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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류귀복 Feb 17. 2024

21. 천재작가, 출간 큐패스

무명작가 에세이 출간기


"천재작가는 어느덧 '반OO 제왕'이 되었다."


위 문장을 읽은 뒤, 가장 먼저 무엇이 떠올랐는지 생각해 보자. 시즌 1, 2, 3가 모두 흥행에 성공한 '반지의 제왕'인가? 그렇다면 실망이다. 지금까지 당신은 천재작가의 글을 집중해서 읽지 않았다. 대충 읽은 티가 이렇게 확 난다. 볼펜으로 손등을 '탁' 소리가 날 정도로 한 대 때려주고 싶지만 구독이 끊어지면 안 되니 참는다. 출판계약서에 서명을 남기고 싶다면, 어서 빨리 앞으로 돌아가 프롤로그부터 성심성의껏 다시 읽고 와라.

"작가에게 대충보다 해로운 벌레는 없다."

열혈 독자들은 이미 답을 알고 있다. 지금 화면을 보며 미소 짓고 있는 작가님! 당신을 생각하니 내가 다 흐뭇하다. 그렇다. 정답은 '반기획 제왕'이다. 오늘은 3번째 반기획 제안에 관한 이야기다. 지겹지 않냐고? 어쩔 수 없다. 세상에는 다양한 종류의 반기획이 존재한다. 미리 알고 있어야 올바른 대응이 가능하다. 건강을 유지하기 위해 B형 간염과 독감, 대상포진, 폐렴 등의 다양한 백신을 골고루 맞는 것과 같은 이치다. 심지어 무료다. 감사한 마음으로 읽길 바란다.




"오랜만에 원고 투고 3일 만에 연락이 온다."

금요일에 원고를 발송한 뒤, 월요일에 바로 회신을 받는다. 빠른 답신은 늘 기대감을 더해준다. 심지어 출판사 이름도 반갑다. <제10회 브런치북 출판 프로젝트>에 참여한 출판사다. 오랜만에 입이 쩍 벌어져서 쉽게 다물어지지가 않는다. 치과 진료를 예약할 뻔했으나 다행히 입이 곧 다물어진다. 이토록 귀한 이메일을 독자들을 위해 아무런 조건 없이 공개한다. 짝! 짝! 짝!


OOO 출판사의 편집장 이OO입니다.
보내주신 귀한 원고 잘 받았습니다.
류 선생님 말씀처럼 OOO과를 다룬 도서는 없었던 터라 흥미롭게 읽었습니다.
병원 이야기와 작가 치료의 이야기가 어우러졌는데 병원 에피소드의 비중을 높인다면 보다 재미있는 책이 되지 않을까 생각했습니다.
OOO 에서는 [OO OOOOO] 출간을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다만, 출간에 따른 비용 손실을 출판사가 전적으로 감당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어
OOO에서 실시하고 있는 '상생 공유 출판 프로그램' 형식을 안내해 드리니 살펴보시고
같이 책 작업을 하실 의향이 있으시면 답 주시기 바랍니다.

현재 출판 시장이 상당히 어려운 상태라 드리는 제안이니 오해 없이 받아들여 주시면 좋겠습니다.
그럼 검토 후 편안하게 의견 주시기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편집장 이OO 드림


오해는 당연히 없다. 열린 마음으로 파일을 열어 확인해 보니 합리적인 제안이 분명하다. 출판 비용 1,700만 원 중 450만 원만 저자가 부담하고, 나머지 1,250만 원은 출판사가 부담하겠다고 한다. 상생 공유라는 이름에 딱 어울리는 완벽한 분담 비율이다. 특별한 혜택도 눈길을 끈다. 이 프로그램을 통해 진행하는 원고는 우선 출간 도서로 지정되어 1년 이내 책이 나온다. 저자 증정본도 10부가 아닌 50부를 준다. 인심이 아주 하다. 놀라긴 아직 이르다. 화룡점정으로 선인세도 지급한다. 와우! 이것저것 계산해 보니 실부담금은 겨우(?) 300만 원 정도다. 직장 튼튼한 40대 가장에게는 꽤나 만족스러운 제안이다. 적당한 때에 좋은 조건으로 출간 기회를 잡은 듯하여 어깨가 막 들썩인다.




