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B는 1995년 페넌트레이스에서 8월말까지 1위 LG에 6게임차나 뒤지다 9월의 질주로 0.5게임차 뒤집기 우승에 성공하는 기적을 만들었다. 1982년 KBO 원년 한국시리즈 우승 이후 13년 만에 한국시리즈 진출 티켓을 거머쥔 OB는 이제 누가 파트너가 될지 느긋하게 기다리면 됐다.
플레이오프는 예상 밖으로 흘러갔다. 정규시즌 3위 롯데가 2위 LG에 4승2패를 거두며 한국시리즈 진출권을 얻었다. 1994년 우승 팀이자 강력한 우승 후보로 꼽히던 LG는 막판에 OB에 반게임차로 뒤져 한국시리즈 직행이 무산되자 허탈해진 탓인지, 정규시즌에서 5.5게임차나 앞섰던 롯데에 일격을 당하고 말았다.
이로써 한국시리즈 사상 OB와 LG가 최초로 맞붙는 ‘덕아웃 시리즈’는 무산됐다. 그 대신 사상 최초의 ‘경부선 시리즈’가 성사됐다.
[베팬알백] 48편은 OB 베어스 시절의 마지막 한국시리즈 이야기다. 3패(2승)를 먼저 당한 뒤 역전 우승에 성공한 1995년 가을의 기적. 그 전설의 시작과 끝을 되돌아본다.
기적의 한 시즌을 완성한 1995년. 당시 구단의 캐치프레이즈 ⓒ두산베어스
●13년만에오른KS, 롯데와‘경부선시리즈’
OB는 그해 투타에서 안정된 전력을 자랑했다. 불과 1년 전, 선수단 집단 이탈 사태로 위기에 빠졌던 팀이 그야말로 환골탈태했다. 팀타율(0.266) 1위에다 서울팀 최초로 세 자릿수 홈런(101)을 기록하는 기염을 토했다. 전통의 홈런 군단을 제치고 8개 구단 중 팀홈런 부문 1위를 차지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컸다. 김상호가 서울팀 선수 최초로 홈런왕(25개)과 타점왕(101개)에 올랐고, 심정수(21홈런)와 이도형(14홈런) 등 신진세력이 화력의 중심에 가담한 결과였다. 고졸신인 정수근은 주로 대주자와 대수비로 출장하면서도 25도루를 기록해 두산의 기동력을 업그레이드시켰다.
마운드에서는 김상진(17승)과 권명철(15승) 원투펀치가 32승을 합작했고, 박철순(9승)과 장호연(7승)도 노익장을 과시했다. 전년도 부상으로 이탈했던 김경원(6승15세이브, 평균자책점 2.93)이 돌아왔고, 김경원이 부진할 때 이용호(3승10세이브·평균자책점 1.95)가 마무리를 맡아 뒷문이 강해졌다.
신인 투수 중에서도 두각을 나타내는 선수가 있었다. 중앙대 출신으로 그해 2차지명 2라운드에 뽑은 진필중은 후반기에 돌풍을 일으키며 시즌 6승2패2세이브를 거뒀다. 특히 9월에만 4연속 선발승을 올리는 상승세를 타면서 한국시리즈에서도 중책을 맡게 된다.
김용희 감독이 이끈 롯데는 그해 전준호(69도루)를 중심으로 팀도루를 무려 220개나 성공하면서 KBO 신기록을 작성했다. 대부분의 선수가 도루 능력을 갖춰 ‘뛰는 야구’에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팀이었다. 1992년 우승 당시에는 ‘소총부대’였지만, 1995년에는 국가대표 출신 신인 마해영(18홈런)과 2년생 임수혁(15홈런)이 가세해 장타력도 갖춘 팀으로 변모했다.
염종석 강상수 윤형배 김상현 등이 군복무(방위)를 하면서 선발 로테이션 구성에 어려움을 겪었지만, 맏형 윤학길(12승)과 주형광(10승)이 주축을 이루고 강상수 가득염이 7승씩을 거들었다. 7경기만 치르면 되는 한국시리즈 무대이기에 무시할 수 없는 마운드 전력이었다.
1995년 OB 베어스 지휘봉을 잡자마자 팀을 한국시리즈로 이끈 김인식 감독 ⓒ두산베어스
●1차전 10월 14일(잠실)=실책으로패배…‘험난한여정’ 예고
“7전4선승제 한국시리즈니까 1차전은 꼭 이겨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당연히 구위가 가장 좋은 에이스를 1차전 선발로 내야 했다. 그래야 에이스를 7차전까지 최대한 많이 활용할 수 있으니까.”
김인식 전 감독은 1995년 한국시리즈를 돌아보면서 김상진을 1차전 선발 카드로 낙점하기까지 큰 고민이 없었다고 털어놨다. 김상진이 한국시리즈라는 큰 무대를 경험하지 않았지만, OB 내에서 1982년 한국시리즈 우승을 경험한 이는 어차피 KBO 최고령 투수 박철순밖에 없었다.
김상진은 그해 17승을 올린 OB의 에이스이기도 했지만, 정규시즌 마지막 8경기에서 6승무패에 평균자책점 1.71을 기록할 정도로 기세가 좋았다. 시즌 막판 OB가 LG를 추월하는 데 결정적인 몫을 해낸 투수이기도 했다.
롯데 선발투수는 염종석. 1992년 17승으로 신인왕에 오르며 롯데 우승의 주역으로 맹활약한 투수다. 1995년에는 군복무 관계로 정규시즌 7승7패에 그쳤지만, 평균자책점 2.98(9위)로 만만하게 볼 투수가 아니었다.
선취점은 롯데가 뽑았다. 그것도 실책 때문이었다. 2회초 선두타자로 나선 4번타자 마해영의 땅볼을 OB 유격수 김민호가 가랑이 사이로 빠뜨렸다(김민호는 이 실책으로 1차전 패배의 빌미를 제공했지만, 이후 한국시리즈 우승 영웅으로 거듭난다). 이어 김응국의 유격수 땅볼. 더블플레이가 완성되는가 했으나, 이번엔 공을 넘겨받은 2루수 이명수의 1루 악송구가 나오고 말았다. 1사 1루. 여기서 김응국은 별명 ‘호랑나비’처럼 가뿐히 2루 도루에 성공했고, 김종훈의 우전 적시타 때 홈을 밟았다.
롯데는 4회초 2점을 추가하며 3-0으로 앞서나갔다. 박정태와 마해영의 연속 안타에 이어 김응국의 좌익선상 2루타와 김종헌의 희생플라이가 이어졌다.
오랜 휴식이 독이 된 것일까. OB는 수비도 흔들렸지만, 타선도 감을 잡지 못했다. 염종석의 역투에 막혀 6회까지 3안타 무득점에 그쳤다.
답답하던 흐름은 7회말 소용돌이쳤다. 1사 후 5번타자 이도형의 중전안타와 김형석의 우월 2루타로 2·3루 찬스. 주장 이명수의 2타점 좌전 적시타가 폭발하면서 2-3, 1점차로 따라붙었다. 염종석 강판 후 김상현이 마운드에 올랐다. 8번타자 심정수의 삼진, 9번타자 안경현의 유격수 땅볼. OB로선 여기서 추가점을 올리지 못한 것이 뼈아팠다.
