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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흐르는강물처럼 Aug 26. 2024

중국에서 가치를 찾고  서양에서 답을 얻다

중국의 중체서용 - 한 번의 실패와 한 번의 성공

'답정너'  국어사전에 의하면,  ‘(답)은 (정)해져 있고 (너)는 대답만 하면 돼.’라는 말입니다. 여기서 '너'는 다른 사람들은 다 알고 있는 답을 혼자만 모르는 사람일 수 있습니다. 19세기 중엽에 벌어진 <아편전쟁>의 당사국 청나라가 바로 '답정너'였습니다. '해가 지지 않는 나라', 영국을 서양세계의 초강대국임을 인정하지 않고 '서양오랑캐'라고 업수이 여기며 아편전쟁을 시작했습니다. 이미 영국은 신대륙 식민지를 두고서 프랑스와 일전을 치렀고 그리고 식민지 미국과의 전쟁, 나폴레옹과의 워털루 전쟁, 네덜란드와의 전쟁, 인도침략전쟁 등을 수행하면서 싸움꾼이 된 나라였습니다. 많이 싸워 놈이 주먹이 세고 빠르다는 걸 모르고 4,000명에 불과한 영국군에게 일방적인 참패를 당하고 말았습니다.  청제국은 역사상 '19세기 최고의 답정너'가 되었습니다.  



만신창이의 몸으로 쌍코피를 줄줄 흘리며 화들짝 놀란 청나라 조정은 '외양간 고치기'에 나섰습니다. 수천 년간 동아시아의 맹주노릇을 하던 중국은 국가 동력을 잃어버리고 휘청거리며 개혁을 위한 국가 리모델링 사업을 시도했습니다. 오래된 집을 리모델링하려면 기둥은 그대로 두고 벽돌을 바꾸고 문과 창문 등을 교체하게 됩니다. 기둥까지 무너뜨리게 되면 리모델링이 아니라 재건축입니다. 중국에 필요한 것은 리모델링이 아니라 재건축이었습니다. 중화사상에 깊이 빠져서 중국이라는 기둥을 부여잡고 포기하지 못했습니다. 봉건국가가 새로운 정치체제를 가진 국가로 변신하는 과정에서 권력을 잃을까 두려웠던 조정은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중체를 포기하지 못했습니다. '소 잃고 외양간 고치는 개혁'이 되고 말았습니다.



현대 20세기 후반에 중국은 공산국가로서 또 한 번의 국가 리모델링을 시도하였습니다. 장제스의 국민당군과 마오쩌둥의 공산군은 대륙을 차지하기 위한 내전을 치렀습니다. 게다가 같은 시기에 일본과 중일전쟁을 치르면서 그야말로 외우내환의 30여 년의 세월을 보냈습니다. 국민당 세력이 대만으로 쫓겨난 후, 공산당은 대륙의 주인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념에 몰두한 마오쩌둥은 농민이 주가 되는 인민들의 평등사회를 약속하면서도 인민들의 피폐한 삶을 외면했습니다. 이념을 저버리는 중국은 물을 떠난 물고기와 같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대약진운동>과 <문화대혁명> 시기를 거치면서 국가의 존망이 위태로운 지경에까지 이르렀습니다. 마오를 이은 새로운 지도자 덩샤오핑은 마오의 이념지상주의를 벗어나 실사구시(實事求是)를 내세우며 개방개혁을 시도했습니다.




청나라 시대의 국가개혁책인 '洋務運動(양무운동)'은 '中體西用(중체서용)'이라는 기치를 내걸었었습니다. 그러나 현대의 중화인민공화국의 지도자 덩샤오핑이 시도한 '實事求是(실사구시)' 개방개혁에서는 '중체서용'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덩샤오핑의 개혁 역시 나라의 기둥은 그대로 유지하면서 이루고자 한 개혁이라는 점에서 청나라의 중체서용과 일맥상통합니다.



