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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선선 Oct 20. 2024

그 책을 한 장 한 장 찢어 제 몸을 닦아도 될까요?

씻지도 않고 침대에 누워 꼬박 하루를 보냈다. 내가 지금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시간이 빠르게 순탄하게 고요하게 흐르기를 바라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것 같은 기분이었다. 부담스러워 도피하고 싶었다. 그 결과로 어제 나는 모든 의욕을 상실한 채 가만히 침대에 누워서 시간을 보내다가, 불현듯 일어나 당장 떠오르는 욕구에 충실해서 편의점에 가서 캔맥주와 감자칩을 사 왔다. 하나씩 집어 들어 씹어먹고 마셨지만 아무 맛도 느껴지지 않는다. 다시 침대로 기어들어가서 잠이 오면 잠이 오는 대로 잤다.


종종 이런 꿉꿉한 주말을 보내게 되는 것은 주중의 일들이 너무나 버거웠기 때문인 경우가 많았다. 애석하게도 이런 순간에야 결심이 선다. 글을 써야겠다는 결심이. 그리하여 내가 쓰는 글은 대체로 꿉꿉한 것이다. 나도 누군가처럼 재미있는 유머가 있는 글을 쓰고 싶은데, 그게 잘 되지 않는다. 열등감이 스멀스멀 올라온다. 지금도 내 글을 다른 이의 글과 비교하고 있지. 왜 자꾸 남과 나를 비교하게 되는지, 알고 있다. 그게 쉽게 해결되지 않는 것도 충분히 잘 알고 있다. 


지금 이렇게 괴로운 이유는 최근 이직을 했기 때문이다. 새로이 어느 환경에 적응해야 할 때, 나는 그곳에 존재하는 그 누구보다도 그 환경에 대해 가장 모르는 사람이다. 그래서 내가 하는 말이나 행동이 어찌 보면 과하고 엉뚱하고 불쾌하기까지 할 수도 있다. 그런 생각이 드니까 자꾸만 움츠러드는 것이다. 그렇게 또 벌벌 떨고 어려워하고 실수하고 또 자책하고... 작은 지적에도 크게 마음이 울렁거리고 토할 것 같은 거다. 스스로를 견디기가 힘든 거다. 


이 시끄러운 입을 다물고 싶다. 낯섦과 어색함을 못 이겨 광대 같이 오르락내리락 하하 웃으며 실수를 연발하는 나의 뒷목을 조용히 내려쳐 기절시키고 싶다. 그저 어딘가로 조용히 도망하고 싶다. 


어느 날 집으로 가는 지하철 역 플랫폼 앞에서 지금 좀 무안하더라도 잊어버리라고, 그런 조언을 들었다. 무안함이라는 단어가 지금 내 기분을 설명하기에 너무나 적확해서 반가웠다. 그 말을 해준 이에게 감사하다고 말했지만 내 진심이 전해졌는지는 모르겠다. 지금 내 상태가 무엇인지도 모르고 어쩔 줄 몰라할 때와는 다르게 뭔가 할 수 있을 것도 같다. 이제 그것이 무안함이라는 걸 알았고, 뒤이어 그걸 잊어버리자는 목표가 생겼다.


무안함이 지배하는 시간을 보내다가 책을 읽으면 그나마 마음이 나아지곤 한다. 주중의 내가 그나마 용기 내서 할 수 있는 일은 출근하는 버스에서 책을 읽기. 책을 읽을 여유가 되지 않아도 목사님이 성경책 들고 다니듯이 그냥 책을 품에 안고 다닌다. 그러다 보면 여유가 날 때 읽겠고, 그러면 명상이라도 한 듯이 조금 마음이 편해진다. 현실에서 발을 조금 떼어놓는 것이 어쩌면 내게 가장 필요한 것일지도 모르지. 정말로 책으로 접하는 이야기들은 지금 나를 괴롭히는 모든 맥락들과 관련이 없다. 그래서 나는 책으로 도피한다. 숨이 막힐 때까지 거기에 잠겨있다가 나오기를 바라면서.


내가 좋아하는 글에는 2가지 종류가 있다. 자기 자신조차 견디기 어려워 여러 갈래 분열한 글과 느긋하고 유쾌하여 여유가 있는 글이 있다. 나는 전자를 조금 더 반가워한다. 물론 그들의 삶을 자세히 아는 것은 아니지만 혼자 짐작해 본다. 그리고 자신 있게 결론을 내린다. 이 글을 쓴 이는 나와 비슷한 사람이다. 내가 그들의 글을 읽으며 느끼는 공감은 괜한 것이 아닐 거다. 나와는 다른 시간, 공간에서 살아가는 이들을 이렇게 가까이에서 느끼고 공감할 수 있다는 게 신기하다. 그렇게 혼자가 아닌 것 같은 기분을 느끼면, 신기하게도 외로움도 조금 덜해지고 과반에 속하지 못하였다는 좌절이나 부끄러움, 자책도 조금은 옅어진다. 


