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원은 셀프'라는 말을 들어본 적이 있다. 구원, “어떤 위험한 상황에서 구출되거나 속박에서 해방된다"라는 뜻인데, 이 모든 게 셀프라는 건 결국 스스로 돕지 않으면 해결될 수 없는 일이라는 뜻이었다.
기억도 나지 않는 어린 시절부터 어렴풋이 느꼈다. 무언가 빈자리가 있다는걸. 지금 내 주변에 있는 사람들로는 채워지지 않은 무언가가 있었다. 떼를 써서 얻으려는 시도도 했지만 좋은 결과를 내진 못했다. 바깥에서 만난 관계들에 열을 쏟게 된 건 이런 이유에서였다.
그러다 정신이 들 때가 가끔씩 있었다면 나도 이미 나를 진작에 구원했을까.
잠들기 전에는 이불을 몸 주변에 꼭 맞게 돌돌 말아두고 꼭 번데기처럼, 어딘가에 꼭 들어맞아 갇히기라도 한 것처럼 해두고 잠들었다. 무언갈 안지 않으면 잠들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다는데, 나는 그게 누구든 같이 잠들고 싶었다.
옛 애인과 함께 잠들 때엔 시작이 어떻든 결국 내가 그에게 안긴 모양이 되었다. 그는 내게 '너는 덩치도 크면서 맨날 안기냐'며 웃었다. 우리가 헤어지던 날 밤에 내게서 손 한 뼘 정도 거리를 두고 누운 그 몸에 애써 팔을 걸쳤다. 늘 안겨서 잤는데. 이제 날 안아줄 수 없는 네가 되었구나.
십대 시절 학교 친구들을 구원으로 삼으려다가 실패했던 건, 상호적인 관계가 아닌 누군가의 눈치를 보고 일방적인 행동들을 수용하며 견디는 걸 우정으로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건 사랑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유성애가 당연하게 여겨지는 사회, 드라마를 보면 연애를 통해 서로를 구원하는 이들이 이야기가 매 순간 지치지도 않고 흘러나왔다. 누군가에게 욕망되지 않으면 아무런 가망 없는 존재가 된 것 같던 기분. 당연했다.
더는 날 사랑하지 않는다고 말했을 때, 나는 가치 없는 사람이라고 들렸다. 그 이후에 어떤 말을 덧붙여도. 내가 더 많은 사랑을 받을 자격이 있는 사람이라는 말도, 지금까지 나를 사랑했던 이유들에 대해 답해줘도. 그 어떤 것도 더는 사랑이 아니라는 그 말보다 힘이 세진 못했다. 유감스럽게도.
뭐든 맘처럼 안될 때는 케이팝과 아이돌을 구원으로 삼았다. 많은 아이돌을 사랑하며 그들을 동경하고 동정했다. 한 번도 실제로 만나본 적 없는 타인인데, 매번 속절없이 마음이 쓰였다. 일방적이라서 거대했을지도 모른다.
사랑 줌으로써 사랑을 받고자 하는 욕망이 숨겨지지 않는 최애를 만나면 무서워서 눈을 질끈 감았다. 네가 세상에 다정한 만큼 세상도 너에게 다정하면 좋을 텐데. 그렇게 하다간 분명 아플 건데 너는 왜 그럴까. 네 주변 사람들은 왜 결말이 뻔히 보이는 선택을 하는 너를 그저 내버려 두고 있을까.
일방적인 마음은 끝이 없게 괴로울 만큼 나를 활활 태웠다. 너는 나의 구원일 수 없구나. 내가 너를 그렇게 두질 못하는구나. 마음 쓰기를 그만뒀다. 어차피 내가 그만두어봐야 아무도 눈치채지 못할 일인 걸.
'구원은 셀프'라는 말이 정 없게 들린다. 누구를 구해서 내가 구해진다면 나는 기꺼이 불길에라도 뛰어들 텐데. 하지만 이미 불길에서 살아지는 나는 그럴 수가 없네. 내가 그 불씨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