 근대와 현대의 국가개혁이 같은 방법을 사용했는데, 하나는 실패한 개혁이었지만 또 하나는 성공한 개혁이었습니다. 이유가 무엇인지, 후세의 우리들의 관심을 끌기에 충분한 일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더구나 시기상 시작과 끝이 같았던 청나라의 양무운동과 일본의 메이지유신이 하나는 실패, 하나는 성공한 것을 보면 우리들의 관심은 더욱 증폭됩니다.



1. 중화사상


청나라가 서양열강에 침탈을 당하게 된 이유는 군대의 조직과 무기의 열세였습니다. 그러나 근본적인 이유는 오만이었습니다. 그들이 말하는 '중화사상'이라는 용어 속에 벌써 오만의 기운이 서려 있습니다. 자기네의 세상이 세상의 중심이라는 생각입니다. 중국 너머 사방에 있는 나라들을 동이서융(東夷西戎)과 남만북적(南蠻北狄)의 오랑캐라고 불렀습니다. 그들은 '四面歌(사면호가)'에 둘러싸인 문화민족이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중화사상에 빠져 바깥 세상에 대해 눈감고 귀 막고 산 세월 동안 서양은 16세기의 대항해시대를 기점으로 시민혁명 과학혁명 계몽주의로 격동의 세월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엄마'를 뜻하는 단어는 발음은 비슷하지만 나라마다 다른 단어입니다.  그러나 뜻글자인 한자는 한자문화권에 속하는 어디에서나 '母'자로 통합니다. 루드비히 비트켄슈타인은 언어에 대해 이렇게 정의를 내렸습니다. '내 언어의 한계는 내 세계의 한계이다.' 인간은 사용하는 말과 표현이 자신의 사고와 경험을 규정하게 됩니다. 언어가 곧 프레임인 것입니다. 어머니를 '母'로 표현하는 문화권에서는 어머니가 등장하는 한자어 서적과 서한 등을 통해 중국의 어머니를 어머니의 전형으로 여기게 됩니다.



미국과 영국이 다른 나라에다가 영어를 배우라고 강요하지 않아도 다들 알아서 영어공부에 목을 맵니다. 나라의 국력이 그 나라의 언어의 위상을 높입니다. 우리나라의 국력이 크게 강해지자 세계 여러 나라의 대학에서 한국어학과가 만들어지는 것을 봅니다. 한자를 쓰고 중국어를 배우려는 '四面胡'들을 보며 중국이 얼마나 오만해졌을지 짐작이 됩니다. 한자는 유교사상과 도가사상이 보급되는 통로가 되었습니다. 우리나라만 해도 조선조에는 유학 연구의 한 갈래인 성리학적 세계관에 기초하여 국가가 운영되었습니다.



중국에 당(唐) 나라가 섰을 당시 당나라의 총생산량은 세계 총생산량의 40% 정도를 차지했을 것으로 추산합니다. 나라가 크기는 하지만 큰 나라 치고도 놀라지 않을 수 없는 경제력입니다. 다양하고 신기하고 값진 물건들이 서역으로, 서역을 넘어 유럽으로 흘러들어 갔습니다. 고부가가치를 지닌 희귀한 물건들이 값비싸게 팔려가면서 중국의 금고는 점점 커졌습니다. 비단길이 개척된 것도 이때입니다. 청나라 시대에도 청나라의 총생산량은 세계 총생산량의 25% 정도가 되었다는 연구결과도 있습니다.




 넓은 면적에 많은 인구에 넘쳐나는 물산은 문화적으로도 발전하는 중국이 되도록 만들었습니다. 중국이 세계의 중심국가라는 중화사상은 그래서 생겨났습니다. 대영제국 당시 영국이 '해가 지지 않는 나라'였을 때 그린위치 천문대를 기준으로 본초자오선을 정해 세계의 경도와 시간을 정한 것은 영국이 세계의 중심이고 시작이라는 생각에서 시작한 것이었습니다.



