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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선선 Jan 22. 2024

불안은 불면을 부르고 밤은 이다지도 길다

잠이 오지 않는다. 심장이 뛰는 게 느껴진다. 뒷목과 어깨가 불편하다. 생각이 멈추지 않는다. 온갖 소리가 잠에 방해가 되기도 하고, 혼자가 아니라는 증명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어두운 방에 홀로 누워서 집 옆으로 지나가는 지하철 소리를 듣다 보면 어느 순간 지하철 소리가 그친다. 막차가 지나갔다. 기어이 모두 잠을 자러 돌아가버렸다. 이 고요한 밤에 나만 홀로 남겨진 걸 깨닫고 망연자실한다.


양극성 장애에서 불면 증상은 매우 흔히 발생한다. 그렇기 때문에 수면 패턴은 조증 삽화와 우울 삽화를 오가는 흐름을 알아차리는 데에 중요한 힌트가 된다. 정신건강의학과에 가면 의사 선생님은 매번 이런 질문을 하신다. '요즘은 잘 잤나요? 보통 몇 시에 잠드나요? 중간에 깨지는 않나요? 아침에는 몇 시에 일어나시나요?' 그러면 나는 지나간 밤을 돌아보며 내가 얼마큼의 노력을 들여서 잠을 잤는지, 수면의 질은 어땠는지를 생각한다. 불안 혹은 과도한 흥분으로 심장이 미친 듯이 뜀박질을 해서 뜬 눈으로 밤을 새운 날, 안 좋은 꿈을 꿔서 기진맥진해서 일어난 날, 평온하게 잠들어서 평온하게 일어난 날도 이야기한다.


모든 밤이 설명하기 쉬운 건 아니다. 어떤 밤은 정말 길고 벅차다. 그때 당시 나는 이직 준비를 하고 있었고, 관심 있는 회사의 채용 공고가 올라와 지원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시간이 늦어져서 잘 준비를 하고 누웠는데, SNS를 통해 전 직장 동료가 그 회사에 최근 입사한 걸 알게 되었다. '내일 저분한테 연락을 해야겠다. 채용 공고에 대해 물어보고 나를 추천해 줄 수 있냐고 물어봐야지.' 여기까지는 좋았다. 그런데 또 한 가지 생각이 따라붙었다. '근데 저분이 거절하면 어떡하지?'


뒤이어 쏟아지는 걱정이 머릿속을 채웠다. 긍정적인 답변을 받아내려면 어떻게 이야기를 꺼내야 하지? 저 사람이 나를 추천할 정도로 나를 좋게 생각하고 있을까? 귀찮아하면 어떡하지? 갑자기 내일 물어보기가 너무 두려워지는데 차라리 다른 방식으로 지원하는 게 낫지 않을까? 내일 몇 시에 물어보지? 전화로 물어보는 게 낫나? 아님 문자로 물어볼까? 시야는 좁아지고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기회는 이것뿐이야. 어떡하지. 불안 속에서 당장 답을 알 수 없는 문제는 고문과도 같았다. 그렇게 새벽 다섯 시까지 뜬 눈으로 지새웠다. 해가 뜨고 새들이 우는 소리를 듣고 나서야 겨우 잠들었다.


아침에 PT 수업이 있어서 늦잠을 잘 수는 없었다. 생각보다 피곤하진 않았다. 오히려 정신이 또렷하고 핑핑 머리가 돌아갔다. 머릿속에는 오로지 오늘 뭘 할지로 가득했다. 운동을 끝낸 후 그분께 연락을 했다. 그분은 흔쾌히 내부 직원 추천 제도를 알아보고 추천해 주겠다고 답해주셨다. 기쁨을 느낄 새도 없이 또 생각이 밀려들어왔다. 이제 어떡해야 하지? 이것도 준비하고, 저것도 준비해야 돼. 러닝머신을 타면서 흥분을 가라앉히려 노력했지만 머릿속은 계속 빠르게 돌아갔다. 고속도로를 미끄러지듯이 달려 나가는 기분. 그렇게 시작된 경조증은 며칠 동안 계속되었다.


"저는 왜 이렇게 불안할까요. 원래 양극성 장애는 많이 불안한 건가요?" 양극성 장애 환자는 스트레스에 취약하고 스트레스는 불안을 부르며 불안은 불면을 부른다. 불면은 조증 삽화와 우울 삽화를 부른다. 나는 완전히 다른 두 박자에 맞춰 춤추는 꼭두각시 같다. 언제는 격렬하고 언제는 죽은 듯 무기력하다. 이번에는 뭐가 올지 아무것도 짐작할 수 없어서 대비할 수도 없다. 스스로의 상태를 통제할 수 없다는 건 무력감으로 적립된다. 그 무력감은 남들은 모두 잠든 밤 혼자 시커먼 방에서 텅 빈 도시의 적막을 느낄 때 더욱 생생해진다. 그래서 불면은 외롭다.

 

잘 잔 날은 이불 속에 들어가 스르르 잠들었던 기억과 함께 기분 좋게 일어난다. 아침부터 일찍 눈이 떠지는데 하루를 잘 살아내고 있다는 편안한 느낌이 든다. 평소 행복하다는 말에 야박한 나지만 행복하다는 말이 나온다. 잘 자지 못한 날을 선명히 기억하고 있으니 더더욱 행복하다. 진심으로 잘 자고 싶다. 충분히 수면하고 회복해서 그다음 날을 잘 살아내는 사람이고 싶다. 그러나 양극성 장애는 내가 쌓아 올린 모래성을 순식간에 씻어내는 파도 같다. 언제 여기까지 올지 몰랐던, 그래서 더 갑작스럽고 야속한 파도.


야속한 사람도 있다. 애인은 잠을 잘 자는 사람이다. 그는 대체로 나보다 일찍 잠든다. 평소에는 나도 나대로 루틴이 있으니 애인이 나보다 일찍 자도 그런가 보다 한다. 그러나 불면의 밤이 찾아오면 나를 두고 먼저 잠든 그가 야속해진다. 이제 잔다는 그의 마지막 카톡이 서운하다. 지금 당장 순간이동을 해서 잠든 그의 옆에 가고 싶다. 함께 있으면 마음이 편해져서 쉽게 잠들 수 있으니까. 지금 곁에 있다면 좋을텐데.


애꿎은 사람을 야속해해서 뭘 하나 싶어 눈을 감고 웅크린다. 그래, 사랑하는 당신이라도 잘 자야지. 그렇게 소곤거리고는 외로움을 견딘다. 불면도, 불안도 오롯이 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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