한국시리즈 1차전 5번 타자로 나선 이도형 ⓒ두산베어스
8회초 김상진이 선두타자 강성우에게 안타를 맞자 김인식 감독은 투수교체를 단행했다. 그러나 구원등판한 이용호가 김민재를 몸에 맞는 볼로 내보낸 뒤 2루 견제 악송구까지 범해 무사 2·3루 위기를 만났다. 결국 전준호의 중견수 희생플라이로 롯데가 4-2로 달아났고, 이 점수로 승부가 결정됐다.
염종석은 팔꿈치 통증이 있었지만 이를 참아가며 6.1이닝 2실점으로 승리투수가 됐다. 신인 시절이던 1992년 준플레이오프 1차전, 플레이오프 1차전과 4차전, 한국시리즈 4차전 승리에 이어 1995년 한국시리즈 1차전까지 포스트시즌 5연승(1세이브) 무패 가도를 달렸다.
김상진은 수비진의 실수 속에 7이닝 4실점(2자책점)으로 생애 첫 한국시리즈 등판에서 패전을 떠안았다. 1차전을 지고도 우승할 수 있을까. OB로선 남은 6경기에서 4승을 거둬야하는 부담을 안게 됐다.
한국시리즈 2차전 선발 중책을 맡아 호투한 권명철 ⓒ두산베어스
●2차전 10월15일(잠실)=권명철완투+김민호끝내기밀어내기볼넷
OB로선 잠실에서 열리는 2차전을 반드시 잡고 부산으로 넘어가야만 했다. 선발투수는 페넌트레이스에서 롯데전에 유난히 강한 면모를 보였던 권명철. 15승 중에 롯데전에서만 3승무패, 평균자책점 1.89의 성적을 거뒀다.
“1차전에서 (김)상진이가 져서 솔직히 2차전 선발로 나설 때 부담이 컸어요. 정규시즌에서 롯데에 강하긴 했지만 난 당시 직구와 슬라이더 2가지 공만 던지는 ‘투 피치(Two Pitch) 투수’였잖아요. 내 구종은 어차피 롯데에서 뻔히 알고 있었죠. 그런데 그날 롯데가 왠지 말리더라고요.”
현재 두산 베어스 퓨처스 팀 투수코치를 맡아 경기도 이천에서 주로 생활하고 있는 권명철 코치는 “참 오래된 일”이라며 웃더니 그날의 기억을 더듬어나갔다.
롯데 선발투수는 구위가 가장 좋은 고졸 2년생 주형광. 플레이오프 최종 6차전에서 롯데가 1-0으로 LG를 꺾고 4승2패로 한국시리즈행 티켓을 따냈을 때 1안타 완봉승을 거둔 주인공이었다.
한국시리즈 2차전을 앞두고 아침부터 가랑비가 흩날리던 잠실 하늘은 경기가 시작되자 햇살을 비추기 시작했다.
경기 초반 어려움이 닥쳤다. 전날처럼 2회초 롯데에 다시 선취점을 내주고 말았다. 1회초를 삼자범퇴로 처리한 권명철이 선두타자 4번 마해영을 중전안타로 내보냈다. 김응국과 김종훈을 연속 삼진으로 돌려세웠지만 공필성에게 좌중간을 꿰뚫는 3루타를 맞고 말았다.
5회말 찬스가 왔다. 1사 후 8번타자 안경현의 2루타, 9번타자 김태형의 중전 적시타로 값진 동점을 뽑아냈다. 주전 포수로 성장한 이도형이 한국시리즈 1차전에서 공수에서 다소 부진하자 2차전 선발출장의 기회를 잡은 김태형이었다(김태형은 그해 방위 복무 후 시즌 중반에 팀에 본격적으로 합류했는데, 2차부터 7차전까지 선발 마스크를 쓰며 우승을 지휘하게 된다).
이후 권명철과 주형광의 팽팽한 투수전. 누구도 먼저 마운드를 내려올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7회와 8회에 양 팀 모두 삼자범퇴를 당할 정도였다.
연장전의 기운이 감돌던 9회말. OB 선두타자 이명수가 모처럼 좌전안타를 치고 나갔다. 5회 김태형의 적시타 이후 OB의 첫 안타였다. 김형석의 3루수 앞 희생번트로 1사 2루. 롯데 벤치는 투구수 127개를 기록한 주형광을 내리고 강상수를 투입했다.
심정수의 고의볼넷과 안경현의 3루수 땅볼로 2사 2·3루. OB 김인식 감독은 김태형 타석을 승부처라 보고 그해 팀 내 최고 타율(0.299)를 기록한 좌타자 김종석을 대타로 내보냈다.
그러자 롯데는 다시 고의볼넷 작전을 폈다.
롯데가 만루의 부담을 감수한 것은 강상수가 팀 내에서 가장 제구력이 좋은 투수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타석에는 OB에서 가장 선구안이 좋은 1번타자 김민호가 들어섰다.
강상수는 보더라인 근처로 직구만 내리 5개를 던졌다. 그런데 김민호는 단 한 번도 스윙을 하지 않았다.
1-1 동점에 9회말 2사 만루 풀카운트.
“타석에 들어서기 전 무조건 투스트라이크를 먹을 때까지 치지 않고 최대한 기다리겠다고 마음을 먹었습니다. 스트라이크존에서 공을 넣었다 뺐다 하는데 방망이를 돌리지 않고 기다렸더니 풀카운트까지 간 거죠.”
강상수는 6구째도 직구를 선택했다. 김민호로선 비슷한 공이면 방망이를 돌려야 하는 상황. 그러나 공이 낮게 들어왔고, 김민호는 몸을 한번 움찔하더니 방망이를 내밀지 않았다.
김양경 주심의 팔이 올라가지 않았다. 대신 김민호의 두 팔이 하늘을 향해 올라갔다. 끝내기 밀어내기 볼넷. 3루주자 이명수가 만세를 부르며 홈으로 달려 들어왔고, OB 벤치의 모든 선수들이 그라운드로 쏟아져 나갔다. 1990년 한국시리즈 2차전에서 LG 김영직이 최초로 끝내기 밀어내기 볼넷을 기록한 뒤 역대 한국시리즈 2번째 진기록이었다. 김민호가 한국시리즈 MVP로 가는 열차에 탑승하기 시작한 순간이었다.
생애 처음 포스트시즌 무대에 등판한 권명철은 2회초 2개의 안타와 6회초 김민재에게 볼넷을 내준 것을 제외하면 나머지 7이닝을 모두 삼자범퇴로 처리하는 완벽한 피칭을 했다. 9이닝 110구 2안타 1볼넷 6탈삼진 1실점 완투승. 권명철의 역투가 OB를 살렸다.
한국시리즈 3차전 선발로 등판해 6이닝 1실점으로 호투한 진필중 ⓒ두산베어스
●3차전 10월17일(사직)=신인정수근결승타와김인식표위장스퀴즈, 1패후2연승
경부선을 타고 부산으로 내려갔다. 롯데는 베테랑 중의 베테랑인 ‘고독한 황태자’ 윤학길을, OB는 영건 중의 영건인 신인 진필중을 선발로 내보냈다. 진필중이 9월 들어 투구가 무르익었기에 3선발로 낙점된 것이었다.
