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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Zeit Jan 07. 2024

하루아침에 실업자가 된 세계 최고의 워치메이커

제니스 엘프리메로 & 샤를 베르모 이야기

2016년에 알파고가 등장했을 때만 해도 네이버에서 AI를 검색하면 조류인플루엔자(Avian Influenza)가 나왔습니다. 하지만 불과 7년이 지난 2022년 말 발표된 GPT를 통해 AI가 생각보다 많은 일을 할 수 있다는게 알려지면서 사람들은 충격을 받았고, 어떤 직업이 먼저 사라질 것인지를 걱정하 시작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제니스의 샤를 베르모(Charles Vermot)라는 워치메이커가 떠올랐습니다. 그는 세계에서 가장 복잡하고 정확한 무브먼트를 만들어낸 최고의 기술자였음에도 불구하고 시계시장이 기계식에서 전자식으로 바뀌는 과정에서 하루아침에 쓸모없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사실 기술이 발전하면서 기존의 기술을 기반으로 한 기업과 공장, 근로자들이 도퇴되는건 흔한 일입니다. 하지만 이야기가 거기서 끝나지 않았기 때문에 이 이야기가 지금도 의미가 있을 것 같습니다.

 

최초의 현대식 매뉴팩쳐


샤를 베르모를 이야기 하기 위해서는 그가 일했던 회사인 제니스 얘기를 먼저 해야합니다.


제니스(Zenith SA)는 1865년 조르주 파브르 자코(Georges Favre-Jacot)가 르로클(Le Locle)에 설립한 GFJ (Georges Favre-Jacot & Cie)라는 회사에서 시작됩니다.     


당시에는 전국에 흩어진 장인들이 각각의 독립된 작업장에서 부품을 만들고, 이를 모아 조립공장에서 시계를 조립하는게 일반적인 시계생산 방식이었습니다. 하지만 이는 작업의 비효율성을 초래했고 시계의 정밀도를 떨어뜨리는 원인이 되었습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GFJ는 시계생산에 필요한 모든 부품을 자체 생산하고, 부품을 표준화하여 생산효율성을 높였으며, 시계 제조의 전 과정을 한 공장에서 곳에서 진행하는 최초의 현대식 매뉴팩쳐를 만들었습니다. 이 개념을 Single roof라고 부르며, 지금까지도 제니스는 무브먼트를 비롯해서 시계의 95%를 자체 제작하고 있다고 합니다.     


GFJ


당시 2천여명의 워치메이커들이 한 공간에 모여 일하고 교류할 수 있는 환경은 오늘날로 따지면 구글캠퍼스 같은 개념이었습니다. 이는 워치메이커들간의 시너지를 발생시켜 연구개발을 촉진했고, 다른 브랜드보다 뛰어난 기술적 성과들로 나타났습니다.     


1900년에 파리 만국박람회에서는 GFJ가 출품한 Zenith 칼리버가 그 기술적 우수성을 인정받아 그랑프리를 수상합니다. 이를 시작으로 제니스는 지금까지 2,333개의 기술 관련 상을 받았고 300여 개의 특허, 600여 가지의 무브먼트를 만들었다고 합니다.     


1900년에 그랑프리를 수상한 Zenith 칼리버


원래 제니스라는 이름은 당시 개발된 무브먼트 이름이며, 무브먼트에 보석이 박혀있는 모양이 밤하늘의 별과 같다 하여 붙여졌다고 합니다. 이 무브먼트가 여러 상을 받고 유명해지자 조르주가 은퇴한 1911년부터 사명을 제니스로 변경했습니다.     


조르주는 1843년생이었는데, 68세정도 되는 1911년 은퇴해서 1912년 완공된 Villa Favre-Jacot에서 살다가 1917년 사망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눈에 띄는 건 그가 여생을 보낸 이 저택이 20세기 최고의 건축가이자 현대건축의 아버지로 꼽히는 르꼬르뷔지에(Le Corbusier)의 초기작품이라는 점입니다.     


