다. ‘100일 만에 원어민처럼 말하기’는 사람들을 현혹하기 위한 광고 문구일 뿐이란 걸 깨달았다. 아쉽지만 내가 영어를 마스터해서 새해 다짐 목록에서 지워진 것이 아니다. 영어 마스터하기라는 것은 나의 환상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달았을 뿐이다. 그냥 하루하루 익숙해지고 하루하루 조금씩 더 낫게 말하고 듣는 내가 존재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