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자가 입는 점퍼의 지퍼가 고장이 났습니다. 위로도 아래로도 움직이지 않는다는 딸의 말을 듣고 살펴보니 지퍼 주변의 천이 지퍼 손잡이에 꽉 물려있었습니다. 처음에 물렸을 때라면 풀어내기 쉬웠겠으나 풀어내려 힘을 가해서 점점 세게 물려버린 것이었습니다. 힘으로 억지로 풀어내려 하면 더 망가져 옷 수선 가게로 가야 할 상황이었습니다. 송곳으로 천을 빼내면서 동시에 지퍼손잡이를 살짝살짝 움직이기를 수차례. 겨우 고쳤습니다.
평소 아무런 생각 없이 하루에도 열 번 이상을 사용했을 지퍼. 고치면서 보니 지퍼라는 물건 예사 것이 아니었습니다. 첫 단추를 잘못 꿰면 끝까지 잘못된 다지만 첫 지퍼 잘못 올려 잘못될 일도 없습니다. 단추처럼 떨어질 일도 없습니다. 튼튼하기가 탱크 같습니다. 손잡이를 잡고 아래로 주욱~ 잡아내리면 모세의 지팡이가 내리침으로 홍해바다가 좌악~ 갈라지듯 갈라집니다. 손잡이를 다시 위로 잡아 올리면 열렸던 홍해 바닷물이 파라오 람세스 2세의 추격군을 집어삼키듯이 닫힙니다. 지퍼의 손잡이를 잡고 여닫히는 모습을 보노라면 마치 신이 된듯한 착각에 빠질 수 있습니다.
지퍼를 살펴보면 오르내릴 때마다 짝이 되는 이빨이 따로 정해져 있습니다. 손잡이가 올라가면서 왼쪽 이빨들은 연도(시간)이고 오른쪽 이빨들이 그 해에 일어난(날) 사건들이라 생각해 봅니다. 한 치 앞 일을 알지 못하는 인간사인데 일어날 일들이 미리 예정되어 있다면 힘이 빠질 일입니다, 모든 게 이미 예정된 운명, 팔자소관, 노력해 봐도 바꿀 게 없다면 노력과 인내는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됩니다. 생각에 여기에 이르자 갑자기 지퍼가 이상하게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답답해지고 내가 알지 못하는 어떤 힘에 의해 좌지우지되고 있다는 느낌. 지퍼를 올리고 싶지 않아 집니다. 턱밑까지 올린 지퍼가 우리 목을 죄는 듯합니다.
생각을 바꾸기로 했습니다. 지퍼의 오른쪽 이빨들이 사건이 아니라 내가 그해에 기울여야 할 노력과 인내라고 생각하기로 했습니다. 내게 남은 시간이 얼마인지 알 수 없으나 남은 세월 동안 내가 해야 할 노력과 인내가 충분히 기울여지려면 건강을 위한 노력, 마음을 다스릴 수 있는 수양을 위해 많은 공을 들여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지퍼 때문에 참으로 귀한 기회를 가질 수 있음에 행복한 하루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