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첫 학기 성적 마감을 앞두고 리포트 카드 쓰느라 정신없이 일하고 있는데 아내가 조용히 다가와서, 할 말이 있는데 잠시 시간을 낼 수 있냐고 물었습니다. 그럴 땐 내일 권고사직을 당하더라도 노트북을 덮고, 잔잔한 미소를 띠고 사랑스러운 눈길로 아내를 바라보며, 들을 준비가 되어있음을 보여줘야 합니다.
밝은 표정의 아내를 보니 안 좋은 일 같아 보이진 않아서 안심을 했죠. 느긋한 성격에 드라마를 좋아하는 아내는, 아이들 태권도 클래스에서 만난 다른 아이 엄마 이야기를 하더라도, 배경 설명부터 시작해서 발단, 전개, 위기, 절정, 결말의 형식을 갖추어하는 것을 좋아하기 때문에, 성격 급한 신 선생이 종종 “그러니까 결말이 뭐야?” 하며 재촉하다가 스스로 명을 단축하는 일을 하기도 합니다.
아내가 해준 이야기는 첫째 요요가 요즘 학교에서 하는 조금은 특별한 활동에 대한 이야기였습니다. 7학년인 요요는 초등학교에서 최고 학년 졸업반입니다. 그런데 요요네 학교 3학년에는 주의가 조금 산만하고 아직 친한 친구가 없는 남자아이 하나가 있다고 합니다. 교실에 선생님이 있을 때는 그래도 괜찮은데, 선생님이 없는 점심시간이 문제였다고 합니다. 점심시간에는 보통 담임 선생님도 식사하러 교사 휴게실로 가고, 다른 스태프들이 돌아가면서 교실을 방문하며 아이들을 돌보는데, 그들이 교실에 계속 붙어 있는 것이 아니라서, 그 아이는 종종 교실 안을 돌아다니며 밥을 먹고 다른 아이들을 방해하기도 했다고 하네요.
그 아이를 돕기 위해 학교 교장 선생님이 7학년 담임교사들에게, 그 3학년 아이와 형처럼 점심도 같이 먹고, 또 아이가 체스를 좋아한다고 하니 체스 게임도 같이 해줄 수 있는 학생 하나만 추천해 달라고 했답니다. 그랬더니 요요의 담임이 요요와 또 다른 아이 한 명을 추천했고, 이후 교장 선생님이 직접 요요에게 찾아와 그 아이에 대한 이야기를 해주며 그 아이의 런치버디가 되어줄 수 있는지 부탁을 했는데, 요요가 기꺼이 그렇게 하겠다고 해서 그 아이와의 인연이 시작되었습니다. 요요는 그 이후 지금까지 매일 같이 그 아이와 점심도 같이 먹고, 체스도 두고, 서로 좋아하는 비디오 게임 이야기도 하면서 형 노릇을 해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요요 이 녀석은 이 일을 별로 대수롭지 않은 일이라 생각했는지 한 달도 한참 지난 엊그제 엄마에게 처음으로 지나가듯 이 이야기를 해서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혹시 힘들지는 않은지 엄마가 물어보니 하나도 힘들지 않고 재미있다고 했다고 합니다. 다행히 그 아이도 요요를 잘 따른다고 합니다. 집에 3년 터울의 형바라기 껌딱지 동생이 있어서 그런지 자기보다 어린 남자아이들과 같이 노는 데에는 아주 도가 튼 녀석이라서 그럴 수도 있겠죠.
숙제 끝내고 방에서 나오는 녀석을 진지하게 불러 앉히니 아빠가 또 무슨 잔소리를 하려고 이렇게 분위기를 잡나 긴장하는 기색이 역력합니다. 새어 나오는 웃음을 참고, 진심을 담아 아이에게 칭찬을 해주었습니다. 그동안 아이가 열심히 노력해서 성취해 왔던 다른 그 어떤 자랑스러운 일보다, 이렇게 학교 생활을 힘들어하는 어린 동생을 도와주고 친구가 되어줬다는 사실이 엄마아빠는 더 기쁘고 자랑스럽다고 말해주었습니다. 감정 표현에 조금 서툰 요요, 겉으로는 아무렇지 않은 듯 쿨한 척 하지만, 칭찬을 받으며 자기도 모르게 코와 입술이 씰룩씰룩하는 걸 보니 녀석도 속으로는 무척 기뻐하는 것 같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