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졍렬은 1997년 가수로 데뷔했습니다. 출발은 배우였습니다. 1994년 가극 <금강>으로 데뷔했죠. 가수로서 앨범은 딱 4장 발매했습니다. 한국외국어대학교 스와힐리어과를 졸업했습니다. 스와힐리어를 찾아보니 동아프리카 지역에서 널리 쓰이는 반투어족의 언어라고 합니다. 특이하죠?
옴니버스 콘서트 '착한 노래 만들기', '故 김광석 추모 콘서트, 윤도현, 안치환 콘서트의 게스트로 참여하며 조금씩 이름 석자를 알렸습니다. 김광석 추모앨범에서 '그루터기'라는 곡을 부르기도 했습니다. 1977년 1집 'On the ground'를 발표합니다. 그 외에 OST 작업에 참여했고 애니메이션 노래도 불렀습니다.
오늘 소개해 드릴 노래는 1999년 발표한 2집 'Natural'에 수록된 타이틀 곡입니다. 어반자카파가 리메이크하기도 했고 슬기로운 의사생활 OST로도 쓰였습니다. 결혼식 축가나 고백송으로 많이 부리는 곡이기도 합니다. 이 노래가 뜨면서 이정렬 씨를 가수로만 알고 있는 분들이 꽤나 있습니다.
현재는 뮤지컬 배우로 활동하고 있고요. 드라마와 영화에도 꾸준히 모습을 드러내고 있죠. 2017년과 2018년 뮤지컬 <서편제>로 뮤지컬어워즈에서 남우조연상을 수상한 바 있습니다. 딸도 뮤지컬 배우로 활약하고 있다고 하네요. 지금은 가수보다는 배우로 전향한 듯 보입니다. 기회가 있을 때 신곡도 발표하셨음 하네요.
자. 본업인 가사 속으로 함께 들어가 보겠습니다. 제목이 '그대 고운 내 사랑'입니다. 한 마디로 사랑가입니다. 노래 가사가 평이하고 따라 부리기도 좋습니다. 가사에 해석을 다는 저로서는 대략 난감하지만 말이죠.
'세상에 지쳐가던 내게 그대는 다가와/ 가물어 갈라진 가슴에 단비를 주었죠/ 잊었던 희망의 노래가 새록새록 솟고/ 그댈 그리며 사는 날들 꿈만 같아요'가 첫 가사입니다. 사랑이란 그렇습니다. 가뭄에 내리는 단비와 같죠. 반복되고 지쳐가는 일상을 한순간에 이색적인 시공간으로 바꿔놓기도 합니다. 회색빛 세상에 컬러가 하나 둘 입혀지며 알록달록한 모습으로 변해가죠. 나도 모르게 콧노래가 나오고요. 너무도 비현실적이라 꿈인지 생시인지 착각을 할 정도죠.
'그대 짊어진 삶의 무게 가늠하지 못해/ 오늘도 나는 이렇게 외로워 하지만/ 가시나무숲 서걱이던 내 가슴 치우고/ 그대를 쉬게 하고 싶어 내 귀한 사람아' 부분입니다. 우린 사랑을 하면 자신의 희생을 당연하게 받아들이게 됩니다. 같은 삶의 무게를 지니고 있거나 더 큰 삶의 무게를 지니고 있더라도 상대의 것이 더 커 보이는 법이죠. 화자는 함께 하고 싶은 상대를 만나지 못해 외로움을 느끼는 순간에도 상대만을 걱정하는 눈치입니다. 자신의 외로움보다 지친 상대를 쉬게 하는 일을 우선순위에 두고 있습니다.
이 노래의 하이라이트는 '그대 고운 내 사랑/ 오월의 햇살 같은 꿈이여/ 그댈 기다리며 보내는 밤은/ 왜 이리 더딘지' 부분입니다. 사랑하는 그대를 표현하는 말은 다양하겠지만 화자는 곱다, 내 사랑, 오월의 햇살, 꿈같은 단어가 먼저 떠오르는 모양입니다. 날이 밝아야 그녀를 만나러 갈 텐데 유독 밤이 길게 느껴집니다. 밤은 여기서 사랑을 가로막는 장애물로 등장하는 듯하네요. 사랑의 다른 이름은 기다림이라고 말해주는 듯하고요.
음. 오늘은 가사 중 '그대 짊어진 삶의 무게 가늠하지 못해'에 대해 썰을 풀어보도록 하겠습니다. 여러분들은 한 인간이 타인을 진정으로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하시나요? 언어철학에서는 자신의 의사가 100% 타인에게 전달된다고 보느냐의 명제로 환원할 수 있죠.
