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람한 서울의 한강과 부산의 낙동강을 보며 사는 우리들 눈에 파리의 센강은 매우 아담합니다. 헤엄쳐서 건너가고 싶은 오만이 발동할 정도입니다. 폭이 2백미터 정도이니 한강 폭의 5분의 1정도 밖에 되지 못합니다. 한강의 마포대교를 걷는 사람들은 건물 옆 보도를 걷는 사람들의 걷는 속도보다 훨씬 빠르다고 합니다. 강폭이 넓어서 걸어도 걸어도 물만 보이는 같은 풍경이 계속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센강에서는 눈길을 놓아주지 않는 에펠탑, 유람선 사진을 찍는 사람, 서있는 멋장이, 앉아 있는 멋장이 또 걸어가는 멋장이. 온통 눈길 머무는 곳이 너무 많습니다
만물은 각도에 따라, 조명에 따라, 보는 사람의 마음에 따라 달리 보입니다. 센강이 아름다운 것은 각도, 조명, 마음 세 박자 모두 갖추었기 때문입니다. 강폭이 넓으면 양쪽의 두 강변이 한 눈에 다 들어오지 못합니다. 한쪽 강변이 맞은편 강변과 나누는 대화를 들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센강의 강변을 따라 조깅하는 사람들은 반대편 강변을 걷고 있는 친구에게 손을 흔들어 인사할 수 있을 정도입니다. 사람이 나누는 건 대화이고 건축물은 말없는 대화를 나눕니다. 바로 조화입니다. 양쪽 강변을 줄지어 선 유서깊은 박물관 성당 관공서 건물들은 조화를 이루며 서로 대화를 나눕니다. 아프로봐도 뒤로봐도 아름다운 '앞으로뒷테'이기를 초월해 센강은 위에서봐도 아래에서봐도 아름다운 '위에미테'입니다.
센강에서는 조곤조곤 수런수런 얘기소리가 들립니다. 에펠탑과 에뚜알 개선문의 대화. 루브르박물관과 오르세미술관의 대화. 센강에 항공모함처럼 떠있는 시테섬. 그리고 그 섬에 당당히 서있는 노트르담대성당과 위대한 왕 앙리VI세. 이들이 나누는 예술과 문화 그리고 역사의 대화가 들려옵니다. 과거와 현재의 멀리서 아련히 들려오는 대화도 있지만 현실의 대화도 있습니다. 다리 위를 지나가며 유람선 갑판 위에 있는 사람들과 손을 흔들며 인사하는 사람들. 그들의 턱에 난 수염의 질감마저 느껴질 가까운 거리. 다리 밑을 지날 때마다 아치형 다리 밑을 손으로 긁을수 있을만큼 낮게 다가오는 아치. 우리가 사는 도시의 우람한 강과 너무나 다른 모습에 비현실감이 들 정도입니다. 내가 마치 레고블럭 장난감 속의 장난감 병정이 된 것 같습니다. 소인왕국에 떨어진 걸리버가 된 것 같습니다. 센강의 진정한 매력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센강을 조망하는 방법 두 가지에는 순서가 있습니다. 먼저 안개가 끼었거나 비가 오는 날을 피해 화창한 낮시간에 에펠탑에 올라 센강의 전체를 조망하는 것입니다. 파리 시내를 동서로 흐르고 있는 센강과 그 위에 놓인 다리가 37개라는데 볼 수 있는대로 다리들을 보는 것입니다. 그런 다음에는 센강의 밤을 보는 것입니다. 낮의 저자거리에서 눈이 맞은 둘이 물방앗간에서 만나자는 밤의 약속을 하는 것과 같습니다. 한쪽 강변에 서서 맞은편 강변을 바라보는 방법은 보는 사람이 서 있는 쪽을 강변을 놓치게 합니다. 한곳에 서서 본다는 것은 정지된 한 장의 사진을 찍는 것입니다. 그러나 달리는 물체에 내가 얹혀 있으면 내눈은 동영상을 찍는 카메라가 됩니다. 에펠탑과 강변의 조명등이 켜지기 시작하면 이제 센강의 유람선 바토무슈를 탈 때가 된 겁니다.
유람선을 타고 밤의 센강변을 따라가노라면 지겨울만하면 전기조명을 받아 화려하게 거듭난 건축물들이 하나씩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어둠에 묻힌 침묵의 강이었을텐데 전기조명으로 살아있는 강으로 거듭났습니다. 바토무슈의 밤은 에펠탑의 낮보다 더 아름답습니다. 여인의 맨얼굴과 화장을 한 얼굴은 일란성쌍둥이 이상으로 다릅니다.
