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면아이
내가 평범한 엄마, 여자들과 좀 다르다는 사실을 깨닫는 데는 그다지 오래 걸리지 않았다. 마치 봇물이 터지듯이 숨겨둔 감정들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어디서, 언제 올라올지 몰랐다. 언제 적 감정인 지도 몰랐다.
그 무의식에 숨겨진 상처가 퉁퉁 불어 터진 나를 찢고 나오는 기분이었다. 속이야 썩어 문드러지든 말든 겉으로는 꽤나 괜찮은 사람이어야만 했는데.. 자기 통제력이 힘을 잃어갔다.
어느 날 내가 봐둔 옷이 있다고 하자 남편이 사주겠다고 했다. 일을 마치고 돌아오는 남편이 집에 오기만 기다렸다가 두 딸을 데리고 마트에 갔다. 그런데 이것저것 사달라고 조르는 딸들 것부터 구경하느라 내가 가려던 옷가게 문이 닫혀버렸다.
딸들은 레고며 비즈, 장난감을 사서 기분이 정말 최고였다. 남편은 나에게 좀 미안했는지 내일 다시 오자고 가볍게 인사치레를 하고 우리는 집으로 돌아왔다.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그냥 애들이 좋아하니까 됐다고 생각했다. 그게 나의 본심인 줄 알았다.
그런데 집으로 돌아와서 설거지를 하다가 갑자기 눈물이 주르륵 흘렀다. 그리고 온몸에서 분노촉수가 닭살처럼 돋아나는 기분이 들었다. 이내 서러움이 복받쳐 엉엉 울기 시작했다.
딸들은 놀라서 설거지하는 게 힘들어서 그러냐며 걱정을 했다. 남편은 그간 내게 들은 풍월이 있어서 옷을 못 사서 속상해 그러냐며 나름 위로를 해줬다. 하지만 본인이 생각해도 그건 그리 펑펑 울 일은 아니다 생각을 했던 것 같다. 나도 그렇게 생각했다. 알 길 없는 아내의 마음을 위로해 보려고 남편은 그렇게 한참 동안 나의 등을 쓰다듬으며 눈치를 봤다.
나도 도무지 알 수 없었다.
‘ㅇㅇ아, 왜 그래? 무슨 생각이 났어? 옷을 못 사서 속상해서 그래? 그까짓 거 몇 푼이나 한다고 내일 가서 사면 된다는 걸 아는데 그렇게 서럽게 운다고?‘
그 일이 있고도 한참 동안 나는 내 마음이 어딘가 아프다는 사실을 짐작으로 알 수 있었지만 구체적으로 어디가, 어떻게 아픈 건지는 알지 못했다.
‘나는 두 딸을 질투할 정도로 덜 자란 어른인 걸까?‘
그 질문의 끝에 어린 내가 서 있었다. 새어머니의
친딸인 언니와, 새어머니와 아버지가 낳은 여동생, 그리고 그 가운데 생뚱맞게 끼어버린 배다른 나. 나는 늘 가족의 일원이 아니라 아웃사이더 같았다. 때로는 학교에서도 안 당해본 왕따가 된 거 같은 서러운 마음이 들기도 했다.
아, 내 몸에 스며있던 소외감이 발현된 것일까?
나는 공부를 열심히 했다. 음식도 가리지 않고 주는 대로 잘 먹었다. 김밥, 계란찜 등 음식도 곧잘 했다. 어머니는 건강하지 않은 언니 앞에서, 공부도 못 하고 말썽만 부리는 동생 앞에서 그런 나를 칭찬해 주곤 하셨다.
어떤 날은 1등을 한 나를 보시고는 아픈 언니에게
“너는 00이 똥구녕이라 핥아라!”라고 하셨다. 그 말은 언니의 마음에 콕 박혀 나를 미운 라이벌로 만들어 버렸다. 이후로 언니는 동생이 생겨 좋아하면서도 어린 내게 선을 넘지 못하게 했다.
분명히 나을 치켜세워주는 말인데.. 그런데 어머니의 그런 칭찬을 받으면 이상하게 내가 언니와 동생에게 못 할 짓을 한 것만 같았다. 그러다 결국 내가 3:1로 지고 미운오리새끼처럼 외톨이가 된 기분이었다.
나나 언니나 동생이나 그런 거친 말을 하는 어머니 밑에서 정서적으로 정상으로 자랄 수가 없었던 건 분명하다. 그 사실은 친모인 두 자매에게나 계모인 나에게나 차별이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