OB가 1점을 뽑으면 롯데가 1점을 내고, OB가 1점을 도망가면 다시 롯데가 1점을 추격하는 양상. 3회초 OB 선두타자 안경현의 좌월 2루타가 터졌다. 2사 3루서 장원진의 중전 적시타가 이어지면서 1-0 리드를 잡았다. 한국시리즈 들어 처음으로 OB가 선취점을 내는 순간이었다.
그러나 4회말 1사 후 진필중이 박정태~김응국~마해영에게 연속 안타를 맞더니 ‘자갈치’ 김민호에게 밀어내기 볼넷을 허용하면서 1-1 동점을 내주고 말았다. OB 김민호가 2차전 끝내기 밀어내기 볼넷으로 장군을 부르자, 롯데의 동명이인 김민호가 3차전에서 밀어내기 볼넷으로 멍군을 부르는 진기한 장면이 연출됐다.
OB는 6회초 2사 후 김형석의 중월 2루타와 이명수의 볼넷에 이어 김종석의 중전 적시타로 다시 2-1로 달아났다.
신인 진필중이 6이닝 동안 단 1실점으로 기대 이상의 호투를 펼쳤다. 김경원이 7회부터 구원등판했다. 8회말 선두타자 전준호에게 2루타를 맞자 이번엔 이용호가 구원등판했다. 9회말 1사까지 잘 잡았다.
타석에는 롯데의 ‘화약고’ 공필성. 몸쪽 공은 절대 피하지 않고 맞고 나가는 투지의 화신이지만, 그해 정규시즌 홈런 4개였을 정도로 장타력과는 다소 거리가 먼 선수였다.
볼카운트 2B-2S에서 5구째 몸쪽 낮은 공. 공필성의 방망이가 전광석화처럼 돌았다. 사직구장의 함성이 화산처럼 폭발했다. 타구는 총알처럼 좌중간 펜스를 넘어갔다. 2-2 동점 솔로홈런. 다 된 밥에 코를 빠뜨린 OB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나 그 한숨이 다시 환호로 바뀌는 데에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돌아선 연장 10회초. 윤학길이 9회까지 2실점을 기록한 뒤 내려가고, 김상현이 구원등판했다. 1사 후 OB 1번타자 김민호가 중전안타로 나간 뒤 과감하게 2루를 훔쳤다.
타석에는 덕수상고를 졸업한 뒤 갓 입단한 새내기 정수근. 대수비와 대주자 요원으로 한국시리즈 엔트리에 포함된 정수근은 7회말 장원진 대신 중견수로 투입된 터였다. 정수근은 여기서 우중간으로 강한 타구를 날렸다. ‘수비의 귀재’로 꼽히는 롯데 중견수 김종헌이 몸을 날렸지만 공이 글러브에 맞고 오른쪽으로 흘렀다. 1타점 3루타. OB가 3-2 리드를 잡는 순간이었다. 정수근은 김상호의 1루수 쪽 내야안타 때 총알처럼 홈까지 파고들어 추가점을 뽑았다.
정수근 ⓒ두산베어스
이어 김형석의 중전안타로 1사 1·3루. OB 김인식 감독은 여기서 준비된 작전을 구사한다. 3루주자 김상호가 홈으로 달리는 동작을 취하고 타석의 이명수가 스퀴즈번트 동작에 들어간 것. 그러나 이명수의 배트는 공을 맞히지 못하고 헛스윙을 하고 만다.
3루주자가 독 안에 든 쥐처럼 꼼짝없이 객사를 할 수밖에 없는 상황. 그런데 롯데 포수 김선일이 3루주자를 잡으려는 순간 김상호는 유유히 3루로 귀루를 해버렸다. 그러는 사이 발 느린 1루주자 김형석은 아무런 견제도 없이 서서 2루로 들어갔다. 기록상으로는 2루 도루였다.
당시 이를 두고 야구 전문가들도 “스퀴즈번트 실패다”, “타자와 3루주자 중 한 명이 사인을 잘못 봤다” 등등 의견이 분분했다. 그러나 이는 OB가 한국시리즈를 준비하면서 미리 손발을 맞춘 작전이었다. 발 느린 1루주자를 공짜로 2루에 보내 더블플레이를 방지하기 위한 것. 지금은 일반화된 ‘위장 스퀴즈번트’ 작전이지만, 당시 김인식 감독이 들고 나온 묘수에 상대뿐만 아니라 전문가들조차 모두 당했다. 이 작전은 나중에 절체절명의 7차전에서 또 한번 빛을 발한다.
“한국시리즈를 앞두고 연습을 많이 했지. 이런 상황에서 3루주자가 홈으로 뛰어가면 3루수가 소리를 지르게 돼 있걸랑. 그러면 포수는 3루주자를 쳐다볼 수밖에 없고. 그런데 3루주자가 홈으로 너무 많이 갔다가 3루로 돌아오면 포수 송구에 걸려 죽으니까 귀루하는 타이밍이 중요하지. 그걸 계속 연습한 거야.”
김인식 전 감독은 위장스퀴즈 번트를 준비한 당시 과정을 설명했다.
OB는 계속된 1사 2·3루에서 상대 실책으로 1점을 더 뽑아 5-2로 넉넉한 리드를 잡았다.
연장 10회말. 이용호가 2사 만루까지 몰린 뒤 공필성을 1루수 파울플라이로 유도하며 승리를 확정했다. OB는 1패 후 2연승으로 기세를 올렸다.
한국시리즈 1차전에 이어 4차전에 선발 등판한 배트맨 김상진 ⓒ두산베어스
●4차전 10월18일(사직)=8회말통한의결승점헌납, 2승2패장군멍군
1차전 패전투수 OB 김상진과 2차전 끝내기 밀어내기 볼넷을 내준 강상수의 선발 맞대결로 4차전이 시작됐다.
“1995년 한국시리즈 1차전은 생애 처음 경험하는 큰 게임이었어요. 당시 한국시리즈를 앞두고 타구에 왼쪽 손등을 맞아 깁스를 하고 나갔거든요. 무조건 이겨야하는 게임이고, 이기고 싶었던 게임이었어요. 그런데 1차전에서 패했고, 너무 속상해 정말 떡이 되도록 술을 마셨던 것 같아요. 저는 기억이 없지만 합숙을 하던 호텔 로비에서 제가 김태룡 매니저님(현 두산 단장)을 부둥켜안고 울고 불고 난리도 아니었다고 하더라고요.”
현 두산 육성군 코치인 김상진의 이야기다. 1차전 패전의 쓰라림이 남아 있는 만큼 4차전 선발등판 각오는 더 뜨거울 수밖에 없었다.
김상진이 먼저 점수를 허용했다. 2회말 선두타자 공필성을 몸에 맞는 볼로 내보낸 뒤 와일드피치와 내야땅볼로 1사 3루가 됐다. 여기서 김상진이 유난히 어려움을 겪던 8번타자 강성우에게 중견수 희생플라이를 맞고 말았다.
찬스를 점수로 연결하지 못하던 OB 타선은 5회초 반격에 나섰다. 1사 후 2번타자 장원진의 중월 2루타와 2사 후 4번타자 김형석의 우월 2루타가 연결되면서 마침내 1-1 동점을 만들었다.
롯데가 6회말 1사 2루서 김민재의 적시타로 2-1로 달아나자, OB는 7회초 1사 2루서 김상호의 2루타로 다시 2-2 동점에 성공했다.