프랑스대혁명(1789년) 100주년을 기념하여 미국은 프랑스에 <자유의 여신상>을 선물하였습니다. 자유의 여신상이 있는 시뉴 섬(island)에서 노트르담 성당이 있는 시테 섬(island)방향으로 진행하다보면 먼저 나폴레옹의 개선문 에뚜알과 강 건너편의 에펠탑이 마주하고 있습니다. 에펠탑 역시 1889년 파리만국박람회를 준비하며 에펠이 설계하여 세운 철골구조의 탑입니다. 흉물이라고 당장 집어치라는 수많은 거센 항의에도 아랑곳않고 당시로서는 세계 최고의 탑을 기어코 세우고 맙니다. 소설 <목걸이>로 유명한 기 드 모파상은 대놓고 반대한 인사였습니다. 에펠탑 쪽으로 난 자신의 서재 창문을 막아버리고 반대쪽에 창문을 냈다고 합니다. 에펠탑에서 매일 점심식사를 하는 그를 보고 사람들이 그렇게 싫어하는 에펠탑에서 왜 매일 식사를 하는지를 물어보았더니 "파리에서 에펠탑이 보이지 않는 곳이 이곳밖에 없어서"라고 했다는 일화도 전해집니다. 이제 우리는 에펠탑없는 파리를 상상할 수가 없습니다. 100층 이상의 고층건물을 랜드마크로로 삼고자 하는 도시가 많습니다. 파리도 맨허튼과 같은 마천루를 지어버렸다면 그 사이에 묻힌 에펠탑은 흉물이 되어버렸을 겁니다. 바로 흉물과 명물의 차이는 여기에 있습니다. 에펠탑이 명물이 된 데는 파리의 노력이 숨어있습니다. 만일 고등 생명체가 존재하는 외계의 별이 있다면 야간조명으로 화려하게 빛나는 에펠탑이야말로 파리를 넘어서 지구를 대표하는 랜드마크가 되기에 충분할 것 같습니다.
세계의 경제대국을 꿈꾸던 프랑스가 에펠탑을 지어 만국박람회에서 온 세상에 위용을 뽐내고자 했다면, 정복자 나폴레옹은 세계를 포획하여 에뚜알 개선문으로 위풍당당하게 귀환하고자 했습니다. 1804년 노트르담대성당에서의 황제 대관식에서 나폴레옹은 오만에 가까울 만큼 자신에 차 있었습니다. 왕이나 황제는 교황에게서 관을 받던 전통을 무시하고 자신의 머리에 스스로 관을 썼습니다. 그것도 대관식에 교황이 참석했음에도 그렇게 한 것입니다. 다음해 아우스텔리츠 전투에서 승리한 나폴레옹은 앞으로도 자신의 승승장구 연전연승을 확신하고 전쟁에서 이기고 돌아올 때 자신을 맞아줄 개선문이 없음을 아쉬워했습니다. 나폴레옹의 명으로 시작된 공사는 1812년 나폴레옹이 러시아 원정에 실패하면서 중단되었다가 그가 사망한 후 1836년에 완성되었습니다. 그야말로 하늘을 찌를듯한 기세로 '나의 사전에 불가능이란 단어는 없다'라고 일갈하던 영웅의 허망한 파멸로 에뚜알은 주인과 만나지 못했습니다. 상제리제 거리로 방향을 낸 개선문의 아치는 상제리제 거리를 바라보며 거리끝에서부터 가물거리며 나타날 새로운 영웅을 기다리는듯 변함없이 꿋꿋이 서 있습니다.
센강 유람선 바토무슈의 귀환점 인근의 에뚜알과 또 다른 귀환점에 있는 노트르담 성당의 거리가 먼 만큼 한 영웅을 통해 야망과 현실의 거리가 멀다는 걸 입증하는 듯합니다. 영웅의 꿈은 늘 허망합니다. 그리스의 알렉산더는 인도 원정후 모기에 물려 말라리아로 생을 마감했고 로마의 시저는 황제몽을 꾸다가 그의 양아들과 젊은 정치인들에게 암살을 당해버렸습니다. 나폴레옹의 시신은 에뚜알에서 가까운 앵발리드다리를 건너면 나타나는 앵발리드에 매장되어 있습니다. 아무튼 프랑스의 힘을 상징하는 두 건축물은 센강의 이에나 다리와 알마 다리를 건너서 오고 갈 수 있는 위치에 마주하고 있어서 긴 생각을 하게 합니다.
아폴리네르(G. Apollinaire·1880~1918)의 시의 첫 구절. '미라보 다리 아래 센 강이 흐르고, 우리들의 사랑도 흘러간다'에는 시적인 특별한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런데도 우리의 마음을 스치고 지나가는 무언가가 있습니다. 바로 대화를 하는 강, 센강이 흐르고 그 위로 그냥 미라보 다리가 놓여있기 때문입니다. 시는 시인이 지었지만 시가 시되게 한 것은 시인이 아니라 센강이었음을 아시는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