아편전쟁의 참패로 중화사상이 크게 훼손되는 '치욕의 100년'이 시작이 되었습니다. 몽골과 여진족이 세운 나라가 중원을 지배한 적은 있었으나 지배자 스스로 중화사상 숭배자가 되기를 자처해습니다. 그러나 서양 열강은 달랐습니다. 비록 중국이 근현대에 들어서 세계의 중심이라는 중화사상에 다소 상처를 입었지만 다시 세계의 중심이었던 그 지위를 다시 찾으려면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중국 대륙에 여러 나라가 흥망성쇠의 부침을 했지만 '쭝궈(중국)'라는 나라이름이 정식으로 등장한 것은 중화민국과 중화인민공화국부터입니다. 나라 이름으로 오만에 오만을 더한 듯합니다.




2. 청나라의 중체서용


강희제-옹정제-건륭제 삼황제 치세의 134년간은 중국 역사상 유례없는 태평성대를 구가한 시대였습니다. 이 시대를 일컬어 '강건성세(강희제-옹정제-건륭제로 이어지는 134년간의 평화시대)'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그러나 달도 차면 기우는 법입니다. 너무 오랜 세월 긴장감이 사라진 대륙 곳곳에서는 각종 부정부패가 싹이 트고 있었습니다. 서양 세계가 16세기의 대항해시대를 기점으로 하여 해양진출과 자본주의의 기틀이 다져지고 있었고 시민혁명, 과학혁명, 계몽주의로 격동의 세월을 보낼 때 중국은 평화와 안정 속에 단잠에 취해있었습니다. 역사가들은 강건성세가 막바지에 이른 1776년을 유럽이 중국을 추월하기 시작한 원년으로 생각했습니다.



청나라는 19세기 중엽에 두 차례의 아편전쟁을 치르면서 종이호랑이라는 것이 만천하에 드러나버렸습니다. <제1차 아편전쟁>과 <제2차 아편전쟁> 그리고 양 전쟁 사이에 터진 <태평천국의 난>으로 중국 대륙은 큰 혼란에 빠졌습니다. <태평천국의 난>이 일어난 다음 해인 1851년에 말단 궁녀인 수녀로 입궁했던 서태후는 황제 함풍제의 후사를 낳은 후 어린 나이의 황제들을 대신하여 섭정을 하며 청나라 마지막 시기에  48년간이나 권력을 잡고 무너지고 있는 나라를 멸망의 나락으로 끌고 들어갔습니다. 같은 시기에 영국은 빅토리아 여왕의 치세하에 있었습니다. 우연치고는 너무나 신기합니다. 두 나라가 같이 여성의 통치하에 있었고 한나라는 산업혁명을 통해 국가의 시스템과 정치가 크게 발전하여 강대국이 되었고 또 한나라는 여인천하에서 사치와 부패가 극에 달해 무너져가고 있었습니다. 서태후 통치 하에서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에서 참패한 청나라는 하이에나 무리에게 살점을 뜯기며 고통에 찬 채 눈만 껌뻑이는 늙은 코끼리 같았습니다. 결국 1911년 쑨원이 이끈 <신해혁명>으로 300년 淸제국은 자금성의 철문을 닫아야 했습니다.



아편전쟁에서 참패한 청나라가 그냥 앉아서 나라가 무너지는 길로 마냥 걸어갔을 리 없습니다. 전쟁을 통해 영국과 프랑스 등 서양 선진국의 신식무기와 군대의 조직력에 감탄한 청나라는 서양의 기술을 배워야 함을 절감했습니다. 중국 이외의 모든 나라와 모든 민족은 미개한 오랑캐라고 생각했던 그들이 서양 기술의 우수함을 인정하고 배운다 것은 자존심이 크게 상하는 일이었지만, 중국이 허약해졌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국가 발전의 비책으로 같은 시기에 시작된 청제국의 양무운동(洋務運動)과 일본의 메이지유신은 정반대의 결과를 낳았습니다. 두나라의 차이는 나라의 기둥을 지키려 했느냐 포기했느냐의 차이입니다. 청나라가 표방한 양무운동의 기치는 중체서용(中體西用)이었습니다. 뿌리 깊은 중화사상에 젖은 청나라였기에 비록 서양의 기술을 인정하기는 했지만 어디까지나 '무술 잘하는 졸부'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자신의 체형은 고려하지 않고 옷을 바꿔 입으려 한 것입니다.