르꼬르뷔지에가 설계한 Villa Favre-Jacot


당시 25세의 르꼬르뷔지에는 그때까지 실적이 2~3채밖에 없는 병아리 건축가였는데, 이런 그의 재능을 알아보고 여생을 보낼 집을 맡겼던 걸 보면 조르주의 안목이 얼마나 대단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어느 집단이든 설립자의 생각과 철학은 그 집단의 DNA가 되는 경향이 많은데, 제니스의 경우는 Single roof, 기술에 대한 집착, 장인정신 등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1969년, 엘프리메로의 탄생


1962년, 제니스는 창립 100주년이되는 1965년을 목표로 역사상 최초의 오토매틱 크로노그래프 무브먼트(이하 ACM) 개발에 착수합니다.


당시 ACM을 개발한다는 것은 오늘날 신형 반도체를 개발하는 정도의 일이었습니다. 시간을 측정하는 기능인 크로노그래프 자체가 굉장히 복잡한데 여기에 손목의 움직임으로 태엽을 자동으로 감아주는 오토매틱 기능까지 더하려면 기술적으로 해결해야 할 일들이 많았습니다.


제니스 엘프리메로 무브먼트



그들은 기존 무브먼트에 크로노그래프 모듈을 추가하는 쉬운 방법 대신 1/10초까지 측정할 수 있는 완전히 새로운 크로노그래프 전용 무브먼트를 만든다는 목표를 설정했습니다.


그런데 목표가 너무 높아서인지 100주년까지 작업을 완료하지 못했고, 이 소문을 들은 호이어(Heuer), 브라이틀링(Breitling), 해밀턴(Hamilton) 등이 연합한 크로노매틱 그룹(Chronomatic Group)과 일본의  세이코(Seiko)가 ACM개발 경쟁에 뛰어들었습니다.


크로노매틱 그룹은 1965년에 업체들간 연합을 시작하여 1966년부터 개발에 착수했습니다.


세이코는 도쿄올림픽이 열린 1964년에 수동 크로노그래프 무브먼트를 처음 선보였는데, 1965년에 바로 ACM개발에 뛰어들었습니다.


당시의 치열한 분위기를 엿볼 수 있는 이야기들이 있습니다.


1969년1월10일, 제니스는 세계 최초의 완전 통합형 고진동 ACM인 엘프리메로(El Primero) 3019 PHC가 곧 출시될거라고 발표했습니다.


이에 충격을 받은 호이어의 CEO 잭호이어는 3월3일 제네바와 뉴욕에서 동시 기자회견을 열어 칼리버 11(Calibre 11)이 곧 출시할 것이라고 발표했습니다.


당시 3월 바젤에서는 바젤월드의 전신인 바젤 스위스 견본전시회(Schweizer Mustermesse Basel)가 열려 모든 시계브랜드들이 기술을 뽐내고 있었는데, 이 자리에서 세이코 사장인 쇼지 핫토리가 잭호이어를 찾아왔다고 합니다.


그는 인사를 건네며 얼마 전 기자회견때 발표한 Calibre 11의 기술적 혁신에 대해 축하를 해줬습니다.


그런데 Seiko는 같은 시간에 이미 박람회에서 6139무브먼트를 전시하고 있었고, 호이어를 만나는 자리에서는 그 이야기를 한마디도 안했다고 하네요.


그리고 그해 5월, 세이코는 일본시장에서만 조용히 6139무브를 발표했습니다.


당시에는 시계를 국제적으로 출시하기에 앞서 남아있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국내시장에서 먼저 테스트하는 단계가 있었다고 합니다.


이에 마음이 급해진 크로노매틱 그룹은 8월에 칼리버 11을 글로벌시장에 발표합니다.


이로써 세계 최초의 타이틀은 Calibre 11에게 넘어갔습니다.


우리의 El Primero는 9월에 출시됐습니다.


세이코, 호이어, 제니스의 ACM



하지만 1969년에 발표된 3개의 ACM 중 El Primero가 진정한 ACM이었습니다.


Seiko 6139와 Calibre 11은 기존 무브에 크로노그래프를 얹은 데다 세계 최초 타이틀 경쟁때문에 여러 가지 문제들을 다 해결하지 못하고 발표됐습니다.