그러나 OB는 8회말 결정적인 실점을 하고 말았다. 역시 선두타자 공필성을 볼넷으로 내보낸 게 화근이었다. 김종헌의 희생번트로 1사 2루. 2루주자 공필성은 베이스를 들락거리며 OB 내야진의 신경을 자극했다. 이때 김상진의 2루 견제구가 중견수 쪽으로 빠졌다. 2루주자 공필성은 3루까지 내달렸다.
타석에는 1차전 3타수 2안타에 이어 이날도 안타를 때리는 등 김상진에게 강점을 보인 강성우. 결국 고의볼넷 작전을 펼쳤다.
1사 1·3루. OB 벤치는 투수교체를 단행했다. 김상진이 내려가고 이용호가 올라왔다. 여기서 김민재에게 좌익수 희생플라이를 허용하면서 결승점을 헌납하고 말았다.
7회 무사 1루에서 강상수를 구원등판한 롯데 김경환은 2.2이닝을 무실점으로 막고 한국시리즈 첫 승을 올렸다. 경성대 시절 압도적인 퍼포먼스를 펼친 김경환은 1993년 롯데 1차지명을 받고 프로에 들어왔지만 어깨 부상으로 수술과 재수술을 이어가는 불운을 겪었다. 그리고는 1995년 군복무를 마치고 나와 후반기에서야 프로 무대에 데뷔하게 됐다. 9경기에서 1승1패, 평균자책점 5.89의 성적을 올렸다. 롯데의 이날 승리는 현재까지 롯데 구단의 마지막 한국시리즈 홈경기 승리로 남아있다.
정규시즌에 이어 한국시리즈에서도 변함없는 활약을 이어간 심정수 ⓒ두산베어스
●5차전 10월20일(잠실)=13년만의KS 마운드, 불사조투혼도헛되이
당시 대회 요강에 따라 5~7차전은 잠실에서 치르게 됐다. 그중 6차전이 롯데 홈으로 편성돼 있긴 하지만, 잠실에서 나머지 모든 게임을 진행하기에 평소 잠실을 홈구장으로 사용하는 OB로선 이점이 있었다.
2승2패 후 맞이하는 5차전. 경기의 무게만큼이나 선발투수 이름부터 숨이 막혔다. 2차전에서 빛나는 투수전을 펼친 롯데 주형광과 OB 권명철의 재대결. 그러나 예상과는 달리 둘 다 초반부터 난조를 보이면서 어지러운 게임이 펼쳐졌다.
OB가 선제타를 날렸다. 2회말 한꺼번에 4점을 뽑아낸 것. 1사 1·2루에서 안경현의 좌전 적시타, 심정수의 좌월 3점홈런이 이어져 빅이닝이 만들어졌다. 1995년 한국시리즈 내내 저득점 양상이 이어졌기에 4점이면 사실상 승기를 완전히 틀어쥐는 점수처럼 느껴졌다.
그러나 3회초 곧바로 롯데의 반격이 시작됐다. 전준호의 1타점 우월 2루타와 김종헌의 1타점 내야안타로 2점을 뽑고, 마해영의 2타점 우월 2루타로 순식간에 4-4 동점이 됐다.
OB 김인식 감독은 마침내 결단을 내렸다. ‘불사조’ 박철순을 호출했다. 박철순으로선 원년 자신의 손으로 한국시리즈 우승을 확정하던 6차전 이후 13년 만에 오르는 KS 마운드였다. 그러나 감회에 젖을 상황이 아니었다. 추가 실점은 패배와 직결되는 무거운 점수. 절체절명의 위기였다.
마운드에 모인 김인식 감독과 투수 박철순, 포수 김태형 ⓒ두산베어스
박철순은 강성우를 상대로 혼신의 힘을 다해 공을 뿌렸다. 1B-0S에 연속 5개의 파울이 이어졌다. 7구째 볼이 들어오는 순간 1루주자 공필성이 2루 도루에 성공했다. 1사 2·3루. 박철순은 결국 9구째에 몸쪽 높은 공으로 강성우를 헛스윙 삼진으로 돌려세웠다. 그리고는 다음 타자 김민재도 풀카운트 승부 끝에 바깥쪽 슬라이더로 루킹 삼진을 잡아냈다.
두 주먹을 불끈 쥐고 환호를 할 법도 했지만, 박철순은 의외로 덤덤한 표정으로 마운드를 내려왔다.
그러나 OB 팬들마저 덤덤할 순 없었다. 1982년의 기억이 오버랩된 팬들은 기쁨에 겨워 환호성을 질렀다. 그 사이 수없이 쓰러지고 일어나기를 반복한 불사조의 스토리가 떠오른 팬들은 가슴속에서 올라오는 뜨거운 기운을 삼켜야만 했다.
박철순은 7회초 1볼넷 무실점으로 막아냈다. 13년 전의 영웅이 현실 세계에 빙의를 한 듯 자신감 넘치는 모습이 그 시절 그대로였다.
맏형이 역투를 거듭하자 OB 타선도 7회말 힘을 냈다. 김민호와 장원진이 연속안타로 무사 1·2루 밥상을 차렸다. 롯데는 호투하던 주형광을 벤치로 불러들였다. 롯데 두 번째 투수는 김상현. OB 김상호가 김상현에게 삼진으로 물러났지만, 대타 김종석의 좌전 적시타로 다시 5-5 동점을 이뤘다.
8회초에도 등판한 박철순은 선두타자 박정태를 풀카운트 승부 끝에 볼넷으로 내보내고 말았다. 박철순은 결국 김경원에게 마운드를 물려주고 내려왔다.
1.2이닝 37구 무안타 2볼넷 2탈삼진 무실점. 이것이 박철순의 마지막 한국시리즈 등판이 됐다.
양 팀의 몸부림은 9회에 더 거세졌다. 9회초 롯데가 김민재와 김종헌의 안타로 1사 1·3루로 만든 뒤 대타 손동일의 우익수플라이로 6-5로 치고 나갔다.
그러자 OB는 9회말 선두타자 김민호의 좌월 2루타로 반격의 신호탄을 쏘아 올린 뒤 정수근의 투수 앞 희생번트로 1사 3루 기회를 만들었다. 여기서 시리즈 내내 부진하던 김상호가 롯데 4번째 투수 김경환을 상대로 중전 적시타를 때리면서 극적인 6-6 동점을 만들었다.
3차전에 이어 1995년 한국시리즈에서만 두 번째 연장전. 10회초 롯데 공격에서 선두타자 마해영이 볼넷으로 나가자 이용호가 구원등판했다. 박정태의 희생번트와 폭투로 1사 3루. 여기서 임수혁의 우익수 희생플라이가 나오면서 롯데가 다시 7-6으로 앞서 나갔다.
연장 10회말. OB는 볼넷 2개로 2사 1·2루 마지막 찬스를 잡았다. 그러나 김태형의 대타로 들어선 김광현이 삼진으로 물러나고 말았다. 6-7 패배.
9회 등판한 롯데 김경환은 1.2이닝을 막고 한국시리즈 2연승을 올렸다. 1995년 정규시즌 1승과 한국시리즈 2승. 이것이 김경환의 공식경기 마지막 승리였다.