하나의 산을 오르노라면 산의 아래쪽에 자생하는 식물과 중간산간과 고산지대에 사는 식물이 뚜렷이 다르다는 걸 알게 됩니다. 기온에 따라 식물이 달라지듯 토질에 따라서도 달라집니다. 중국은 기온과 토질을 고려하지 않고 꽃이 아름다운 나무를 심으려는 농부의 우를 범한 것과  같았습니다. 아편전쟁에서 무참히 패전을 겪었으면서도 오만한 중화사상에 빠진 중국은 ''體制(체제)'를 바꾸기보다는 中體(중체)를 유지하면서 서양의 기술을 받아들이는 '西用(서용)'을 택했습니다. 중국의 실패는 '중체'와 '서용'의 갈등 마찰 충돌로 생겨난 것이었습니다. '중체'는 '서용'을 가벼이 여겼고 고루한 '중체'의 틀 안에서 '서용'은 갈길을 찾지 못했습니다. 게다가 전체 사회에 만연한 뿌리 깊은 부패는 심어진 나무의 뿌리를 썩게 만드는 곰팡이와 같았습니다.



아편전쟁이 끝난 후 중국과 일본은 거의 같은 시기에 대개혁을 시작했습니다. 일본은 <메이지유신>을 단행하면서 脫亞入歐(탈아입구)와 和魂洋才(화혼양재)를 개혁의 이념으로 내세웠습니다. 아시아(亞)의 가치를 버리고(脫) 서양 유럽(歐)의 가치를 국가의 근본으로 삼고자(入) 했으며, 서양의 기술(洋才)을 발판으로 삼아 그들이 자랑스러워하는 야마토다마시(大和魂) 정신을  더욱 일본적인 정신으로 승화시키자고 나섰습니다. 중국의 것을 지키고자 한 중국과 달리 환골탈태의 자세로 개혁에 박차를 가했습니다.



1871년 12월 23일 107명의 사절단을 태운 배가 일본의 요코하마 항을 떠났습니다. 단장 격인 특명전권대사에는 부총리급의 이와쿠라 도모미치, 부대사는 오쿠보 도시미치, 기도 다카요시, 이토 히로부미였습니다.

사절단의 임무는 서양 선진국들의 교육, 과학 기술, 문화, 군사, 사회와 경제 구조 등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여 일본 근대화를 촉진하는 일이었습니다. 사절단에는 48명의 학자들과 행정가들 그리고 60명의 유학생들이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일본의 근대화 개혁을 이끌 두뇌들이 모두 떠난 것입니다. 1873년 10월 13일 귀국할 때지 거의 2년 동안 그들은 경제 군사 문화 도로 음악 미술 의복 식사 건물 등 모든 것을 눈여겨 보고 기록하고 사진을 남겨 귀국한 뒤, 일본을 아시아의 서양국가로 변모시켰습니다.  다시 말하면 중국식의 중체서용이 아니라 서체서용(西體西用)을 하겠다고 나선 것입니다. 우리나라 某기업의 총수는 '무한경쟁 시대 속에서 우리가 살아남을 수 있는 길은 변화뿐입니다. 마누라와 자식 빼고는 모두 바꾸어야 합니다'라고 했었습니다. 그 회사는 지금 세계 굴지의 기업으로서 우리나라 경제의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 있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입니다.



