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독사
못 배운 설움이 컸던 아버지는 그 옛날 노가꾼답게 술을 달고 살았다. 술로 스트레스를 푸는 것 같지는 않았다. 힘이 들어서 술을 먹고, 술을 먹다가 더 화가 나는 사람 같았다.
아버지의 당일 주사여부는 오토바이 소리로 알 수 있었다. 오토바이를 집까지 무사히 타고 오시면 그날은 조용한 날이지만, 시동을 끈 채 끌고 오시는 날은 난리가 예정된 날이다.
어느 날 야자를 끝내고 집으로 오는 길이었다. 어떤 아저씨가 오토바이를 끌고 구시렁구시렁, 이리 비틀 저리 비틀 팔자 걸음을 걷고 있었다.
’ 제발••아니여라!‘
‘왜 슬픈 예감은 틀린 적이 없나’
노래 가사처럼 자고로 슬픈 예감은 틀린 적이 없다. 나는 오토바이를 끌고 비틀거리다 넘어지다 앞서 걷던 아버지를 끝까지 아는 척하지 않았다. 대문에 들어서는 아버지를 보고 한참 지나 집에 들어갔다.
잔뜩 취한 아버지는 주야간 일에 지쳐 피곤한 새어머니를 깨워서 도돌이표와, 깐족깐족 버튼을 수도 없이 눌러대며 밤새 시비를 걸었다. 그러다 어김없이 준비된 분노발짝 버튼은 어느 지점에서 예고없이 눌리고 아버지는 온갖 욕을 하고 어머니를 두들겨 패기 시작했다.
어머니가 도망을 가면 도끼며 낫이며 온갖 살인연장을(?) 찾아 집안을 샅샅이 뒤지며 괴력을 발휘했다. 나는 아직도 살기 어린 아버지의 그 눈빛을 기억한다. 순하고 잘 생긴 아버지는 온데간데없고 광인만 보이는 것이 사람이 술을 먹은 게 아니라, 술이 사람을 먹는 게 틀림없다.
어머니는 늘 그러셨다.
“니 아버지랑 계속 살다가는 내가 죽어나가지. 그렇게 안되려면 이혼해야 된다! “
아버지는 주사는 집안 곳곳, 네 여자의 마음에도 깊은 흔적을 남겼다. 벽과 문에는 구멍을, 거실에는 토와 부서진 살림살이를, 마당에는 여기저기 다 망가진 연장들을. 우리는 아프고 무서웠고, 맞고 있는
어머니를 지킬 수 없어 무기력했다.
아버지가 유독 더 험하게 군 뒷날은 새어머니도 본보기용 분풀이가 필요했다. 아버지 보란 듯이 나에게 그것들을 치우라고 하셨다. 술과 함께 튀어나온 오물 냄새는 하루 종일 코끝에서 사라지질 않았다.
“네 아빠 술 먹고 나 때리고, 살림 부수는 거 네가 증인 해야지! 내가 니 아빠랑 이혼하면 친가식구들이 다들 나 보고 독한년이라고 하겠지. 내가 왜 니 아빠랑 못 살고 이혼하는지 네가 말해주면 네 말은 믿겠지! “
나는 그날부터 열심증인이 되었다. 내가 아버지의 그 못된 짓거리의 증인이 된다면 나도 새어머니의 친딸이 될 수 있지 않을까? 혹시 이혼을 하시더라도 저런 무능력하고 술만 마시는 아버지로부터 나를 구해주실 거라고 생각했다.
이런 나의 아쉬움을 안 어머니는 언니와 동생보다 나에게 아버지의 만행을 더 세세히 설명하곤 하셨다. 어린 내 마음에는 아버지에 대한 원망과 분노가 쌓여갔다.
아버지는 매번 이제 다시는 그러지 않기로 약속을 했고, 주사는 2년 넘게 잠잠했다. 그래서 어머니는 아파트도 계약했고, 한동안 집이 평안했다.
그러나 개버릇 남 못 준다.
건강이 안 좋으셔서 우리 집에 오신 외할머니가 계신 어느 날 아버지는 마침내 화산처럼 폭발해 버리고 말았다. 2년 간 힘을 응축했다가 터뜨려서 그런지 괴물 같았다.
그날은 말리던 나도 주먹에 맞았고, 외할머니도 도망을 가셔야만 했다. 나도 아버지를 달래거나 더 어째 볼 도리가 없었고, 그 주사의 결과는 가정파괴였다.