고등학교 때 같은 학급의 애가 있었다. 그 애는 항상 말이 많고 동작도 컸다. 나는 그 애한테 까칠하게 굴었다. 그게 쌓여 결국 그 애와 소리 내 부딪혔을 때 나는 속마음을 짜냈다. 너를 보면 내가 실수했던 게 떠올라서 기분 나빠. 네가 나와 비슷해서 짜증 나. 그날 그 애가 내 말을 의아해하고 어이없어했던 걸로 기억한다. 하지만 정말이었다. 그 애가 조바심을 견디지 못해 하는 행동이나 말이 불편했다. 나도 그러니까. 그래서 그 애를 보면 불안했고 불쾌했다. 그 애는 나에게 본인의 불안이나 초조함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았다. 애초에 우리는 그 정도까지의 사이도 아니었으며 나도 그 애의 그런 이야기까지 들을 여유는 없었다. 서로 까끌하게 대하며 아슬아슬하게 지냈을 뿐이다. 조금 더 여유가 생긴 후에 만났으면 그럭저럭 속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친구가 될 수 있지도 않았을까 싶지만. 그때는 나와 비슷한 사람을 보면 혐오감이 울컥 솟아서 견딜 수가 없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에는 나와 비슷한(그렇다고 생각되는) 사람이 쓴 글을 읽으면 위로가 되었다. 적어도 본인이 문제를 가지고 있다는 자각이 있고, 괴로워서 글로 해소하려고 했겠지. 이미 세상을 떠난 사람들일수록 마음 편히 공감할 수 있었다. 시간도 공간도 어느 것도 나와 겹치지 않는 사람이므로. 나와는 상관없는 사람, 그런데 나와 비슷한 사람으로 추정되는 사람. 그들이 쓴 글을 아껴 읽는다. 시간이 지나면 내 글도 누군가에게는 그런 글일 수 있을까?


눅눅한 주말은 주로 나 혼자다. 나는 나의 어려움을 온몸으로 끌어안고 아무것도 할 수 없고 어떤 만족도 느끼지 못한다. 그게 어제부터 오늘 아침까지였다. 기운을 내서 샤워를 하고 겨우 밖으로 나가면 그나마 나아진다. 오늘 카페로 나오는 길에 햇살이 무척 밝았다. 햇살이 밝은 건 집안에 있을 땐 정말 짜증 나는 일이다. 침대에 누워있는데 내 침대는 창문 바로 앞이니까. 햇살이 얼굴에 쏟아지는 게 싫어서 암막 커튼으로 꽁꽁 가려두고 밤이 되기를 기다린다. 하지만 밖에 나왔을 때는 참 좋다. 세상이 그래도 아름답다고 생각한다.


최근 읽고 있는 소설책과 노트북을 들고 나왔다. 복잡한 마음을 가다듬고 월요일로 넘어가고 싶은데, 그러기 위해서는 글을 쓰거나 읽거나 해야 할 것 같았다. 


동경하는 사람이 있다. 카페 음료를 기다리면서 블로그 앱을 켰다가 오랜만에 그가 쓴 블로그 글을 읽었는데, 여백이 많음에도 아름다운 글, 생각과 감정이 부러워서 질투가 났다. 잘 우는 것이 글에도 보이는데 그럼에도 강해 보이는 사람. 그 사람은 글을 쓰더라. 잘 울지만 강한지는 자신이 없는 나도 글을 쓰면 기분이 좋아질까 싶어서 글을 쓰기를 택해 여기까지 적었다.


커피는 두 잔 째, 쿠키는 절반 정도 먹었고, 재즈풍의 creep이 흐르는 카페에서 털어내는 글을 쓰고 있다. 눅눅함이 조금 가시는 감이 들기도 하고, 오히려 푹 잠겨버린 것만 같기도 하고. 여기에서 나를 꺼내 담백하게 깨끗하게 만들어주는 것은 결국 다른 이가 내미는 손일 것이고, 그가 쓴 글일 것 같다. 


오늘 가져온 소설책은 며칠 전 가름끈으로 표시해 둔지 모르고 넘기려다가 그만 한 페이지의 끄트머리가 가름끈을 따라 3cm 정도 찢어졌었다. 이참에 그걸 끝까지 찢어버리면 어떨지. 꿉꿉한 나를 벅벅 닦아내면 좋진 않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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