커피에 헤이즐넛향을 가미하면 헤이즐넛커피가 되고, 커피에 우유를 넣으면 까페라떼가 됩니다. 커피에 다른 재료를 첨가해도 역시 커피입니다. 비빔밥, 국밥, 카레라이스, 오므라이스 등의 음식도 밥을 빼면 요리의 정체성은 사라지고 맙니다. 중국이 나라의 정체성을 지키려 한 것은 인정받을 수 있을지 몰라도 국가의 존망 앞에서도 오만과 그들이 자랑하는 '대국적 위엄'의 허세로 무참하게 무너져버렸습니다. 결국 아편전쟁에서 패한 후 국가개혁으로 시도한 중체서용의 양무운동은 청일전쟁에서 일방적인 참패를 당하면서 사후약방문(死後藥方文) 격이 되고 말았습니다. 다른 시각으로 보면, 청일전쟁은 청나라의 중체서용과 일본의 서체서용의 성공여부를 평가하는 심판장이었습니다. 1912년 2월 12일 청 제국의 마지막 황제 선통제(푸이)가 강제 퇴위 당함으로써 청 제국은 276년 만에 허무하게 멸망하고 말았습니다.




3. 중화인민공화국의 중체서용


덩샤오핑은 경제적으로는 서구적 개방 개혁을 도입하였지만 정치적으로는 공산당 체제를 절대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마오쩌둥을 지도자로 하여 이룬 공산혁명을 성공시킨 중국 공산당 체제를 중체(中體)로 삼고 서구 자본주의식 개방 개혁을 서용(西用)하고자 한 실용주의적 '중체서용'을 시작했습니다. 언뜻 보기에도 공동생산 공동분배를 기조로 삼는 공산당과 사유재산을 인정하는 자본주의식 개방개혁 경제는 궁합이 맞지 않습니다. 청나라시대의 중화사상을 기반으로 삼고자하는 중체와 서구의 과학기술을 도입하겠다는 서용이 서로 어울리지 않았듯이 말입니다. 왜, 덩샤오핑은 중체서용을 시도했을까요? 그 과정과 내력을 더듬어 보겠습니다.



 일본제국은 만주사변을 일으켜 만주에 괴뢰국가인 만주국을 세우고 청나라 마지막 황제 푸이를 황제로 추대했습니다. 일본이 만주를 넘어 중국대륙 본토를 넘볼 때 장제스는 외적으로부터 나라를 지킬 생각은 하지 않고 일본과 굴욕적 협정까지 맺으며 일본을 묶어두고 공산당 토벌에 온 전력을 투입했습니다. 일본은 언젠가는 물러갈 적이지만 공산당은 내부의 적이므로 한 번 권력을 빼앗기면 끝이라 생각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나라보다는 자신이 우선이었나 봅니다.



장제스는 미국의 지원을 받아서 1932년 100만 대군과 폭격기 200대를 동원해 공산당 본거지인 장시성을 공격했습니다. 병력과 물량공세에 밀린 공산당은 장시성을 버리고 산 넘고 물 건너 2만 5천 리를 걷고 건너며 도피의 행군을 했습니다. 8만 6천 명이 떠났으나 굶주림과 추위에 떨며 일본군과 토벌군의 공격에 맞서 싸우며 목적지 산시성에 도착했을 때는 8천 명 정도만이 남았습니다. 지나간 성은 열한 개였고 넘은 산맥은 열여덟이었으며 건넌 큰 강만 열입곱 개였습니다. 3년여에 걸친 지옥의 행군이었습니다. 길고도 지난했던 이 고난의 도피행군을 '대장정(大長征)'이라 부릅니다. 거지 같은 행색으로 낡은 구식무기를 들고 신식무기에 맞서 싸운 그들이 17년 뒤 거대한 중국 대륙을 차지하리라고는 아무도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공산당은 이 장정을 공산혁명을 위해 목숨까지 기꺼이 바친 위대한 인민의 정신 승리라고 찬양합니다.



