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Zeit Feb 11. 2024

타자기와 시계

올림피아 & 벰페



1981년에 독일 Olympia사에서 제작한 Traveller de Luxe라는 타자기입니다.


같은 독일 출신인 Wempe Zeitmeister와 합을 맞춰봤습니다.


독일어 타자기이긴 하지만 영어권에서 사용하는 QWERTY자판에서 Z와 Y의 위치만 바뀌었기 때문에 영어 타자기로 사용하는 데에는 별 문제가 없습니다.


독어권에서는 Z보다 Y가 많이 쓰이고 Z와 A가 연달아 나오는 경우가 많아 활자대가 물리적으로 꼬이는 걸 방지하기 위해 QWERTZ자판을 사용한다고 합니다.


아시다시피 이렇게 시작된 자판배열은 전자키보드로 전환하는 과정에서 좀 더 효율적으로 바꾸려고 했었지만 모두 실패해서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습니다.



한글용인 Marathon 1000 DLK와 나란히 놔봤습니다.


이름에서처럼 휴대용 타자기로써 일반 타자기보다 부피가 훨씬 작습니다. 




이런 타자기에서 연상되는 이미지는 기차에서 바쁘게 일하는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사진을 찾아보면 주로 기자들의 모습이 많은데 기차로 이동하면서 앞에 놓인 타자기로 만들어진 원고를 읽는 처칠의 모습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알루미늄을 사용해서 다른 타자기보다 무게를 낮췄다고 하지만 그래도 4.5kg이나 됩니다.


제 노트북이 0.9kg이니까 딱 5배네요.




시작은 백화점 소품매장 앞에 놓여있던 장식용 타자기였습니다.


아들이 처음 보는 물건에 신기해 만지작거리며 한참을 떠나지 못했는데, 사실 저도 어렸을 때 한번 봤을 뿐 실제로 써본 적도 없고 자세히 본 적도 없어서 신기했습니다. 


생각해 보니 어렸을 때부터 이미 전자의 시대였기 때문에 이런 기계시대의 유물을 볼 기회가 없었던 것 같습니다. 


더군다나 모터나 별도의 전원 없이 순수하게 인력으로 작동하는 정교한 기계는 시계 이후에 오랜만입니다.



매일 사용하는 컴퓨터는 그 속을 모르겠는데, 타자기는 그 시스템과 과정이 직관적입니다.




키를 누르는 데에는 꽤 힘이 들어갑니다. 


그리고 그 힘만큼의 속도로 활자대가 먹지 위로 날아가고 철커덕하는 소리와 함께 활자에 새겨진 문자가 도장 찍듯 종이 위에 새겨집니다. 


글자의 진하기는 다 다릅니다. 


그리고 그 결과물은 저장할 필요도 없이 바로 만들어지고 세상에서 유일합니다. 


겨우 글자 하나 쓰는 일인데 뭔가 특별한 생산활동을 하는 것 같습니다. 




꽤 감동적인 일이지만 실제로는 상당히 불편합니다. 


연습 삼아 Wempe 스펙을 쳐보다가 Size를 Seize로 잘못 쳐서 화이트로 지우고 그 위에 고쳤는데 위치가 삐뚤어졌습니다. 


화이트 흔적도 지저분해졌고요.




그런데 다큐멘터리영화 “캘리포니아 타이프라이터”를 보면서 생각이 바뀌었습니다.


“초안을 여러 개 만들지도 않고. 실수하면 그냥 XXXX자로 덮어버려요.”


“난 실수들도 소중하게 생각해요.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알 수가 있잖아요. 미국 대통령이 쓴 완벽한 연설문을 한번 볼까요? 편집은 얼마나 했는지, 본인이 쓰지 않은 부분은 얼마나 될지, 어떤 단어들을 고쳤는지 어떤 문장들을 뺐는지 엄청나게 재밌어요. 수정을 통해서 쓰이는 과정을 알 수 있죠. 컴퓨터를 쓰고부턴 이런 원고는 볼 수가 없잖아요. 미래의 역사학자들은 연구할 자료가 없어요. 일기도 없고 손편지도 없을 테니까요. 무슨 생각을 했는지 어떻게 알 수 있겠어요? 마음이 어떻게 움직였는지. 어떤 과정을 거쳤는지.”


깨끗하고 완벽한 결과만 생각했는데, 생각해 보니 과정이란 것도 있었습니다.


타자기는 그렇게 쓰는 기계 같습니다.


여러모로 타이핑 작업은 상당한 매력이 있습니다. 


그 매력 중 하나는 내 근육의 힘으로 활자를 찍어 글자를 인쇄하는 일인데, 이는 시계가 나의 움직임에서 동력을 얻어 톱니바퀴가 돌고 시간을 표시하는 것과 묘하게 닮았습니다.


바꿔 말하면 타자기는 땀 흘리는 노동을 요구하고 손으로 만질 수 있는 결과물을 즉각 만들어낸다는 점에서 상당히 원초적인 생산활동입니다. 


그래서 오히려 종일 핸드폰 유리를 문지르며 Metaverse까지 얘기하는 지금 시대에 뭔가 의미가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듭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메카쿼츠 V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