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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저예연 Feb 23. 2023

내 지각에는 이유가 있다.

성인 ADHD 진단기

 내 지각이 범상치 않다고 느낀 건 해가 가라앉는 태국 방콕의 택시 안에서였다. 같이 여행을 간 친구와 마사지샵을 예약해 뒀는데 일정을 소화하다 보니 예약시간에 맞출 수 없게 되었다. 친구는 내게 늦어서 못하게 되어도 다시 예약하면 되니 괜찮다며 여상하게 말했다. 그런데도 내 머리는 멈출 줄 모르고 어째서 늦게 된 것인지 원인을 캐내느라 바쁘게 돌아갔다. 마치 범죄를 저지른 후 자수하기 직전의 범인처럼 불안하고 초조했다. 내 기분이 다운된 걸 알았는지 친구도 나를 달래주려 여러방안을 내놓았다. 그 와중에도 내 머리는 어째서 늦게 된 것일까, 원래 늦으면 다들 불안해하나, 왜 나는 매번 지각을 하는가로 계속해서 주제를 옮겨갔다.


그렇다. 저 날은 어쩔 수 없었지만 원래도 나는 굉장한 지각쟁이다. 이제 친구들과의 약속에 늦으면 '지각상습범 왔다'라는 소리를 들을 정도다. 나는 늘 약속에 늦으면서도 짙은 죄책감에 시달리며 잰걸음으로 뛰어가기를 반복한다. 어차피 매번 하는 지각 좀 뻔뻔하기라도 해서 편안한 마음이었으면 좋겠는데 도저히 그렇게는 되지가 않았다. 이건 다 스스로가 불러온 재앙이고, 이쯤되니 재앙 속에서 느껴지는 혼돈을 즐기는게 아닐까 하는 의심이 들 지경이었다.


방콕 여행에 다녀와 기념품을 주기 위해 다른 친구들을 만나게 되었다. 역시나, 이 날도 늦었다. 나는 카톡방에 '나 늦을 것 같아 너네 먼저 시켜 미안'이라고 남긴 후 초조하게 내릴 역만을 기다렸다. 상습범죄자로서 친구들의 심기를 거슬리지 않기 위해 얌전히 밥을 먹고 카페에 갔다. 이리저리 대화하던 중 나는 다른 사람들도 지각을 할 때 나처럼 괴로운지 궁금해졌다. 때를 틈타 말을 꺼냈다.


내 지각의 특징은 늦게 일어나도, 일찍 일어나도 '늦는다'라는 것이다. 나는 약속 전날에도 늦게 자기를 서슴지 않았다. 아니, 자는 것을 계속해서 미루다 도저히 안 되겠다 싶을 때 잠을 청했다. 또한 일찍 자서 제때 일어나도 느적느적대다가 약속이 임박한 시점에서야 길을 나섰다. 늦을 때마다 미친 듯이 불안하고 초조해서 차라리 사고가 나 합리적인 지각이 되길 간절히 소원했다.


듣던 친구 하나가 '그건 좀 심한데? 왜 그러는 거야?'라고 했고, 다른 친구는 '일찍 자고 1시간이 걸릴 것 같으면 1시간 20분 전에 나와.'라고 훈계했다.

'그걸 누가 몰라? 아는 것과 아는데도 실행하지 못하는 건 큰 차이가 있단 말이야'라는 말은 속으로 삼켰다. 죄인에겐 그런 말을 할 자격이 없으니. 아마 염치조차 없었다면 주변에 아무도 남지 않았을지도 모르겠다.


'그건 좀 심한데?'라는 친구의 한 마디는 나에게 큰 충격으로 와닿았다. 그래서 나조차도 모르겠는 내 지각의 이유를 어떻게든 해석해보고 싶었다. 혹은 지각하는 내 심리에 대해 해설이라도 하고 싶었다.

유튜브 검색창에 '지각 안 하는 법'을 검색했다. 이 모든 의문의 해결은 하나의 영상이었다. 위대한 유튜브 알고리즘은 내 앞에 오은영 박사님을 데려다 놓았다. 금쪽상담소라는 프로그램의 클립이었는데, 댄서 가비가 자신이 성인 ADHD인지 알고 싶다고 고민을 토로하는 내용이었다. 나는 무난하게 영상을 시청하다가 곧이어 나온 성인 ADHD 체크리스트에 곧 심각한 상태가 되었다. 소지품을 잃어버리는 것 외에는 거의 모든 것에 해당이 되었다. 이후로 나는 마치 홀린 것처럼 관련자료를 찾아보았다. 새벽이 새도록 보고 또 보고 또 봐도 대부분의 설명이 나의 행동과 너무도 일치했다. 아니, ADHD가 맞다고 확정 지을만했다.