그 주사가 아버지와 어머니의 마지막이 되었다. 우리 세 자매는 이미 성인이 된 후여서 어머니는 더 이상 참을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아파트를 사기로 하고 걸어둔 계약금 500만 원을 다 날리고 우리 가족은 어머니가 쥐어준 몇 백씩을 쥐고 각자 원룸으로, 시골집으로 흩어지게 되었다.
그 후 어머니는 자신의 이혼의사를 숨긴 채 아버지를 살살 달래서 시골집에 데려다 놓고 새벽에 몰래 집을 나왔다고 했다. 아버지가 이혼을 해주지 않고 빌기만 하자, 나를 증인으로 세우겠노라 협박을 했다고 한다. 아버지는 기차를 타고 6시간을 올라와 수원 가정법원에서 도장을 찍었다고 다시 내려가셨다고 했다.
아버지가 시골에 홀로 남겨진 채 3년이 지나는 동안 나는 결혼을 하고, 허니문 베이비를 갖고 그 해에 출산까지 했다. 아버지는 우리 신혼집에 다녀가시면서 그 해 연말에 있을 큰아이의 돌반지를 미리 해주고 가셨다.
아이를 낳고 시댁에 머무를 때였다. 들기름에 간장과 김을 넣고 밥을 비벼주면 아이가 잘 먹는다고 했더니 시골에서 짠 들기름을 택배로 보냈다며 아버지가 전화를 주셨다. 그리고 뒷 날 신문에 둘러싸인 들기름이 배송되었다. 아버지께 전화를 하려던 참이었는데 마침 전화가 왔다.
“아빠~아, 고모??”
“ㅇㅇ야, 너희 아빠 돌아가셨다••어째야 쓰까이 “
이게 무슨••꿈인가, 영화인가••
아버지는 그렇게 가셨다. 이틀 째 일을 나오지 않자, 이웃 아주머니가 창문을 부수고 방에 잠든 채로 돌아가신 아버지를 발견했고 고모에게 연락을 했다. 돌아가시고 이틀 후였다.
이것이 내 인생에 세 번째 소중한 인연과의 이별이었다.
사별과 이혼••나는 한 번도 아버지께 얼마나 힘드셨는지 물어본 적이 없다. 나도 그때는 어렸다고 핑계를 대고 싶다. 하지만 그때의 나보다 더 어린, 나의 막내딸이 가끔 내게 힘들지 않냐고 묻는 걸 보면 나는 타고난 효심이 작은가 보다.
좀 더 크면 아버지의 마음을 물어볼 수 있을 줄 알았다. 자식도 내 마음대로 되지 않지만, 부모의 죽음은 더더욱 내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 그렇게 풍수지탄을 몸소 체험했다.
장례를 치르고 아버지가 사시던, 그리고 어린 나와 할머니, 작은아버지와 함께 살았던 시골집을 정리하러 갔다. 마당에 발을 내딛자마자 외로움과 고독이 온몸을 파고들어 실제로 심장이 아프고 온몸이 저렸다. 부엌에 들어서니 아버지의 마지막 식사였을 라면과 냄비에 그대로 꽂힌 젓가락이 나를 맞이한다.
아버지는 시골집 마당입구에 동백나무를 심으셨다. 그 나무가 점점 커지더니 마당 반을 차지한다. 겨울이 되면 어김없이 빨간 꽃이 핀다. 문득 궁금해서 동백꽃의 꽃말을 찾아보니 그리움이다. 동백꽃 꽃말이 무엇인지 알고 심으셨을 리는 없다.
그래서 내 마음이 더 아프다.
‘내가 그리워 동백나무를 심으셨나?’
‘어머니가 그리워 동백나무를 심으셨나?’
나는 올 여름에도 남편과 두 아이와 그 시골집에 다녀왔다. 지붕은 무너져 내려 앉았지만, 동백나무는 더 커져서 마당을 덮었다. 아팠던 우리 가족의 상처는 헌집처럼 세월 앞에 허물어지고, 서로에 대한 그리움과 용서만 동백나무처럼 붉어지길 바란다.
두 아이가 얼굴 한 번 본 적 없는 외할아버지를 그리워한다. 함께 맛있는 것도 먹고 좋은 옷도 좀 사드리고 그랬으면 좋았을 것 같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