Seiko 6139는 기술적으로 과감한 시도를 했으나 완성도가 상당히 떨여졌던 것으로 보여지며, Calibre 11은 기계적 결함을 개선하기 위해 69년에도 수정된 모델이 나왔고 71년에는 생산을 중단하고 Calibre 12로 넘어갔습니다.


성능에도 압도적인 차이가 있었습니다.


El Primero는 36,000vph에 1/10초까지 정확히 측정할 수 있었습니다.


파워리저브는 50시간이었으며, 크기도 29.33mm x 6.5mm로 전통적인 수동 크로노그래프 무브먼트보다도 얇았습니다.


반면 Seiko 6139는 27mm x 7.1mm 21,600vph, Calibre 11은 31mm x 7.7mm에 19,800vph였습니다.


어떻게 보면 성능과 완성도가 가장 떨어지는 무브가 세계 최초 타이틀을 가져간 것이죠.


제니스 엘프리메로 최초 모델



이후에 르마니아(Lemania), 벨쥬(Valjoux)등 전통적인 무브먼트 강자들이 ACM 개발에 뛰어들었습니다.


가장 유명한 Valjoux 7750 (30mm x 7.9mm, 28,800vph)은 1974년 출시되었습니다.


하지만 쿼츠파동으로 1975년에 벨쥬가 문을 닫았고, 다른 회사들도 사정은 마찬가지여서 ACM의 생산 및 개발은 10여년 이상 중단되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블랑팡 매뉴팩쳐가 된 프레드릭 피게(Frederic Piguet) 가 1988년에 Cal.1185 (26.2mm x 5.4mm 21,600vph)를 발표하면서 비로소 다른 브랜드의 ACM이 늘어나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El Primero를 능가하는 ACM은 개발되지 못했습니다.


결국, 시간이 지나서 제니스는 최초라는 타이틀과 상관없이 시계업계와 시계역사에서 인정받는 El Primero라는 타이틀을 얻게 됩니다.


이게 현재의 제니스를 만든 1969년 El Primero의 탄생이었습니다.


하지만, 1969년엔 El Primero만 탄생한게 아니었습니다.




제니스의 몰락



아폴로 11호


다큐멘터리 ‘아폴로 11호’는 1961년5월에 케네디 대통령이 국회에서 했던 연설로 마무리 됩니다.


“믿음과 직감에 의존한 결정이라는 사실을 저도 잘 알고 있습니다. 어떤 이득이 주어질지 확실하지 않기 때문이죠.


하지만 국민 여러분, 휴스턴 관제센터에서 39만km나 떨어진 달에 사람을 보내기 위해 최고급 시계보다도 더 정밀한 기계로 가득 찬 높이 90m가 넘는 로켓을 만든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추진과 유도, 제어, 통신, 생존에 필요한 장비와 음식까지 모두 싣고 미지의 천체를 향한 전인미답의 임무를 수행하고 지구로 무사히 귀환한다고 말입니다.


시속 4만km가 넘는 속도로 대기에 재진입하면 태양 온도의 절반에 가까운 열이 발생합니다. 아마 오늘 날씨처럼 뜨겁겠죠.


이 모든 일을 1960년대가 지나기 전에 누구보다 먼저 제대로 해내려면 우린 용감해져야 합니다.”


1969년에는 세상에서 가장 작고 정밀한 기계인 El Primero가 탄생했습니다.


그리고 케네디 대통령의 연설대로 El Primero보다 정밀한 기계로 가득 찬 아폴로 11호가 인류를 달에 보냈습니다.


이는 증기기관으로 시작한 기계의 시대가 정점(Zenith)에 도달했음을 알리는 거대한 이벤트였습니다.



그런데, 1969년엔 El Primero만 탄생한게 아니었습니다.


10월29일, 인터넷의 전신인 ARPANET을 통해 최초의 메시지가 전송되었습니다.


원래 명령어는 “login”이었는데 “lo”두 글자만 전송되었습니다.


우연이지만 이는 1과 0으로 구성된 디지털 전자시대가 시작되었음을 알리는 메시지였습니다.


