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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재국 Feb 28. 2023

[34] 김성근 대신 이광환, 김기범 거르고 이진

베팬알백 | 베어스 팬이라면 알아야 할 100가지 이야기

『프로야구단 OB가 이광환(41) 2군 감독에게 팀 지휘권을 넘겼다. OB는 올해로 계약이 끝나는 김성근 감독의 후임으로 82년 출범 이래 ‘장래의 OB 감독’으로 점 찍혀 온 이광환 씨를 팀의 제3대 감독으로 맞이했다. 신임 이 감독의 계약기간은 4년이며 계약금과 연봉은 각 4천만 원. OB의 창단멤버(코치)로 첫해 우승에 기여했던 이 감독은 86년과 87년엔 일본 ‘세이부’ 팀과 미국 메이저리그의 ‘세인트루이스’ 팀에서 1년씩 야구연수를 받고 귀국, 88년엔 OB의 2군 감독을 맡았었다. 중앙고 고려대 한일은행에서 선수생활을 한 신임 이 감독은 “생각보다 빨리 감독직을 맡게 되어 부담감은 있으나 최선을 다하겠다”며 “OB 특유의 끈질김에 타격력을 가미해 팬을 의식한 경기를 해보고 싶다”고 포부를 밝혔다.』 <1988년 9월 9일자 동아일보>


 [베팬알백] 34편은 1980년대의 끝자락, 1989년의 이야기로 시작한다. 1989년은 OB 베어스뿐만 아니라 프로야구 전체를 놓고 봐도 격변의 시기였다. 지금까지와는 완전 다른 새로운 제도와 야구가 시작됐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1980년대 관중으로 가득 찬 잠실야구장 전경 ⓒ두산베어스


1989년 KBO리그에 불어 닥친 변화의 바람들


 1989년엔 프로야구에 많은 변화가 찾아왔다. 그래서 KBO리그 전체의 그림부터 먼저 살펴볼 필요가 있다.

 팀당 경기수가 108경기(1986~1988년)에서 120경기로 늘어났고, KBO 출범부터 진행된 전·후기리그 제도가 폐지되고 단일시즌제가 채택됐다. 그러면서 포스트시즌 제도가 완전히 탈바꿈했다.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는 현 포스트시즌 제도의 기본 틀이 바로 이때부터 출발한 것이었다.


 전·후기리그 제도의 가장 큰 맹점은 처음부터 끝까지 전력을 다하는 팀이 적다는 것이었다. 전기리그에서 우승한 팀은 한국시리즈에 대비해 후기리그를 느슨하게 운영하고, 전기리그 싸움이 여의치 않은 팀은 일찌감치 레이스를 포기하고 후기리그를 노리는 전략으로 나서기도 했다. 최선을 다하지 않는 팀이 많을수록 리그의 박진감은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이런 단점을 보완하고 시즌 끝까지 팬들의 관심을 붙잡기 위해 제도에 손질을 가했다. 1989년부터 페넌트레이스 4위까지 포스트시즌 진출권이 주어졌다. 4위와 3위가 3전2선승제 준플레이오프를 치르고, 여기서 승리한 팀이 2위와 5전3선승제 플레이오프를 치르게 된다. 그리고 플레이오프 승자가 정규시즌 1위팀과 7전4선승제의 한국시리즈에서 격돌하는 방식이다.


 7개 구단 중 4개 구단이 가을야구에 나간다는 점과 4위가 가을에 반짝 상승세를 타면 한국시리즈 우승까지 차지할 수 있다는 점에서 불합리성이 지적되기도 했으나, 팬들과 구단들은 대체로 “4위 안에만 들어도 우승을 바라볼 수 있다”며 새로운 포스트시즌 제도를 환영했다. 실제 1988년 KBO리그 총 관중수는 193만2145명이었으나 1989년 총 관중수는 288만3669명으로 늘어났다. 1년 만에 무려 수치가 49.2%나 껑충 뛰었다. 페넌트레이스나 포스트시즌이나 흥행의 토대가 만들어졌고, 한국프로야구에서 처음 도입한 이러한 계단식 포스트시즌 방식은 훗날 메이저리그와 일본프로야구에서도 차용하기에 이르렀다.


 전력에도 큰 변화들이 있었다. 특히 1989시즌을 앞두고 롯데와 삼성이 두 차례에 걸쳐 단행한 ‘블록버스터 트레이드’는 1980년대를 통틀어서도 최고의 빅뉴스였다. 최동원과 김시진, 김용철과 장효조가 유니폼을 맞바꿔 입는 초대형 거래가 이뤄졌다.


 1988년 11월에 롯데 투수 최동원 오명록과 포수 김성현이 삼성으로 가고, 삼성 투수 김시진 전용권과 내야수 오대석이 롯데로 이적하는 4대3 트레이드가 터졌다. 그리고 한 달 뒤인 12월에 삼성 간판타자 장효조와 좌완투수 장태수, 롯데 중심타자 김용철과 좌완투수 이문한이 유니폼을 맞바꿔 입는 2대2 트레이드가 이어졌다.


