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년간의 직장생활을 마무리하는 퇴사 이후 나는 제2의 인생을 설계하며, 줌으로 진행되는 다른 강사님의 수업을 무상 보조하며 수업형태와 진행 방식을 학습하고, 강사가 되고자 했기에 스마트폰 이외 강의를 진행
할 수 있는 내용들을 찾으며 교육받고 자격증 시험을 준비하며 하루하루를 보냈다.
2월 말 최종 퇴사를 한 나는 처음 아이들의 입학식 준비를 함께 했다. 큰 아이는 고등학교, 작은아이는 중학교
입학을 앞두고 있었는데 초등학교 1학년 입학 때에도 학교에서 잠깐 인사만 하고 회사로 복귀하여 일을 했던 내가 두 아이의 입학식 등교 준비를 함께 한다는 것은 너무나 큰 감동으로 다가왔다.
두 아이 등교 식사를 준비해 아침을 먹이고 새로운 교복을 입고 내 앞에서 수줍게 자랑하는 아이들의 사진을 찍고 괜찮다고 했지만 아이들을 버스정류장에 데려다주고 돌아오며 눈에서는 한 없는 눈물이 흘렀다.
퇴사 후 아이들에게 가장 많이 들은 말이 엄마와의 대화가 편해져서 좋다는 이야기였다. 아이들이 성장하는 과정에서 경제적인 부분이 중요하다 여긴 나의 개인적 가치관은 아이들이 원하는 작은 행복과 나 자신의 내면의 소리를 무시하고 함께가 아닌 혼자 초단위 경주를 하며 앞서 가며 뒤를 돌아보지 않았던 것이다.
한편으로는 경제력 없는 무능력한 엄마를 아이들이 원하지 않을 거라 생각했던 것 같다. 경제적 능력이 없으면 나를 사랑하지 않을 것이라 스스로를 개인적 생각 감옥에 가두고 진정으로 그들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묻지도 돌어 보지도 았았다.
집에서 따뜻한 아침을 주고 교복을 가다듬어 주고 함께 손잡고 버스정류장에 걸어가 친구들과 등교하는 아이들 모습을 바라보는 나의 생소한 경험과 아이들의 첫 경험에 두 아이는 '업마와 함께 하니 너무 행복해!'라고 말하며 환한 미소로 인사해 주었다.
아무것도 아닌 것 같은 이 작은 행동이 가족에게 선물하는 행복이 이렇게 크다는 걸 진작 알았더라면 그리고 그 누구보다 나를 내가 더 사랑했더라면 다른 이유를 핑계로 내 가치관의 감옥에 나를 가두고 괴롭히는 일은 없었을 것 같다는 깨달음은 집으로 돌아가는 길 내내 눈물을 흘리게 만들었다.
퇴사한 지 2주가 지났을 때쯤 몸살이 났다. 병원에서도 크게 문제는 없다고 하는데 등이 너무 아프고 맥이 없고
정신없이 울리고 여기저기 회의를 쫓아다니던 일과가 조용한 핸드폰과 집에서 화상회의를 통해 혼자 학습하는 시스템으로 변경되다 보니 어딘지 모를 허전함과 공허함이 밀려왔다. 퇴사 증후군 초기 증상이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다.
이 시기를 넘기고자 운동이라고 하기는 부끄럽지만 1만 보 걷기와 식단 조절을 하며 다이어트를 시작했다. 부종과 스트레스성 폭식으로 한없이 늘어난 체중이었기에 생활 식습관과 약간의 걷기로도 체중 조절을 보다 쉽게 할 수 있었다.
퇴사한 지 1개월이 넘어기가 시작하면서 나의 일상에 빨간 불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이유는 급여가 들어오지 않고 퇴직금 정산이 채 완료되지 않은 상황에서 그동안 사용한 생활비의 정산일이 다가왔기 때문이다.
물론 퇴사를 생각하며 예비금을 준비하기는 했지만 보이스피싱으로 예비금이 축소된 상황에서 돈이 빠져나가기 시작하니 불안감이 급습해 왔다.
엎친데 덮친 격일까? 퇴사 한지 3개월 차에 도래하며 우울감까지 더해져 나에게 불면증이 찾아왔다. 교육비를 내고 자격증을 취득하고 협회에도 가입했는데 강사가 되고자 하는 나에게 강의를 할 수 있는 기회는 없었다. 같은 시기에 시작하신 다른 강사님들께서는 수업을 하시는 것 같은데 왜 나는 아무 일도 들어오지 않는 것인지, 누가 나에게 일을 주는 것인지, 어떻게 해야 하는 건지 모르겠는 상황에서 예비 준비금에서 돈은 나가고 들어오는 돈이 없으니 두 아이를 키우는 부모 입장에서 어쩌면 당연했을 수도 있다.
퇴사를 준비하며 생계를 위협하는 퇴사는 안된다는 이야기에 나는 준비금이 있으니 이 준비금이 소진되는 시기까지 해보자라고 생각했는데 막상 들어오는 인풋을 만들지 못한 채 3개월의 시간이 흐르니 너무 불안했다.
그때까지 나는 몰랐던 것이다. 회사에서 처럼 회사 목표 대비 부서 계획서를 제출하고 승인받아 일을 진행하듯 자격증을 취득하고 협회에 등록되면 협회에서 강사일을 줄 것이라 생각했던 나의 어리석음을..
회사를 다닐 때는 회사명과 직급으로 명함을 작성했지만 세상 앞에 던져진 나라는 개인을 알리는 명함은 어떻게 해야 하는지 강사라는 직군이 프리랜서 개인사업과 같이 내가 나의 길을 개척해야 함을..
회사라는 온실 속 화초로 세상을 살아온 나는 세상과 나로 부딪혀 일어나야 함을 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