그리고 12월25일에는 최초의 쿼츠 손목시계인 Seiko Astron이 발표되면서 쿼츠파동(Quartz crisis)이 시작되었습니다.


이후 진행된 일들을 간략히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1968.7.18. 고든 무어와 로버트 노이스가 Intel 설립

1969.7.20. 인류 최초의 달착륙

1969.08 Zenith El primero 발표

1969.10.29 인터넷(ARPANET)을 통한 최초의 메시지 전달

1969.12.25. 세이코 아스트론 발표, 쿼츠파동의 시작

1971. Intel, 최초의 마이크로프로세서 인텔4004 제작

1971 Zenith, 미국 전자회사 Zenith Radio Corporation에 매각

1972. 빌게이츠와 폴 알렌이 Microsoft설립

1973. Motorola, 세계 최초의 휴대전화 개발

1975 크로노그래프 무브먼트사 Valjoux 파산

1975 Zenith Radio Corp., Zenith의 기계식시계 생산 중단

1975 Kodak, 세계 최초의 디지털카메라 개발

1975.9 IBM에서 최초로 휴대용컴퓨터 5100 상용화

1976.4.1. 스티브잡스와 스티브워즈니악, 로널드 웨인이 Apple 설립

1976 Zenith Radio Corp., Zenith의 기계식무브먼트 생산시설 폐기 결정

1977. 초기 PC인 Apple II가 판매를 시작, 상업적으로 성공

1978 Zenith, Zenith Radio Corp.에서 스위스 컨소시엄으로 매각


디지털 시대의 시작



당시의 기술과 산업은 이미 기계와 아날로그를 중심으로 하는 ‘제2차 산업혁명’의 단계에서 전자와 디지털의 ‘제3차 산업혁명’의 단계로 전환되고 있었습니다.


지금 우리가 누리고 있는 인터넷, 컴퓨터, 휴대폰, 디지털카메라 등의 대부분이 이때 탄생했습니다.


쿼츠시계는 이 큰 흐름에서 나타난 현상 중 하나일 뿐이었지만


시계산업에 미치는 영향은 대단했습니다.


1969년 발표된 최초의 상업용 쿼츠시계와 스위스 시계산업의 영향


세계에서 가장 첨단인 제품을 만드는 곳은 쥐라계곡에서 실리콘계곡으로 바뀌었습니다.


실리콘 계곡에선 수많은 반도체 회사와 컴퓨터 회사가 설립되었지만, 쥐라 계곡에선 무브먼트 회사와 시계회사들이 3-4일에 하나꼴로 파산하거나 소리소문없이 사라져버렸습니다.


쿼츠파동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1970년부터 스와치그룹이 만들어진 1983년까지 스위스의 시계회사들 1천여개가 문을 닫으면서 600여개만 남았습니다.


업계 종사자도 9만명에서 2만8천명으로 2/3가 줄었습니다.


당시 스위스의 세계시장 점유율이 50%였으니 다른 나라에서는 이보다 많은 시계회사가 사라졌을 것입니다.



1970년에 Zenith는 다른 회사들과 연합하여 쿼츠무브를 개발하려고 시도했으나 때는 이미 너무 늦어버렸습니다.


더군다나 Zenith는 지난 8년동안 El primero를 개발하기 위해 막대한 비용을 투자했는데 이를 회수할 수 없게 되자 경영 상태는 급속히 나빠졌습니다.


1971년, Zenith는 같은 이름을 가진 미국의 전자회사 Zenith Radio Corporation으로 매각됩니다.


참고로 당시 Zenith Radio Corporation은 시카고에 위치한 라디오 생산업체였습니다.


제니스 라디오


세계 최초의 TV리모콘을 만들었고, 70년대에는 Zenith Electronics로 명칭을 변경한 뒤 TV를 주력으로 생산했는데, 80년대에 들어서는 전자산업의 중심이 아시아로 넘어가면서 어려움을 겪다가 99년엔 파산했습니다.


이후 LG전자에 인수되어 연구개발 기업으로 재편되었다고 합니다.



기계시대의 최정상에 올랐던 Zenith지만 디지털 시대에서는 한낱 낡은 기술을 가진 돈 못 버는 애물단지였습니다.