그다음 날 바로 ADHD 전문가 선생님이 계신 정신과를 예약하고 진료를 보게 되었다. 병원에 가는 길엔 오히려 ADHD가 아니면 어쩌나 무서웠다. 만약 이조차도 아니라면 끈기없는 나를 데리고 살아야 할 미래가 절망스러웠다. 세상으로부터 사회부적응자가 되어 완전히 도태될지도 모른단 불안감도 있었다. 때문에 그 자체로 꺼려지는 정신병임에도 불구하고 의연히 받아들이겠다는 결심이 자연스레 들었다. 이에 더해 여태껏 저지른 나의 수많은 과오들에 타당성이 실리기를 바라는 이기심도 은근했다.


짧은 기다림 끝에 진료실로 들어갔다. 혹시나 상태를 정확히 설명하지 못할까 봐 빼곡히 채운 휴대폰 메모장도 함께였다. 나는 선생님의 요청에 따라 의심되는 사항들을 읊었다.

대부분의 약속에 지각을 하는 것, 게임엔딩을 볼 때까지 그만두지 못하는 것, 좋아하는 과목이 아니면 손도 대지 않아 끔찍한 성적을 받았던 것, 반년사이 세 번이나 퇴사한 것, 여러 일을 벌여놓고도 단 한 가지도 완성하지 못했던 것, 신용카드를 화수분처럼 써 빚을 진 것, 스트레스를 받을 때마다 탄수화물을 사다 앞에 널어놓고 맛도 못 느끼면서 다 먹을 때까지 입에 꾸역꾸역 넣어댄 것, 무엇을 할 때면 잡생각이 가득 차고 곧 흑역사가 떠올라 괴로워지며 하던 일을 멈출 수밖에 없었던 것.... 끝도 없었다.


나는 말하면서도 어쩐지 억울한 마음에 울컥이는 눈물을 푸석한 티슈로 내리눌렀다. 묵묵히 내 말을 듣던 선생님은 ADHD를 판단하는데 주의력 검사나 다른 방법들이 있지만, 나의 이야기만 들어도 ADHD로 진단하기엔 무리가 없다고 했다. 그러면서 ADHD 성향이 있는 경우 시작하기를 어려워해서 출발하는 것이 힘들었을 것이라며 내 지각의 원인을 짚어주었다. 선생님은 내게 각성제를 처방해 주었고 나는 거부감 없이 받아들였다.


20,900원. 2n년간 내 괴로움을 해결해 줄 돈은 고작 20,900원이었다. 무언가 해보려 발버둥 치던 내가 떠올랐다. 새로운 걸 배우고자 할 때 독학은 꿈꿀 수 없었다. 나약한 의지력을 대신해 줄 강제성을 가지려면 큰 대가를 지불해야 했다. 나를 잡아줄 몇백만 원짜리 1:1 PT와 학원 수업을 끊으면서 할부값에 허덕였다. 나를 무언가에 옭아매려면 내 통장도 함께 저당 잡혀야 했다. 그렇다고 한들 수업시간 동안 날아간 정신은 붙잡을 수 없었지만.

이 상황이 어이없어 헛웃음이 났다. 온전히 내 잘못이 아님을 알았다면 그렇게 오랜 시간 괴로움에 몸부림치지 않았을 것이다. 동시에 지금까지 이런 나를 감당해 온 내가 대견했다. 엄마는 내 병명에 속상해했지만 나는 어쩐지 홀가분하고 신이 났다. 다르게 살 수 있다는 희망감이 나를 들뜨게 했다.


스스로가 ADHD인 줄 모르는 사람은 얼마나 있을까? 아마 의심하게 된다면 그들은 나처럼 당장에 병원에 뛰어들어갈지도 모른다. 모두 개미 몸통보다 짧은 집중력과 의지력에 넌덜머리나 지쳐있을 것이 분명하니까. 이 글로 나처럼 수많은 시간을 괴로워한 지각상습범들에게 '혹시?' 하는 마음을 심어주고 싶다.

모든 잠재적 ADHD인들이 잘못된 수사로 처넣어진 감옥에서 석방되기를 간절히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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