국민당의 장제스는 공산당을 섬멸하는 게 목적이었으니 일본군과 싸우면서 힘을 빼서는 안 된다는 전략으로 일본의 침략을 외면하고 공산당만 추격하고 공산당과만 전투를 벌였습니다. 여기서 우리의 눈길을 끄는 것은 대장정 그 고난의 시기에도 그랬고 이전과 이후에도 마오를 비롯한 공산당의 주장은 장제스의 국민당군과 손을 잡고(國共合作) 우선적으로 외적인 일본의 침략부터 막아내자는 것이었습니다. 실제로 대장정의 행군동안 공산당은 국민당의 장제스 군에게 쫓기는 가운데서도 일본군과 전투를 치르기도 했습니다. 결국 장제스는 일본을 몰아내지도 못했고 공산당을 막지도 못하고 대만으로 쫓겨났습니다. 마오쩌둥의 공산당군은 대륙을 차지했고 외적(外敵)인 일본을 막고자 한 노력으로 인민들의 절대적인 열렬한 지지를 받았습니다. 사실 공산당의 승리라기보다는 국민당의 실패라고 보는 게 더 맞겠습니다.



1949년 10월 1일 마오쩌둥은 텐안먼(天安門) 성루에 올라 <중화인민공화국>의 건국을 선언하였습니다. 아시아 최대의 사회주의 국가가 탄생한 것이었습니다. 새로 출범하는 공산국가를 위해 종주국 소련은 정치 경제적으로 많은 지원을 했습니다. 그러나 우호적으로 지내던 중소 간에 갈등이 시작된 사건이 있었습니다. 소련의 스탈린이 사망하자 스탈린의 후계자 흐루쇼프는 스탈린을 독재자이며 대숙청으로 피바람을 일으킨 학살자로 맹비난하며 스탈린 격하운동을 벌였습니다. 공산주의 종주국의 지도자의 동상이 거리 바닥을 뒹구는 걸 보며 이번에는 중국 공산당은 소련을 사회주의 배신자로 맹비난했습니다.



이상주의자였던 마오쩌둥은 이념을 통한 강력한 사회주의 국가 건설을 꿈꾸었습니다. 소련의 지원이 끊어졌지만 마오는 이념으로 굳게 무장하면 10억이 넘는 인구대국 중국은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는 자신감으로 제2차 5개년 계획('대약진운동')을 시작했습니다. 1958년 5월이었습니다. 한마디로 기계로 해야 될 일을 사람이 많으니 손으로도 해낼 수 있다는 무모한 생각이었습니다. 무리한 생산목표를 정해놓고 목표량을 달성하기 위해 인민공사에 속한 주민들은 밤낮으로 짐승처럼 일했습니다. 4년 후 처참한 실패로 막을 내리고 대약진운동 기간에 4천만 명이 굶어 죽는 비극이 발생했습니다. 이는 일본군이 중국인을 상대로 저지른 난징대학살의 30배  유태인 6백만 명을 학살한 나치의 홀로코스트의 최소 6배 이상 차이가 나는 수치입니다. 지도자의 무능함으로 일어난 대비극으로 역사에 기록될 입니다. 그럼에도 중국을 상징하는 수도 베이징, 베이징을 상징하는 자금성, 자금성의 정문 텐안먼(天安門) 정중앙에는 지금도 마오쩌둥의 대형 초상이 걸려있다는 것은 놀라운 일입니다. 마오쩌둥 초상화 양옆에는 ‘중화인민공화국 만세(中华人民共和国万岁)’, ‘세계 인민 대단결 만세(世界人民大团结万岁)’이라 새겨진 대형 현판이 걸려 있습니다.  