1975년, 미국 경영진은 기계식 시계의 생산중단을 결정했습니다.


그리고 1976년엔 무브먼트 제조에 필요한 장비와 재료들을 모두 처분하라는 지시가 내려왔습니다.


당시에 Zenith는 Citizen으로부터 쿼츠무브먼트를 공급받아 시계를 만드는 처지였고, 가끔 기계식 시계를 만들 때는 ETA에서 무브먼트를 받아쓰는 회사가 되어있었습니다.


1978년, Zenith가 더이상 수익을 내지 못하는 와중에 Le Locle 지역에서는 시계산업과 일자리의 보전을 요구하자 미국 경영진들은 Zenith를 스위스 제조업체 컨소시엄에 매각해버렸습니다.


하지만 Zenith는 이미 직원 대부분이 떠나고 기술과 생산시설도 사라진 껍데기만 남은 회사였였을 뿐입니다.



구조조정


샤를 베르모(Charles Vermot, 이하 샤를)는 Zenith에 중간에 입사한 경력직 직원으로 에보슈 부서의 수석엔지니어였습니다.


이 부서의 건물에는 Martel이란 간판이 붙어있었습니다.


Martel


Martel은 1911년 설립되어 크로노그래프 무브먼트를 전문적으로 생산하던 업체로써 1917년 초에 Universal에 공급한 무브먼트가 세계 최초의 손목시계 크로노그래프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주로 Universal과 Zenith에 공급했는데, Universal은 1919년에 Geneve로 이사가고 가까이에 있는 Zenith와 더 긴밀하게 협력하게 되면서 한 회사처럼 운영되었다고 합니다.


결국은 1959년에 Zenith가 Martel을 인수했고, 샤를도 Zenith의 직원이 되었습니다.


샤를은 1962년부터 시작된 El primero 개발에 처음부터 참여했습니다.


그리고 나중에는 크로노그래프 무브먼트 개발부서의 책임자가 되어 1969년에 El primero 개발에 성공합니다.


처음부터 하이비트 크로노그래프 전용 무브먼트를 완전히 새로 개발한다는 어려운 목표를 설정하는 바람에 예정된 100주년 기념 시점보다 4년이나 지연되었습니다.


회사를 다녀본 사람들은 아시겠지만 상황이 이쯤 되면 회사에서는 ‘언제 되냐? 되긴 되냐? 지금까지 한거 가져와봐!’라는 말을 안 들을 수가 없습니다.


이 와중에 경쟁자들이 나타나 최초의 타이틀을 놓고 싸웠으니 경영진의 압박은 더 심했을 것이고 쉬운 길의 유혹도 있었을 겁니다.


그런데 결국 이 모든걸 극복하고 El primero를 개발해낸걸 보면 그가 어떤 사람인지 짐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쿼츠파동이 발생했고, Zenith는 1971년에 미국 전자 회사로 넘어가면서 쿼츠시계를 만드는 회사가 되었습니다.


이후에도 기계식 시계를 근근이 생산하긴 했지만 확실히 주문은 점점 줄어들었습니다.


전자회사 임원들은 시계의 미래는 쿼츠에 있다고 판단하여 1975년에 기계식 시계사업의 철수를 결정합니다.


한마디로 구조조정이 시작된 것입니다.



평생을 쌓아온 경력으로 세계 최고의 무브먼트를 만들어냈음에도 하루아침에 구조조정 대상이 된 Charles는 큰 충격을 받았고, 회사의 이러한 결정을 바꾸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그리고 시카고에 있는 경영진들에게 편지를 썼습니다.


“저는 진보에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자주 다양한 순환을 겪는다는 점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오토매틱 크로노그래프가 완전히 사라질 것이라는 판단은 잘못된 것입니다. 언제나 그렇듯 세상은 변덕을 부릴 것이고, 그때가 되면 수익창출의 기회는 다시 찾아올 것입니다.”


하지만 답은 없었습니다.


이후엔 작은 공간을 마련하여 El primero 생산설비를 보관할 수 있는 권한을 요청했지만, 이 또한 답이 없었습니다.