"천재작가는 설렘을 가득 안고 아내에게 달려가 기쁜 소식을 전한다."


열심히 설명을 듣던 아내가 갑자기 "출간에도 Q-PASS가 있어?"라고 묻는다. 어라? 이 무슨 황당한 질문인가. 당연히 없다. Q-PASS는 놀이동산에서 자본으로 시간을 사는 행위다. 성스러운 출판계에 그런 게 있을 리 없다. 아내가 뭔가 큰 착각을 한 것이 분명하다. 차분히 설명을 듣던 아내가 "그래, Q-PASS 맞네"라고 말한다. '브런치북 출판 프로젝트' 응모 후에 선정되는 과정 없이, 원고 투고 후 바로 출간하는 것을 아내는 Q-PASS로 이해한다. 그런데 뭔가 이상하다. 이야기를 하면 할수록 아내의 말에 힘이 더 실린다.


"천재작가는 아내의 손을 잡고  놀이동산의 추억이 떠오른다."


선선한 가을날, Q-PASS를 이용해 대기 없이 바로 올라탄 우든 롤러코스터는 한참을 기다려서 탑승했을 때와는 분명히 다른 느낌으로 기억에 남는다. 쉽게 얻은 것은 귀한 줄 모르는 인간의 본성 때문이다. 학창 시절에 세뱃돈을 받으면 금세 사라지는 것과 같은 이치다. 출간도 마찬가지다. 돈으로 기회를 사고 나면 다음에는 어떨까? 편리함에 익숙해져 글감 대신 자본을 모으지는 않을까? 작가가 되겠다는 본래의 목적은 사라지고, 책을 내기에만 혈안이 되지는 않을까? 이런저런 생각으로 머릿속이 점점 복잡해진다.


"욕심은 나지만 냉정하게 생각한다."


출판사에서 보낸 그린라이트가 2번, 반기획 제안이 3번이다. 그렇다면 원고의 잠재력은 충분하다. 때가 맞지 않았을 뿐이다. 이쯤 되니 반기획 출간은 내가 원하면 언제든지 가능하리라는 확신을 얻는다. 출판사가 탐이 나긴 하지만 아닌 건 아닌 거다. 돈으로 꿈을 살 수는 없다. 원고에 기획안이 더해지니 이름 있는 출판사에서 탐을 낸다. 아직 9개 출판사가 남아 있으니 조금만 더 기다려 보기로 한다.




"영화 <리바운드>의 여운이 길게 이어진다."

한 달을 기다려 보고, 그래도 안 되면 원고를 대폭 수정하여 다시 투고할 계획이다. 잦은 투고 이력은 선입견을 줄 수 있으니. 센스 있게 새로운 메일 계정을 사용하여 발송을 계획한다. '실패' 다른 이름은 '과정'이다. 중요한 사실을 기억하고 각오를 단단히 한다. 여차하면 처음부터 다시 시작면 된다. 욕심을 버리니 마음이 한결 가벼워진다. 그로부터 1시간 뒤, 새로운 메일이 도착을 알린다.

"원고 투고가 100번을 넘어가니, 거절 메일도 반갑다."

이제는 익숙하다. 아무런 기대 없이 습관적으로 본문을 확인한다. 어라? 그런데 이번에는 느낌이 많이 다르다. 그린라이트의 녹색이 아주 진하다. <아무튼, 투고>를 집필할 정도로 투고 경험이 쌓인 시점이다. 촉이 왔다. 천재작가에게 출간 계약의 기적이 일어나기 일보직전이다. 손가락이 부들부들 떨려서 스마트폰의 버튼을 누르기가 힘들다. 눈치 빠른 심장은 온 힘을 다해 빠르게 움직이며 세리머니를 준비한다. 맞다. 이번에는 진짜 계약이다.


이어지는 이야기가 궁금하겠지만 어쩔 수 없다. 감동을 배가 시키기 위해 이쯤에서 끊는다. 어쩌면 마지막 기다림이 될 수도 있으니 즐겁게 기다려주길 바란다. 팡파르 준비하고, 며칠 후에 만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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