7전4선승제의 한국시리즈에서 3승을 선점하는 팀이 절대적으로 유리하다는 것은 삼척동자도 다 아는 사실. 1982년 시작된 한국시리즈에서 3패를 먼저 당한 팀이 우승한 사례는 1984년 롯데 자이언츠 한 팀뿐이었다. 통계만 본다면 OB로선 절망적인 상황이었다.
그러나 '미러클 베어스'는 기적 같은 반격의 드라마를 준비하기 시작했다.
믿기 힘든 완투승으로 팀을 구한 진필중 ⓒ두산베어스
●6차전=10월21일(잠실) ‘절망속에서핀꽃’ 진필중완투승…3승3패기사회생
“이기든지 지든지 내일은 그냥 자신 있게 던져. 지금까지만 해도 신인으로서 충분히 잘했어.”
1995년 10월 20일 금요일밤. OB는 한국시리즈 기간에 서울 경기를 할 때 논현동의 리츠칼튼호텔을 숙소로 사용했다. 베어스의 맏형이자 정신적 지주인 박철순은 한국시리즈 5차전이 끝난 뒤 숙소 방에서 룸메이트인 신인 진필중에게 용기를 불어넣었다.
“그래. 선배님 말씀이 맞아. 그동안 니가 잘 던져서 우리 팀이 여기까지 온 거야. 부담 갖지 말고 그냥 편하게 던져.”
5차전 선발투수로 등판했던 권명철도 그날 밤 박철순과 진필중이 묵는 방으로 찾아와 함께 있었다. 그는 박철순 선배의 말을 이어받으며 진필중에게 격려를 했다.
OB가 2승1패로 앞서다 2연패를 당하며 2승3패로 몰린 상황. 7전4선승제 한국시리즈에서 3패를 먼저 당한 뒤 우승하는 것은 기적에 가깝다. 더군다나 OB는 4차전에서 김상진(시즌 17승), 5차전에서 권명철(시즌 15승) 원투펀치를 소진한 터라 절망감이 엄습했다.
OB가 가용할 수 있는 선발 카드는 신인 투수 진필중. 3차전에서 6이닝 1실점으로 기대 이상의 호투했지만, 팀이 벼랑 끝에 몰린 상황에서 선발등판은 새내기가 감당하기엔 부담감이 클 수밖에 없었다.
박철순과 권명철 두 선배도 말은 하지 않아도 팀의 운명이 6차전 선발투수 진필중 어깨에 달려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겉으로 티를 내지 않을 뿐이었다.
“OB 구단에서 가능성 하나 보고 저를 2차 2라운드에 지명했지만, 사실 초등학교 때부터 대학 때까지 저는 잘 나가는 투수가 아니었어요. 늘 불안했던 선수였죠. 휘문고 다닐 땐 1년 후배 임선동이 에이스라 중요한 경기에서 저는 벤치에 앉아 있었어요. 중앙대로 진학해서도 별 볼 일 없었죠. 4학년 때 갑자기 구속이 빨라지더라고요. 최고 149㎞를 찍었어요. 그런데 왼쪽 어깨가 습관성 탈구로 말썽을 부리지 뭡니까. 수술을 했죠. 뜻밖에도 프로 지명을 받았고, 첫해 패전처리로 시작했지만 1군 무대에서 던지게 됐고, 후반기에 선발로 나서기 시작해 9월에 4연속 선발승을 거두더라고요. 그리고는 한국시리즈 엔트리에 들고, 3차전에 선발등판을 했어요. 꿈만 같은 일이 입단 첫해부터 하나씩 이뤄지는데 정말 모든 게 고마웠어요.”
1995년 신인 투수 진필중은 한국시리즈를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그는 연장 10회 승부 끝에 5-2로 승리한 한국시리즈 3차전에 선발투수로 나서 6이닝 1실점 역투를 펼친 바 있다. 2-1로 앞선 상황에서 마운드를 내려와 승리 요건을 갖췄지만 9회말 동점을 허용하면서 승리투수가 되지는 못했다.
그러나 진필중의 역투가 없었다면 그날의 승리도 없었기에 3차전 직후 진필중의 주가는 급등하고 있었다.
“3차전 선발등판 때는 1승1패를 한 상태였기 때문에 부담이 되긴 해도 사실 크게 압박감을 받지는 않고 등판했던 것 같아요. 지더라도 다음이 있는 거잖아요. 그런데 2승3패 후 6차전 선발등판할 때는 긴장이 안 될 수가 없었죠. 6차전을 지면 다음이 없는 거니까요. 1년 내내 고생해 온 모든 선수들의 노력을 내가 날려 버릴 수 있다고 생각하니 부담이 컸죠. 그렇지만 박철순 권명철 선배님의 말씀처럼 그냥 ‘열심히만 던지자’고 생각했어요. ‘무조건 이긴다’는 긍정적인 생각만 하면서 길게도 안 보고 ‘한 타자, 한 타자 집중해서 던지자’고 다짐하고 마운드에 올랐죠. 등판 전에 긴장은 됐지만 오히려 집중력은 최고조에 달했던 것 같아요.”
당시 대회요강에 따라 한국시리즈 5차전부터 7차전까지 잠실에서 거행됐지만, 6차전은 롯데의 홈경기로 치러졌다. OB가 선공, 롯데가 후공이었다.
롯데는 가을이면 더 강해지는 염종석을 선발로 낙점했다. 염종석은 1차전에서도 6.2이닝 2실점으로 승리투수가 됐고, 1992년 데뷔 후 포스트시즌 5연승을 달리고 있는 ‘불패 투수’였다.
그러나 염종석은 14일에 열린 1차전 투구 후 팔꿈치 통증을 호소했다. 충분한 휴식 뒤 7일 만에 마운드에 올랐지만 분명 1차전보다 구위가 떨어져 있었다.
한국시리즈 6차전 결승 득점을 올린 이명수 ⓒ두산베어스
내일이 없는 OB는 이런 염종석을 2회초부터 몰아붙였다. 선두타자 이명수의 좌전안타와 김종석의 2루수 땅볼로 1사 2루 찬스를 잡았다. 여기서 안경현의 중월 2루타, 2사 후 김태형의 좌전 적시타가 연이어 터졌다. 2-0으로 앞서나갔다.
3회에는 선두타자 김형석이 볼넷을 골라나간 뒤 이명수의 희생번트로 만든 1사 2루서 김종석의 우전 적시타가 나왔다. 결국 염종석이 강판되고, 박동희가 구원등판했다.
3-0 리드 속에 OB 선발투수 진필중은 역투를 거듭했다. 빠른공뿐만 아니라 제구 또한 완벽했다. 1회부터 3회까지 삼자범퇴 행진. 롯데 2번타자 김종헌에게만 4회말 1사 후 중전안타, 7회말 선두타자 볼넷을 내줬을 뿐이었다. 한 차례도 득점권에 주자를 두지 않았을 만큼 롯데의 모든 타자를 압도해 나갔다.
거침없는 투구를 이어가던 진필중은 8회말 첫 위기를 맞이했다. 1사 후 공필성과 손동일에게 연속 안타를 내주면서 처음으로 득점권에 주자를 두게 된 것. 1사 1·3루. 여기서 김선일의 2루 땅볼로 1점을 허용했지만 더 이상의 추가 실점은 없었다.