대약진운동의 실패로 정치 일선에서 후퇴한 마오쩌둥을 이어 류샤오치와 덩샤오핑이 집권하여 농촌경제부터 서서히 살아나기 시작했습니다. 이상주의자, 이념주의자이며 권력의 화신이었던 마오쩌둥은 그냥 지켜볼 수가 없었습니다. 판을 뒤집을 궁리를 했습니다. 사회주의 이념에 배신하는 반동분자를 색출해 낸다는 사상 즉 이념 대청소 작업을 하겠다는 것이었습니다. 대약진운동 기간 동안 마오에 대한 실망감이 커진 농민들을 동원하기는 어려웠습니다. 이번에는 어린 학생들을 선동하여 정적들을 제거하고자 했습니다. 이른바 <문화대혁명>이 시작되었습니다. 역사상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권력자가 일으킨 혁명었습니다.  '문화'와 '혁명'은 말은 지성과 긍정과 발전적 의미를 담고 있는 말이지만 고유명사로서 <문화대혁명>은 옛 것은 모조리 숙청하자는 명분하에 저질러진 '문화대파괴' 행위였습니다. 수천 년 역사를 간직한 문화재도 많이 소실되었습니다. 권력에 대한 노욕으로 저질러진 광기가 10년 동안 중국 전역을 휩쓸고 지나간 자리에서 중국은 10년 뒤로 후퇴해 있었습니다. 덩샤오핑도 문화대혁명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노동자로 전락하여 힘든 세월을 보내야 했습니다. 시진핑 주석의 아버지 시중쉰도 이때 둘째 아들 시진핑과 함께 하방 되어 고초를 겪었습니다.



드디어 마오쩌둥이 사망하고 이제 덩샤오핑이 다시 정치 일선에 나서게 되었습니다. 그에게는  쓰러지지 않는 어르신이라는 뜻을 가진 '부도옹(不倒翁)'이라는 별명이 붙여졌습니다. 정치적 부침을 거듭하며 끝내 정상의 자리에 우뚝 섰기 때문입니다. 중국공산당 창당 초기부터 대장정, 대약진운동, 문화대혁명 기간의 풍상을 온몸으로 받아내며 단련된 덩샤오핑은 이제 중화인민공화국의 총 설계사가 되어 그의 정치철학과 부국강병의 대계를 펼칠 때가 온 것입니다.



이념이란 무엇입니까. 한 시대나 사회 또는 계급에 독특하게 나타나는 관념, 믿음, 주의 따위를 이르는 말입니다. 마오쩌둥은 평생을 사회주의 이념을 정립하려 노력했지만 이념이란 괴물에 끌려다니다 생을 마감한 비운의 정치인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이런 정치인도 있었음을 잊지 말자고 텐안먼 광장에 그의 초상화가 아직도 걸려있다는 생각. 나만의 생각일까요.



발전 없는 이념투쟁으로 허송세월을 보낸 중국은 이제 위대한 지도자를 만났습니다.

덩샤오핑에게 사회주의는 수단이었지 목적이 아니었습니다. 그의 목적은 부국강병이었습니다. 그는 마오와는 달리 실용주의자였습니다. 마오쩌둥이 평생 동안 매달렸던 이념투쟁은 자신의 권력을 강화하기 위한 수단으로 생각했을 것입니다. 덩샤오핑은 마오쩌둥의 밑에서 2인자로 때로는 숙청된 자로서 살면서 광신적인 이념이 얼마나 위험한 생각인지를 배웠습니다. 쥐 잡는 게 고양이라면 쥐만 잘 잡으면 되지 고양이 털 색깔은 큰 문제가 아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쥐를 잘 잡는 고양이를 원했지 그 고양이가 중국 고양이든 서양고양이든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잘 먹고 잘살면 되지 사회주의면 어떻고 자본주의면 어떠냐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나이는 어언 74세가 되어있었습니다.

그가 없다면 누가 중국을 배부르게 할 수 있을지. 마음이 급했습니다. 서구식 민주주의 방식으로는 단기간 내의 개혁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중체마저 서구식 민주주의로 대체하면 모든 결정이 늦어지게 되니 공산당 1당 체제하에서 결정과 추진이 신속해야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공산당 체제는 절대 포기할 수 없는 '중체'였습니다.