 트레이드 자체가 귀하던 시절. 특히 간판스타의 트레이드는 상상도 못 하던 시절이었기에 충격은 더욱 컸다. 이들이 새로운 팀에서 어떤 활약을 펼칠지, 삼성과 롯데의 전력이 어떻게 변할지, 이것이 프로야구 판도에 어떤 변화를 몰고 올지, 세간의 관심이 쏠릴 수밖에 없었다.



OB의 선택 1. 김성근 관리야구에서 이광환 자율야구로

선수단 훈련을 지켜보는 이광환 감독 ⓒ두산베어스


 1989년의 변화를 논할 때 각 팀 사령탑들이 대거 교체됐다는 점도 빼놓을 수 없다. 7개 구단 중 절반이 넘는 무려 4개 구단의 사령탑이 바뀌는 격변의 물결이 일었다.


 MBC 청룡은 ‘스파르타식 훈련’으로 유명한 배성서 전 빙그레 이글스 창단 감독을 영입해 새 시즌을 준비했다. 삼성은 박영길 감독과 결별하고 정동진 수석코치를 감독으로 승격시켜 지휘봉을 맡겼다. 김성근 감독은 OB를 떠나 만년 하위팀 태평양 사령탑으로 옮겼다.


 그리고 OB 베어스는 김성근 감독이 떠난 자리에 이광환 2군 감독을 선임했다. 김성근 감독과 이광환 감독은 캐릭터 자체가 대척점에 있을 뿐만 아니라 야구관 자체가 180도 달랐다는 점에서 OB는 종전과는 다른 새로운 야구를 예고했다.


 김성근 감독은 “야구는 감독이 한다”며 하나부터 열까지 모든 것을 본인이 직접 챙기고 주도하는 ‘관리야구’의 대명사였다. 투수력과 수비력을 바탕으로 세밀하면서도 오밀조밀한 작전야구를 추구했다.


 반면 이광환 감독은 “야구는 선수가 한다”며 선수와 코칭스태프에게 최대한 자율권을 부여하면서 미국 유학 시절 배워온 ‘자율야구’를 들고 나왔다. 선발 로테이션을 확립하고 공격력을 가미한 선 굵은 야구로 팬들이 좋아하는 야구를 지향했다.


 이 감독은 취임 후 “실책률이 다소 높은 선수라도 방망이에 자신 있는 선수를 쓴다”고 하고, “미국과 같이 5회 이전에는 희생번트를 하지 않는다”고 선언했다. 종전 김영덕-김성근 감독 시대에서 굳어진 ‘견실한 야구’ 또는 ‘수비의 야구’라는 OB 이미지를 바꾸겠다는 의지였다. 


 훈련 시간도 실전 위주로 꾸렸다. 수비 훈련을 할 때도 종전의 끊임없는 펑고 훈련 대신 실전처럼 훈련했다. 긴 시간 ‘지옥훈련’을 하는 것보다 메이저리그처럼 짧은 시간에 집중력을 갖고 훈련하는 것이 낫다는 뜻이었다.


 합숙훈련을 피하고 선수들이 경기 후에는 샤워를 하고 집에 가서 식사를 하는 방식으로 변경한 것도 새로운 시도였다.


 OB 구단도 이광환 감독의 야구 방향에 동의했다. 한마디로 ‘김성근식 관리야구’에서 ‘이광환식 자율야구’로 팀컬러 변화를 시도하며 분위기 쇄신을 노렸다.


 감독이 바뀌면서 코칭스태프에도 변화의 기류가 흘렀다. 기조는 크게 2가지였다. 우선 ‘OB맨’으로 구단을 정비하겠다는 의지였다. 그리고 김성근 감독의 색채를 지우는 일이었다.


 1989년부터 단일시즌제가 채택됨에 따라 선수단 규모를 키우고, 코치도 더 많이 확보하는 게 필요했다. 전·후기리그 제도에서는 단기간에 힘을 쏟아붓는 승부를 하면 되지만, 장기 레이스에서는 호흡 긴 승부를 해야 하고 결국은 선수층이 승부의 열쇠가 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OB는 원년 선수 출신의 젊은 코칭스태프를 대거 기용했다. 그리고는 ‘코치 분담제’를 실시했다. 이광환 감독 취임 이후 코칭스태프의 역할 분담을 고민해 오다 이선덕 코치를 2군 감독대행으로 정식 임명하고, 1군 타격코치에 김우열, 투수코치에 박철순, 작전코치에 유지훤, 수비코치에 이삼열을 기용했다. 2군 타격코치는 사실상 선수생활을 마감한 윤동균에게 맡겼고, 이홍범을 1·2군 트레이닝코치에 임명했다. 박철순은 플레잉 코치로서 여차하면 마운드에 올리려는 계획을 세워두고 있었다.