아마도 경영진은 세상의 변화에 뒤쳐진 늙은 직원이 미련을 못 버려 이러거나 구조조정에 저항하는 것으로 생각한 것 같습니다.


아무튼 1976년, 회사는 기계식 시계 생산시설의 폐기 절차에 들어갔습니다.


Martel 건물은 폐쇄되었고, 기계식 무브먼트 생산을 위한 장비와 도구들은 버려지거나 매각되었습니다.


그리고 Charles를 비롯하여 지금까지 세계 최고의 오토매틱 크로노그래프 무브먼트를 개발한 36명의 직원들은 재교육을 받은 후 쿼츠 생산라인에 투입되기로 결정됐습니다.


당시 제니스의 구조조정을 보도한 기사


이에 Charles는 더 이상 회사에 허락을 구하지 않고 본인의 신념대로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18개 건물로 구성된 Zenith Manufacture 중 가장 구석진 다락방을 골라 프레스, 캠, 절삭공구, 도면, 부품 등 El primero 생산설비들을 모으기 시작했습니다.


이는 그가 El primero의 생산시설인 Workshop 4의 총 책임자로써 모든 열쇠를 가지고 있었고, 프레스 부서에서 일하는 그의 형제 Maurice가 도와줬기 때문에 가능했습니다


당시 샤를이 모아둔 엘프리메로 생산장비


Charles는 El primero의 설계부터 제작까지 모두 관여했기 때문에 꼭 필요한게 무엇인지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중에는 150여대의 프레스 장비가 있었는데, 이는 당시 가격으로 4만 스위스프랑, 당시와 지금의 금값을 기준으로 요즘 시세로 환산하면 16억원에 무게는 1톤이나 됐다고 합니다.


이 프레스 장비는 Zenith의 영업기밀로써 쉽게 재현하기가 어려웠기 때문에 만약 이게 그때 사라졌다면 El primero를 다시는 생산하지 못했을 거라고 합니다.


Charles는 낮엔 쿼츠시계를 조립하고 밤에는 묵묵히 기계식 시계 생산장비를 다락방으로 나르면서 관련 자료들을 바인더에 정리했습니다.


회사가 매각하라고 했는데 팔지 않고 숨긴 장비값만 몇 십억원 이었습니다.


걸리면 횡령 혐의로 남은 인생이 결딴날 수도 있었으니 아무한테도 얘기하지 않았습니다.


가족들은 그가 일이 많아서 매일 야근하는가 보다고만 생각했다가 주말에도 없어지자 나중엔 바람이 났나 의심하기도 했답니다.


그는 El primero를 만들 때처럼 묵묵히 본인이 생각한 목표대로 밀고 나갔습니다.


그리고 몇 달에 걸친 정리가 끝나자 다락방 입구에 벽돌을 쌓고 벽을 만들어 비밀의 방을 봉쇄해버렸습니다.


왜 이렇게까지 했을까...


뭔가를 만들어본 사람들은 알겠지만, 사람들에겐 생물학적인 자식도 자식이지만 내가 창조한 것들도 내 자식입니다.


Charles에겐 인생 전체를 쏟아부어 낳은 El primero가 분신과도 같았을 테고, 자기가 위험해지더라도 이 자식새끼만큼은 꼭 살리고 싶었을 것입니다.


아무에게도 말도 못 하고 매일 밤 몇 달동 안 계단을 오르내리는 것은 아픈 자식 간호하는 마음이었을 겁니다.


마지막에 방을 막아버릴 땐 불치병에 걸린 자식을 냉동시켜 치료법이 개발되는 미래로 보내는 심정이지 않았을까 짐작해 봅니다.


엘프리메로 장비를 다락방으로 옮기기 위해 오르던 계단


그렇게 El primero의 모든 생산설비는 Zenith Manufacture에서 사라졌고, 더 이상 할 일이 없어진 Charles도 함께 은퇴했습니다.


이렇게 Zenith의 기계식 시계에 대한 구조조정이 완료됐습니다.


그리고 El primero는 긴 동면에 들어갑니다.



