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움을 요청하는 용기
최근에 심리 검사를 받았다. 여러 번 선생님과 상담을 하고 검사지에 답변하며 오랜 시간이 지나갔다. 드디어 해석 상담날이 다가왔을 때, 평소 자기 분석을 좋아하는 나는 조금 들떠있었다. 하지만 그날 상담소에 갔을 때, 나는 결과 보고서를 받아볼 수 없었다. 조심스러운 얼굴을 하고 선생님이 말씀하셨다.
"추가 상담이 필요할 것 같아요. 답변해 주신 것 중에 '나는 자살시도를 한 적이 있다.'이 문항 때문에요."
추가 상담 시간 동안 선생님은 내가 정확히 언제 자살 시도를 했는지, 그때 내 마음은 어땠는지를 물으셨다. 나는 첫 자살 시도부터 또박또박 이야기했다. 내가 어떤 순간들을 언급할 때마다 그걸 듣는 선생님은 마음 아파하시는 것 같았다. 정작 나는 목소리 한번 떨지 않고 이야기를 마쳤다. 이런 경험들을 이야기하며 울지 않게 된 게 스스로 조금 자랑스럽게 느껴지기도 했다.
그다음 주에 드디어 결과 보고서를 받아봤다. 그날따라 상담소 안 공기가 시원했다. 보송보송한 의자에 앉아 선생님이 작성하신 보고서를 같이 읽으며 설명을 들었다. 보고서는 결과에서 나온 지표를 해석하며 진행되다가, 중간부터는 선생님과의 상담에서 이야기 나눈 것까지 활용해서 내가 정서적으로 나아지기 위해 해결해야 하는 세 가지 문제들을 짚어내고 있었다. 그 문제 중에는 '심리적 위기와 자살시도'가 있었다.
그걸 보고 마음 한편이 내려앉고 의문이 들었다. 이제 그 정도는 아니게 되었다고 생각했다. 실제로 최근에 힘든 일이 있었을 때에도 죽고 싶다는 생각이 들진 않았다. 죽고 싶다는 말버릇도 진작에 고쳤다. 그랬으면 된 거 아닌가? 나는 이제 이겨낸 거 아니었나? 이게 지금까지도 내 인생에서 그렇게 중요한 문제인가?
나는 자살 시도를 한 적이 있다.
그 문항에 '그렇다'라고 대답하는 데에는 용기가 필요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렇다'라고 답한 이유는 내가 그때 한 건 자살 시도가 맞았고, 지금은 예전보다 정신 건강이 좋아졌으니까 이제 와서 문제적으로 다뤄지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선생님은 이렇게 적으셨다. '수검자는 아무도 모르게 자살 시도 한 적이 두 번 있다.' 실제로 가족 중에 내 자살 시도를 아는 사람은 없었다. 아무도 내가 지옥에서 살고 있다는 걸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내가 거기에서 벗어나고자 죽으려 했다는 걸 아는 사람도 없었다. 선생님은 그걸 문제라고 보셨다.
숙제가 생겼으나 난처해졌다. 나의 심리적 위기와 자살 시도 문제를 제대로 해결하려면 결국 부모에게 말해야 했다. 예전에는 내 상태에 무관심한 부모에게 항의하려고 악을 쓰기도 했지만 그때도 자살 시도한 걸 알리지는 못했다. 오랫동안, 괜찮았겠지라고 생각했을 시절부터 속부터 곪아 썩어 들어가고 있었다는 걸 이제 와서 새삼스럽게 알리고 싶지 않았다. 그냥 부모가 슬퍼할 게 보였고 우리는 서로의 감정, 특히 슬픔에 어떻게 대처하고 같이 이겨내야 하는지를 잘 모르는 가족이라서.
내 마음을 한눈에 알아보셨는지 선생님이 말씀하셨다. 지난 일이라고 덮어두지 말라고. 그 말이 내 등을 떠밀었다. 집에 가서 엄마에게 이 보고서를 보여드릴 수 있을까? 보여드린다고 해도 무슨 이야기를 해야 좋을까. 제가 살아가며 겪는 이 문제는 나 혼자만의 책임이 아니에요. 그러니까 좀 더 관심을 갖고 도와주세요. 그거였다.
집에 들어가자마자 거실에 계신 엄마 옆에 앉았다. 할 이야기가 있다며 보고서를 보여드렸다. 보고서가 내게 해결해야 한다고 말한 것들 차례대로 제목을 읽으며 보여드렸다. 마지막에는 '심리적 위기와 자살 시도'가 있었다. 그건 소리 내어 읽지 않고 그냥 엄마가 읽으시게 했다. 방에 남동생이 있었다.
대화가 끝날 무렵에 엄마가 말하셨다. "이거 엄마가 더 봐도 되니?" "네 그러세요, 저는 씻으러 갈게요." 그러고 나는 방으로 들어갔다. 그날 나는 엄마에게서 앞으로 정신 건강과 관련된 경제적인 지원을 약속받았다. 하지만 엄마가 내가 자살 시도를 했다는 걸 알게 된 게 부모 가슴에 대못 박는 짓 같았다. 아빠가 어떻게 반응할지 모른다는 이유로 엄마에게만 말한 것도 내 나름의 편의를 위한 것이어서 엄마에게 좀 더 무거운 짐을 지운 것 같았다. 씻고 나서도 나는 엄마가 어떤 얼굴일지 겁이 나서 방 밖으로 나가지 못했다.
그러나 이제 엄마도 안다. 내가 그때 지옥에 살았다는 걸. 모든 걸 포기하려 했던 걸. 그게 지금까지도 문제로 남아있다는 걸. 그 밖에도 제삼자의 글로써 나를 이해하게 되셨을 거다. 그건 더 이상 혼자서 문제를 해결하려고 애쓰지 않아도 된다는 뜻이다. 같이 논의하고 도움을 받을 상대가 있다는 뜻이다. 그건 새로운 페이지가 되어줄 거다. '나는 자살 시도를 한 적이 있다.'라고 인정하는 게 더욱더 힘들지 않게 되는 계기가 될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