공격적인 피칭으로 8회까지 투구수 92개로 제어한 진필중은 9회에도 씩씩하게 마운드에 올랐다. 1번타자 전준호를 2루수 땅볼, 2번타자 김종헌을 3루수 땅볼로 처리했다.
타석에는 3번타자 박정태. 초구에 배트가 돌았다. 타구는 높이 떴고, 중견수 정수근이 낙구 위치를 고르더니 여유있게 잡아냈다.
4-1 승리. 진필중은 9회에도 공 9개로 가볍게 롯데 타선을 요리했다. 제 손으로 승리를 확정한 진필중은 오른손으로 모자를 벗더니 하늘 위로 크게 한 바퀴 돌렸다. 마치 하늘을 나는 기분이었다.
9이닝 101구 3안타 1볼넷 3탈삼진 1실점 완투승.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신인투수의 화려한 퍼포먼스였다. 진필중은 절벽에 섰던 팀을 구해내면서 새로운 영웅의 탄생을 알렸다. 이를 발판으로 ‘미러클 베어스’ 신화는 꿈틀대기 시작했다.
“마지막 아웃카운트를 잡고 속으로 ‘아, 이제 됐다. 끝났구나. 7차전으로 가는구나. 내가 이 중요한 경기에서 해냈구나’라는 생각이 들면서 너무나 홀가분했어요. 한 타자, 한 타자만 집중해서 잡자고 생각했는데 완투까지 갈 줄은 꿈에도 몰랐죠. 룸메이트 박철순 선배님이 마운드까지 올라오셔서 머리를 쓰다듬어 주시더라고요.”
진필중은 이날 경기 후 수훈선수 인터뷰에서 ‘9회가 다 끝나자 어둡고 긴 터널을 지난 뒤 마지막 태양을 보는 느낌이었다”라는 소감을 밝혔다. 초등학교 때부터 누구도 거들떠보지 않았던 무명 투수는 그동안 견뎌온 기나긴 어둠의 시간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미리 준비했던 소감도 아닌데, 저도 모르게 그런 인터뷰를 했더라고요. 한국시리즈 엔트리에 들어가는 것 자체가 꿈이었는데 거기서 완투승까지 올렸잖아요. 나도 할 수 있다는 희망을 얻은 게임이었어요. 그래서 그런 말이 무의식 중에 나온 것 같아요.”
1995년 한국시리즈 우승 헹가래를 받고 있는 김인식 감독 ⓒ두산베어스
●7차전 10월22일(잠실)=김상진-권명철역투, 다시위장스퀴즈…OB 시대마지막우승
결국 최종전까지 왔다. 어차피 양 팀 모두에 막다른 골목. 7차전 선발투수로 OB는 김상진, 롯데는 윤학길 카드를 빼들었다.
OB는 1회에 약한 징크스가 있는 윤학길을 몰아붙였다. 1회말 OB 1번타자 김민호가 좌중간 안타로 포문을 열었다. 김민호는 이로써 한국시리즈 1차전부터 7차전까지 전 경기 안타를 생산하게 됐다.
“사실 안타 이전에 파울플라이로 아웃되는 상황이었어요. 롯데 3루수 공필성 선배가 파울지역에서 낙구지점을 포착하지 못해 뒤로 주춤주춤 따라가다 유격수(김민재)하고 부딪쳐서 공을 놓치더라고요. 거기서 살아나서 결국 풀카운트까지 가서 안타를 쳤는데 우리가 1회부터 2점을 냈어요.”
김민호는 “당시 상황이 모두 기억난다. 생생하다”고 했다.
이어 2번타자 장원진의 중전안타로 무사 1·3루. 합숙 기간 김민호와 룸메이트였던 1년 선배 장원진은 7차전 전날 밤 “민호야, 잘하면 니가 MVP 가능성이 있겠다”라며 응원을 해줬는데, 1회 시작하자마자 김민호-장원진 룸메이트 테이블세터가 멋지게 밥상을 차렸다.
이어 한국시리즈 중반까지 부진하던 3번타자 김상호가 좌전 적시타를 날렸다. OB는 손쉽게 1-0 리드를 잡았다.
강상수가 2회말 3연속 탈삼진으로 안정을 찾자, 롯데가 3회초 반격을 시작했다. 선두타자 김민재가 좌익선상 안타로 출루했다. 이어 전준호의 타구는 원바운드 투수 정면 땅볼. 더블플레이가 예상되는 순간이었다. 그런데 김상진이 2루에 던진 것이 그만 악송구가 되고 말았다. 유격수 김민호가 2루로 들어가다 역동작에 걸리면서 몸을 날려봤지만 공은 중견수까지 굴러갔다.
무사 1·3루 위기. 여기서 김상진은 침착했다. 김종헌을 상대로 느린 커브를 던져 유격수 앞 병살타로 유도하면서 1점과 아웃카운트 2개를 맞바꿨다. 2-1로 리드가 이어졌다.
곧이은 3회말. 승부를 가르는 결정적 장면이 펼쳐졌다. OB는 1사 후 김상호의 좌전안타와 김형석의 중전안타로 1사 1·3루 기회를 얻었다.
위장 스퀴즈 번를 비롯해 한국시리즈 내내 기발한 작전으로 상대를 흔들어 놓은 김인식 감독. ⓒ두산베어스
여기서 OB 김인식 감독의 준비된 작전이 다시 한번 빛났다. 타석에 들어선 이명수가 초구에 스퀴즈번트 동작을 취했다. 3루주자 김상호는 3차전 때처럼 홈으로 뛰는 척하더니 3루로 귀루해 버렸다. 롯데 포수 강성우가 3루주자를 신경쓰는 사이, 발 느린 1루주자 김형석은 여유 있게 2루까지 들어갔다. 강성우는 어디에도 공을 던지지 못했다.
3차전 연장 10회초에 써먹어 재미를 봤던 위장 스퀴즈번트 작전이었다. 공교롭게도 3루주자, 1루주자, 타자가 3차전과 모두 같았다. 롯데로선 3차전에서 한번 당했기에 어느 정도 대책을 준비하고 나왔지만 7차전에서 또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말았다.
사실 알고도 당할 수밖에 없는 비기(秘技)였다. 요즘은 위장 스퀴즈번트가 흔해졌지만, 1995년 한국시리즈에서 김인식 감독이 들고 나온 이 작전은 1루주자를 공짜로 2루에 보내면서 병살타 위험을 제거하는 ‘기발한 묘수’로 화제가 됐다. 위장스퀴즈번트 작전은 이후 KBO리그 전체에 유행처럼 확산됐다.
1사 2·3루에서 이명수가 1루수 파울플라이로 물러났다. 상황은 2사 2·3루로 바뀌었다.
여기서 예기치 않았던 결정적인 장면이 펼쳐졌다. 김종석의 2루 쪽 땅볼을 롯데 2루수 박정태가 뒤로 흘리는 실책을 범하고 만 것. 2사 이후였기에 3루주자와 2루주자가 모두 홈까지 파고들어 스코어는 순식간에 4-1이 됐다. 위장스퀴즈 번트 작전으로 1루주자가 2루까지 진출해 있었기에 이 장면에서 OB는 1득점이 아닌 2득점에 성공할 수 있었다.