제니스의 부활


1978년, 미국 전자회사는 물러가고 기계식 시계의 부활을 꿈꾸는 스위스 기업이 Zenith를 인수했습니다.


그리고 1980년대 들어서는 기계식 시계에 대한 수요들이 조금씩 다시 살아나기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몇 년이 흐른 1982년 어느날, Rolex로부터 Daytona에 장착할 El primero 공급이 가능한지의 문의가 들어왔습니다.

롤렉스 폴 뉴먼 데이토나 


당시에 Rolex는 자사 크로노그래프 무브먼트가 없었기 때문에 Daytona에 Valjoux72를 쓰고 있었습니다.


이 중에서 가장 유명한 것이 Paul Newman Daytona입니다.


하지만 Valjoux는 이미 1975년에 파산해서 없어졌고 무브먼트 재고는 모두 소진되었습니다.


Rolex는 이참에 Daytona를 현대화 하기 위한 오토매틱 크로노그래프 무브먼트를 찾던 중 El primero가 가장 뛰어나고 적합하다는 결론을 내리면서 Zenith에 생산문의를 해온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Zenith는 이미 관련된 생산시설과 자료를 모두 폐기하고 인력들도 떠나고 없는 상태였습니다.


기계식 무브먼트의 생산시설을 재건하더라도 그간 쌓아온 노하우와 핵심인력 없이 El primero를 다시 개발한다는 것은 엄청난 시간과 비용이 소모되고 성공도 보장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이에 Zenith는 은퇴한 Charles를 찾아가 생산 재개를 위한 도움을 요청했습니다.


Charles는 조용히 사람들을 이끌고 다락방으로 가서 벽을 허물고 비밀의 방을 보여줬습니다.


이를 본 Zenith 사람들의 표정은 어땠을까요?


엘프리메로 장비를 숨겨두었던 다락방


1986년, Zenith는 시설과 인력을 보강하여 El primero의 생산을 재개합니다.


그리고 Rolex와 Daytona에 맞게 36,000vph의 El primero를 28,800vph의 Rolex Calibre 4030으로 개조하여 공급하기로 하고 7백만 스위스프랑, 지금 돈으로 2,800억원에 해당하는 10년치 계약을 체결합니다.


샤를이 시카고에 보낸 편지의 예언이 맞았고, 이로써 Zenith는 다시 기계식 오토매틱 크로노그래프 무브먼트의 명가로 화려하게 부활합니다.


1988년 바젤월드에서 Rolex는 오토매틱 데이토나를 공개헀습니다.


Zenith Daytona라고 불리는 이 모델은 2000년에 Rolex가 El primero를 기반으로 만든 자사 무브먼트 Rolex Calibre 4130으로 교체하기 전까지 12년간 생산되었습니다.


엘프리메로를 장착한 데이토나


1999년, 브랜드의 역사와 전통을 가장 중요시하는 LVMH가 Zenith를 인수합니다.


이 M&A를 주도한 사람은 Christian Viros라는 사람인데, 이 전에 TagHeuer를 구조조정과 마케팅으로 살려내면서 LVMH그룹의 시계 및 주얼리부문 사장이 된 인물입니다.


LVMH라는 든든한 후원자가 생기면서 Zenith는 El primero를 중심으로 고유의 색깔을 찾기 시작했고,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Zenith의 부활에는 Rolex와 LVMH의 도움이 컸지만 샤를 베르모를 빼놓고 설명할 수가 없습니다.


많은 브랜드들이 마케터의 손으로 부활했다면 Zenith는 진정한 워치메이커의 손에 의해 부활했습니다.


샤를 베르모


살아보면 샤를의 말대로 인생에는 변덕스러운 순환이 있습니다.


El primero를 수확하는 가을이 지나니 쿼츠파동 같이 추운 겨울이 옵니다.


뭘 해도 안되는 이 겨울을 잘 견뎠더니 Rolex의 봄이 오고, LVMH의 여름이 찾아옵니다.


그리고 El primero의 가을이 다시 찾아왔습니다. 


언젠가는 겨울도 다시 오겠지만.


제니스 엘프리메로 블랙 쉐도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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