OB의 선택 2. 국가대표 김기범 대신 이진 1차지명 화제

1989년 1차지명 좌완투수 이진 ⓒ두산베어스


 1989년 또 하나의 큰 변수는 특급 신인들이었다. 1988년에 서울올림픽이 열리면서 아마추어 국가대표 특급 선수들의 프로야구 진출이 유보된 상태였다. 정상적이었다면 1987년과 1988년에 프로에 뛰어들었어야 할 대어들이 국가적 대사를 위해 실업야구팀에 입단해 아마추어에 묶여 있었다. 이들이 1989년 KBO리그에 한꺼번에 유입되면서 야구계 전체에 신인 풍년가가 울려 퍼졌다. 1987년 삼성 1차지명 강기웅(한국화장품)과 MBC 1차지명 노찬엽(농협), 1988년 빙그레 1차지명 송진우(무적)와 해태 1차지명 조계현(농협) 등이 실업팀을 거쳐 프로 유니폼을 입게 된 대표적인 선수들이다.


 서울올림픽으로 인해 1~2년간 프로 진출이 유보된 선수뿐만 아니라 대학 졸업 선수와 실업팀에서 프로로 전향한 선수 중에서도 유달리 특급 유망주들이 많았다. 해태에 1차지명된 이강철(동국대)은 1989년 15승을 수확했고, 삼성 유명선(계명대-세일통상)도 14승을 거뒀다.


 서울을 연고로 하는 OB와 MBC는 1986년부터 1차지명 선수를 놓고 동전던지기 등으로 우선권을 가려왔는데, 1989년 서울팀 1차지명 후보로는 일찌감치 국가대표 출신의 좌완 특급 김기범(건국대~한국화장품)이 거론돼 왔다.


 김기범은 이미 충암고 시절부터 청소년대표로 두각을 나타냈다. 건국대 2학년 때인 1985년 대륙간컵세계야구선수권대회(쿠바)에서는 혼자 4승을 올리며 한국을 준우승까지 이끌었고, 최우수선수(MVP)로 뽑혀 국제무대에서도 이름을 떨쳤다. 이선희부터 시작해 구대성 김광현으로 이어져온 ‘좌완 일본 킬러’의 계보 한 자리에 포함시킬 수 있는 선수였다. 그는 1988년 서울올림픽 대표팀 투수로 선발되기도 했다.


 1989년 구단별로 선택할 수 있는 연고지 1차지명 선수는 3명. OB와 MBC는 1988년 11월 3일 KBO에서 서울지역 신인선수 1차지명 드래프트를 실시했다.


 OB는 모처럼 동전던지기에서 이겨 우선권을 잡았다. 박노준을 선택한 1986년에 이어 두 번째였다.


 그런데 여기서 예상과 다른 지명 결과가 나왔다. OB가 1차지명으로 김기범을 거르고 이진을 선택한 것이었다. 김기범이라는 이름값있는 선수를 두고 이진을 찍었다는 사실만으로 큰 화제가 됐다. 팬들뿐만 아니라 야구계 모두가 깜짝 놀란 선택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이진은 김기범에 비하면 아마추어 시절 무명에 가까웠다.


 물론 OB가 1차지명을 할 만한 근거는 있었다. 이진은 성균관대 3학년 때부터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하더니 대학 4학년 때 5승1패를 거두며 스카우트들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김기범은 어릴 때부터 팀 내 에이스로 각종 대회에서 많은 공을 던졌다. 기량 면에서는 이미 검증돼 누구나 인정을 하지만 프로에서 선수 생명이 길게 가지 못할 위험성이 있다고 판단했다. 실제로 대학 시절 3학년 때부터 부상이 잦아 명성에 비해 활약도는 떨어졌다.


 반면 배명고-성균관대 출신의 이진은 OB가 원하는 왼손 파이어볼러였다. 사실상 윤석환을 제외하면 쓸 만한 왼손투수가 없었던 OB로서는 오랫동안 마운드를 이끌어나갈 좌완이 필요했다. 이진은 평균적으로 시속 145㎞ 안팎의 공을 가볍게 던졌고, 최고 구속 148㎞를 찍었다. 요즘의 기준으로 봐도 이 정도면 왼손 투수로서 매력적인 구속인데, 그 시절이라면 말할 것도 없다. 특히 뒤늦게 투수로 두각을 나타냈기 때문에 어깨가 싱싱하다는 장점이 있었다. 명성에서는 김기범이 앞서지만 성장 가능성과 장래성을 놓고 보면 이진을 점찍은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1989년 OB 1차지명 투수 3총사. 왼쪽부터 이진, 김동현, 김보선 ⓒ두산베어스


 OB는 3명까지 선택할 수 있는 1차지명에서 결국 이진과 함께 잠수함 투수 김동현(배재고-동국대), 우완정통파 김보선(충암고-한양대)을 찍었다. 셋 모두 키 180㎝ 이상의 좋은 신체조건을 지닌 투수들이었다.


 MBC는 당연히 1차지명으로 김기범을 선택했다. MBC 역시 김기범이 아마추어 시절 혹사를 당하고 대학 후반부에 잦은 부상으로 등판이 들쑥날쑥했던 점이 고민스럽기는 했지만, 어쨌든 몸만 괜찮다면 즉시전력감을 넘어 에이스의 자질을 갖춘 투수라고 평가할 수밖에 없었다. MBC는 김기범과 함께 서울올림픽 대표팀 외야수 최훈재(중앙고-단국대), 내야수 나웅(선린상고-한양대)을 지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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