우린 각자 다른 삶을 살지만 비슷한 인생 경로를 거칩니다. 공립이든 사립이든 학교를 다니고 직장이든 사업이든 돈을 벌기 위해 경제 활동을 하는 것처럼요. 그러다 보니 그 시절 그때를 떠올리면 그 정서를 공감하게 되고 동시대를 살아온 누군가와 동질감을 느끼게 되죠. 공통 정서에 대한 반응이죠.
그런데 말이죠. 같은 일을 겪었는데도 그걸 받아들이고 해석하는 영역으로 가면 큰 차이를 보이기 마련입니다. 큰 일을 당하고도 담담한 사람이 있는가 하면 그냥 지나쳐 버려도 될 일을 오랫동안 기억하며 주변을 피곤하게 하는 사람도 있죠. 동일한 상황하에서도 수용의 자세나 태도 같은 게 달라서 일 텐데요. 한 두 개 정도는 어떤 사람과 정확히 일치해도 그 개수를 더할수록 같은 이가 하나도 없게 됩니다.
우리가 누군가를 공감한다는 것은, 힘든 사람을 보면서 아파하는 것은 그 자체보다 자신의 비슷한 경험 따위가 건드려졌기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마치 누군가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그 누군가를 사랑하는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것처럼요. 과연 우리는 타인을 이해하고 공감하는 것이 진정 가능한 것일까요?
당연히 사람마다 짊어진 삶의 무게가 다릅니다. 누군가는 금수저로 누군가는 흙수저로 태어나 출발선부터 다르죠. 열심히 공부한 친구는 답을 밀려 쓰고 공부 하나도 안 한 친구는 찍었는데 제법 정답을 많이 맞히는 촌극이 펼쳐지기도 합니다. 대뜸 운이라는 놈이 나타나 누군가의 삶의 무게를 들어다 놨다 하는 것이죠.
삶의 무게는 늘 변합니다. 매일 반복되는 일상이 너무너무 지겹고 싫기도 하다가도 어떤 날은 아무 일도 없이 지나간 무탈한 날에 감사하는 마음이 생기기도 하죠. 자신을 누르는 삶의 무게는 크게 변하지 않았지만 본인의 컨디션이나 그때그때의 감정 상태에 따라서 무게가 들쑥날쑥하는 까닭입니다.
타인의 삶의 무게를 보고 나는 저러면 못 살 것 같다는 말을 곧잘 합니다. 자신이 들어본 적도 없는 무게여서 일단 거부감부터 드는 것이고요. 익숙하지 않으니 겁부터 나는 겁니다. 거꾸로 타인이 자신의 삶의 무게를 본다면 같은 생각을 할 수도 있을 겁니다. 누군가에서는 옴짝달싹 못하는 회사원이 삶의 무게로 보일 수도 있고 누군가에서는 진폭이 심한 자영업자의 삶의 무게가 더 커 보일 수 있는 법이니까요.
우리는 타인의 삶의 무게를 자신의 경험에 비추어 추론할 뿐 그 무게를 정확히 알긴 어렵습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그 무게 역시 무게를 짊어진 사람의 상황에 따라 늘 변화하는 것이기도 하고요. 그래서 자신의 판단으로 타인이 가진 삶의 무게를 가늠하는 것은 피해야 할 일이 아닐까 싶습니다.'내가 너라면 그렇게 힘들어하지않았을 텐데'라든가 '내가 너라면 그 정도 일은 대수롭지 않게 넘겼을 텐데' 같은 표현은 타인이 가진 삶의 무게를 자신의 판단으로 재단하는 일일 수 있습니다.
이 노래 가사처럼 우린 타인이 짊어진 삶의 무게 가늠하지 못한다고 할 때 가시나무처럼 서걱거리는 자신의 판단을 치우고 타인을 편안하게 쉬게 하는 일이 우리가 해야 할 일이 아닌가 싶습니다. 각자가 지닌 삶의 무게를 지고 사는 인생에서 잘 이겨낼 수 있도록 옆에서 응원하는 것 외에는 딱히 방법이 없는 것도 사실이고요. 여러분들은 타인이 지닌 삶의 무게에 어떻게 반응하고 있나요? 오늘의 브런치는 이것으로 마치겠습니다.
PS. 삶이 무게 유독 무거워 보이는 누군가에게 노래 선물을 해 보는 것은 어떨까요? 이 노래 제목처럼 '그대 고운 내 사람'이라는 것을 간접적으로 어필하며 용기를 북돋아 주는 것도 한 방법이 아닐까 싶습니다. 타인이 지닌 삶의 무게를 보고 말로 하긴 좀 쑥스럽다면 노래선물이 그 대안으로 안성맞춤이 될 수 있을 것 같네요. 이왕이면 가사가 타인의 상황과 잘 매치되면 금상첨화 일테고요. 하하하. 오늘은 이만^*. See you. Coming so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