김상진이 7회초 선두타자 공필성을 몸에 맞는 공으로 내보내자 김인식 감독은 곧바로 권명철을 호출했다. 그해 32승을 합작한 원투펀치를 한꺼번에 모두 쏟아붓는 승부수를 던졌다.
“사실 그때 제가 마운드에 올라갈 거라고 생각하지 못했어요. 이틀 전 5차전에서 던지고 하루밖에 못 쉬었고, 그해 우리 불펜 투수들이 좋았잖아요. 박철순 선배도 있었고, 이용호 김경원도 있었고요. 나는 스파이크도 안 신고 있었어요. 6회말 끝나고 덕아웃 뒤쪽으로 화장실을 갔다 왔는데 누군가가 막 뛰어와서 ‘감독님이 몸 풀고 준비하라고 했다’고 하더라고요. 갑자기 몸 풀고 무사 1루 상황에서 마운드에 올라갔죠.”
권명철의 기억이다.
어차피 마지막이었다. 권명철은 혼신의 힘을 다해 투구를 이어갔다. 첫 타자 강성우를 투수 앞 땅볼로 잡아 1사 2루. 여기서 OB에게 행운이 찾아왔다. 대타 이종운의 유격수 땅볼 때 2루주자 공필성이 무리하게 3루로 달리다 아웃된 것. 이어 이종운이 2루 도루를 감행했지만, 포수 김태형의 정확한 송구에 잡혔다.
권명철은 8회를 무실점으로 넘긴 뒤 9회초에도 마해영과 박정태를 각각 3루수 땅볼과 1루수 땅볼로 처리했다. 2아웃까지 속전속결로 막았다.
이제 우승까지 아웃카운트 하나. OB 선수들이 모두 덕아웃 앞까지 나와 마운드로 달려갈 채비를 하고 있었다.
그러나 롯데는 그대로 주저앉지 않았다. 슬라이더가 주무기인 권명철을 상대로 밀어치기로 응수했다. 임수혁과 공필성이 연속 우전안타를 날려 2사 1·2루를 만들었다.
홈런 한 방이면 역전도 가능한 상황. 롯데 김용희 감독은 강성우 타석에 한 방이 있는 대타 손동일을 투입했다.
초구는 한가운데 스트라이크.
여기서 포수 김태형이 2구째에 갑자기 포크볼 사인을 냈다. 권명철이 프로 데뷔 후 한 번도 실전에서 구사하지 않았던 구종. 상대가 계속 슬라이더를 노리는 듯하자, 전혀 예상하지 못한 필살기를 선택한 것이었다.
권명철이 던진 포크볼은 스트라이크존 한가운데에서 기막히게 떨어졌다. 그런데 문제는 그다음. 포수 김태형이 공을 뒤로 빠뜨리고 말았다. 원바운드도 아니었기에 공식기록원도 포수의 패스트볼로 기록할 수밖에 없었다.
현역시절 김태형 감독과 정수근 ⓒ두산베어스
4-2로 앞선 2점차 승부에서 2사 2·3루. 이제 안타 한 방을 맞는다면 다 잡았던 우승이 날아가는 절체절명의 위기였다.
OB 벤치는 다급해졌다. 6차전에서 완투한 진필중까지 불펜으로 이동해 몸을 풀도록 지시했다.
“권명철이 한국시리즈를 앞두고 포크볼을 던졌는데 기가 막히게 들어오더라고요. 그래서 결정적일 때 써먹어야겠다고 생각하고 있다가 포크볼 사인을 냈던 거예요. 그런데 2루주자와 1루주자가 더블스틸을 할 수 있는 상황이니까 3루로 뛸 준비를 하는 2루주자를 쳐다보다가 그만 공을 뒤로 빠뜨렸던 거죠. 어휴, 그때 생각만 하면….”
김태형은 아직도 그 순간이 잊히지 않는다. 그 생각만 하면 지금도 등에 식은땀이 난다.
바로 그때 김인식 감독이 타임을 부르고 직접 마운드에 올라왔다. 김태형도 함께 마운드로 향했다. 김 감독은 거기서 특유의 코맹맹이 목소리로 딱 한 마디만 툭 던졌다.
“야, 기냥 편하게 던져, 기냥~. 괜찮어~.”
그리고는 말없이 마운드를 내려갔다. 눈치 빠른 포수 김태형은 감독의 의중이 무엇인지 알았다. 말없이 권명철의 어깨를 한번 툭 친 뒤 안방으로 돌아갔다.
3루 쪽 관중석을 가득 채운 롯데 팬들은 잠실구장을 찢을 듯 응원의 목소리를 높였다. 1992년 이후 3년 만의 우승 기회. 하늘이 준 마지막 찬스를 살려야만 했다. 1루 쪽 관중석의 OB 팬들은 기도하듯 두 손을 맞잡고 발을 동동 굴렀다. 13년 만에 찾아온 한국시리즈 우승 기회를 놓칠 순 없었다.
벤치에 앉은 OB 선수들의 얼굴엔 긴장한 빛이 역력했다. 박철순은 눈을 감아버렸고, 그 옆에 앉은 장원진은 거의 우는 듯한 얼굴로 승리에 대한 간절한 마음을 여과 없이 드러냈다.
안방으로 돌아온 포수 김태형은 오히려 더 힘 있게 사인을 냈다. 권명철이 가장 편하게, 가장 자신 있게 던질 수 있는 공. 바로 슬라이더였다.
공은 한가운데에서 바깥쪽으로 활처럼 크게 휘어나갔다. 손동일이 기다렸다는 듯 방망이를 돌렸다. 그러나 공은 배트 밑동에 빗맞았다. 타석 앞에서 한 차례 크게 바운드를 일으키자 권명철이 마운드 앞으로 쏜살처럼 달려 나갔다. 그리고는 강한 스핀을 먹고 한 번 더 숏바운드를 일으킨 타구를 잡자마자 재빨리 1루로 던졌다.
1루수 김형석의 오른손 미트에 공이 빨려 들어갔다. 27번째의 아웃카운트가 완성되는 순간. 김형석은 그 자리에서 폴짝폴짝 뛰더니 무아지경 속에 우승 결정구를 하늘로 던져버렸다. 발 느린 김태형은 선수 생활 중 가장 빠른 스피드로 마운드로 달려갔다. 우승 확정 순간 대체적으로 투수가 덩치 큰 포수에게 안기지만, 체격이 작은 김태형은 육중한 권명철의 가슴팍으로 온몸을 내던졌다.
우승 확정 후 부둥켜안은 포수 김태형과 투수 권명철 ⓒ두산베어스
벤치 앞에서 숨을 죽이며 지켜보던 OB 선수들도 미친 듯이 마운드로 달려 나갔다. 마운드 위에서 뒤엉키고, 서로를 부둥켜안고 환호했다.
“권명철은 체격이 크고 나는 키가 작으니까 투수가 포수한테 뛰어오르긴 그렇잖아요. 그래서 덩치 작은 제가 뛰어올랐죠.”
두산 김태형 감독은 헹가래 투수 권명철의 품에 안겼던 27년 전의 기억이 떠오르는지, 당시 상황을 설명하면서 웃는다.