덩샤오핑의 공산당 1당 체제에 대한 신념과도 같은 집념은 어디에서 연유한 것일까요? 권력을 잡고 난 후에 만들어진 것은 아닙니다. 역사적으로 중국은 땅이 넓고 인구가 많았던 만큼 바람 잘 날이 없었습니다. 전쟁과 내란이 일어날 때마다 한 나라 인구 전체에 해당하는 몇 천만 명의 목숨이 죽음을 당했습니다. 춘추전국시대부터 현대의 국공내전에 이르기까지 죽이고 죽는 피의 역사가 이어져왔습니다. 몽골의 침입으로 3천5백만 명, 만주족 후금과의 전쟁으로 2천5백만, 태평천국의 난으로 2천만, 신해혁명과 군벌 간의 전쟁, 중일전쟁, 국공내전, 대약진운동, 문화대혁명 등으로 그때마다 수천만 명이 희생되었습니다. 역사 속에서 중국인들은 정치적 안정이 가져다주는 평화를 신앙처럼 받들고 갈망하게 되었습니다. 대만, 티베트, 신장위구르. 갈라지면 떼죽음이라는 공식을 DNA처럼 몸에 지니게 되었습니다.



덩샤오핑은 신념과도 같은 공산당 1당 독재는 절대 양보하지 않으면서도 개방개혁에 대해서는 흐르는 강물과 같았습니다. 자신만의 생각과 아이디어를 고집하지 않고 전문가들의 조언과 의견을 존중해 적극 도입하고 반영했습니다. 군사전문가도 아니면서 독단적으로 독일군을 지휘하여 수렁에 빠진 히틀러와는 전혀 달랐습니다. 그는 공산당 독재에 대한 단호함과 개방개혁의 유연함의 경계를 절묘하게 넘나드는 곡예사였습니다.



빛이 있는 곳에는 그림자도 있습니다.

사회주의국가가 건설된 이후 중국인들은 인민공사에서 공동생산 공동분배하며 똑같이 가난을 나누어 먹고살았습니다. 개방개혁 경제로 사유재산이 인정되고 엄청난 속도로 경제가 발전하자 덜 배고픈 사람이 생겨나고 배가 부른 사람도 생겨나기 시작했습니다. 서로를 비교하기 시작했고 불만이 쌓였습니다. 관리들은 돈맛을 알고 부정부패가 판치게 되었고, 우리에게는 '인맥'으로 통하는 중국식 인맥 '꽌시(관계, 關係)'가 돈과 능력이 되었고 사회는 유전무죄 무전유죄의 세상으로 변하고 있었습니다. 사태의 중심세력인 대학생들의 불만도 컸습니다. 마오 시대에는 등록금 기숙사비 식비 등이 모두 무료였었는데 개방개혁 이후 대학들이 하나 둘 돈을 받기 시작하면서 가난한 집안의 대학생들은 정부에 대한 불만이 커졌습니다. 개혁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터져 나왔습니다. 요구사항 중에는 1당 독재에 대한 폐지도 있었습니다.



"최소한으로 피해는 줄여야겠지만,  어느 정도의 피는 반드시 필요한 거야!"

덩샤오핑이 임명한 총리 리펑이 저술한 본인 회고록에는 이런 진술내용이 있습니다. 중앙군사위원회 주석 덩샤오핑이 리펑 총리에게 내린 무력진압 명령입니다.



텐안먼 사태 이후에도 1당 독재는 지금까지도 건재합니다. 중체(中體)를 유지한 채 중국식의 부강한 사회주의 국가 건설은 성공적으로 이루어져 중국은 미국과 견줄 수 있는 유일한 국가 G2국가가 되었습니다. 덩샤오핑식의 中體西用으로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이 발전의 기조가 시진핑 주석 시대에도 끝까지 그대로 이어질지는 알 수 없습니다만, 152 cm의 작은 키로 지금까지도 중국 대륙에 길고 큰 짙은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으니 과연 덩샤오핑은 작은 거인이 분명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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