OB는 이로써 한국시리즈 역사상 최초로 맞붙은 경부선 시리즈에서 2승3패 벼랑 끝에 몰렸다가 역전 우승에 성공하는 ‘미러클 베어스’의 역사를 완성했다. 1982년 한국시리즈 우승 이후 13년 만에 맛보는 감격. 구단 역사상 두 번째 우승이었다. 아울러 1998년까지 존재했던 OB 베어스 시대의 마지막 우승이기도 했다.
선수들은 그라운드에서 샴페인을 서로의 얼굴에 퍼붓기 시작했다. 얼굴은 샴페인 반, 눈물 반으로 범벅이 됐다. 이때 박용민 전 사장이 그라운드에 들어갔다. 그의 발걸음은 자신도 모르게 박철순에게로 향했다. 후배들과 기쁨을 만끽하던 박철순은 박용민 전 사장을 보자마자 두 팔로 끌어안았다. 그리고는 마치 어린아이마냥 엉엉 소리 내어 울기 시작했다. 사나이들의 눈물. 통곡도 그런 통곡이 없었다.
“박용민 사장님은 OB 베어스 초대 단장으로서 미국 무대에서 뛰던 나를 영입하기 위해 밀워키까지 직접 날아오셨던 분이셨어요. 원년 우승 이후 허리 부상으로 미국에서 수술을 받을 때도 도움을 주셨고, 수많은 부상 속에서도 재기할 때까지 기다려주셨죠. 그런데 1994년 그 일(선수단 집단이탈)이 있었잖아요. 박 사장님 얼굴을 보는 순간 너무나 감사하기도 하고, 너무나 미안하기도 해서 저도 모르게 엉엉 울었던 것 같아요. 원년 우승 때는 멋 모르고 우승을 했잖아요. 제게 더 기억에 남는 건 1995년 우승이었었죠.”
박철순은 그날의 감격이 다시 떠오르는 듯 눈을 지그시 감았다. 1956년생. 이제 곧 칠순을 앞두고 있는 ‘불사조’의 눈가에 다시 슬며시 이슬이 맺혔다. 그만큼 그에게는 가슴 아린 우승이었고, 감격적인 순간이었다.
한편, 유격수이자 1번타자 김민호는 1995년 한국시리즈에서 0.381(31타수 12안타)의 고타율에 역대 단일 한국시리즈 최다안타 신기록(12개)을 달성했다(이후 2004년 삼성 김한수가 14개의 안타를 작성해 김민호의 기록은 역대 2위로 남아있다). 아울러 최다도루(6개)도 기록했다. 이런 호성적 속에 1995년 한국시리즈 MVP에 올랐다. 1993년 계명대 졸업 후 어떤 팀도 불러주지 않아 테스트를 받고 OB에 입단했던 무명의 연습생 선수가 비로소 성공 시대를 열었다.
우승 트로피를 끌고 가는 OB베어스 선수단 ⓒ두산베어스
■ 1995년한국시리즈우승의추억
▲김인식감독=1995년 우승은 나로선 잊을 수 없다. 개인적으로 첫 우승이기도 했으니까. OB 감독으로 처음 왔을 때 흐트러진 선수들을 모으는 과정부터 많이 생각났다. 솔직히 한국시리즈 우승 순간보다 페넌트레이스에서 반게임차로 LG를 제치고 한국시리즈 직행했을 때 감격이 더 컸다. 어쨌든 1995년 우승이 있었기 때문에 내가 두산 시절까지 장수 감독이 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권명철=1993년에 10승을 하고 1994년에는 팔꿈치가 안 좋아 부진했다. 난 당시 직구와 슬라이더만 던지는 투피치 투수였다. 지금은 백도어 슬라이더가 흔하지만 당시 우타자 몸쪽으로 던지는 백도어 슬라이더로 재미를 봤다. 구종이 다양하지 않았으니 코스를 다양하게 공략했다. 1995년 한국시리즈 1차전에서 김상진이 져서 2차전 부담이 컸는데 그 경기를 이기면서 잘 풀렸던 것 같다. 세월이 많이 흘렀지만 7차전 마지막 장면은 평생 못 잊는다. 내 인생에서 가장 큰 추억이다. 지금은 이천에서 김상진 코치, 배영수 코치와 함께 투수 육성 매뉴얼을 만들고 있다.
▲김상진=내 생애 가장 큰 게임인데 무조건 이겨야한다는 생각밖에 없었다. 7차전 선발 등판하는데 그 압박감은 말도 못한다. 내가 엘리트 코스를 거쳐 프로에 입단한 선수도 아니다 보니 그런 압박감을 이기기 쉽지 않았다. 1회를 마치고 나니 긴장이 풀렸다. 우승 순간 덕아웃을 뛰쳐나가 미친 듯이 기분을 만끽했다. 그런데 다음날 일어나니까 너무 허무하더라. 이러려고 이 고생을 했나 싶어 웃음이 났다. 근데 우승 바로 다음날이 주장 이명수 선배 결혼식이었다. 밤새 얼마나 술을 마셨는지 다들 눈이 시뻘건 상태로 결혼식장에 나타나더라. 나중에 하객 사진을 봤는데 모두들 얼굴이 떡이 돼 있었다. 심지어 명수 형 얼굴도 정상이 아니었다(웃음).
▲진필중= 6차전에서 완투를 할 거라고는 생각도 안 했다. 대학 시절까지 무명이었는데 ‘나도 이 정도로 노력하니까 되는구나’라는 것을 느꼈고, 자신감이 생겼다. 그 경험이 훗날까지 성장의 큰 원동력이 됐다. 7차전에서 9회에 권명철 선배가 위기를 맞았을 때 최일언 투수코치님이 다급하게 “불펜에 가서 몸을 풀라”고 하셨다. 속으로 “여기서 권명철 선배가 끝내게 해달라”고 기도를 했다. 내가 등판하는 상황이 온다는 것은 승리가 날아간다는 의미였다. 그래서 권명철 선배를 향해 “힘내라, 힘내라”를 외쳤다. 우승 확정 순간 글러브를 불펜에 집어던지고 마운드로 달려갔던 생각이 난다. 초등학교 시절 야구를 시작한 뒤 우승을 경험한 것도 처음이었고, 내가 팀 우승에 도움을 준 것도 당연히 처음이었다.
▲김민호(MVP)=우승 순간 부모님이 많이 생각났다. 난 고등학교(경주고) 들어가서 뒤늦게 야구를 시작했다. 대학도, 프로도 불러주는 팀이 없어 어렵게 들어갔다. 계명대 김충녕 감독님이 OB 구단에 부탁해 테스트를 받았다. 그때 윤동균 감독님한테 “제가 유격수로는 삼성 류중일 선배님보다 더 잘할 자신이 있습니다”라고 당돌하게 말씀드렸더니 껄껄 웃으시더라. 그렇게 테스트를 받고 1993년 OB에 입단했다. 당시 부모님은 좋은 조건을 제시한 실업팀(한국화장품)에 가지 않고 연습생으로 프로에 가니까 많이 속상해하셨다. 어머니가 많이 우셨다. 그때 부모님한테 “저는 프로 가려고 야구를 한 거지 아마추어 가려고 야구를 한 게 아닙니다”라고 말씀드렸다. 1995년 우승하고 한국시리즈 MVP가 됐을 때 자식된 도리를 다한 것 같아 기뻤다. 야구를 한 뒤 우승이란 걸 처음 해봤다. 당시 기억이 생생하다. 1995년 한국시리즈는 잊을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