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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불량품들의 사계 Sep 11. 2024

불량품들의 사계

나팔꽃은 철조망을  기어오르고 134

나팔꽃은  철조망을 기어오르고



           

새벽에 신문을 가지러 마당에 나갔다. 검정 비닐봉지가 집 문고리에 걸려 있다. 피망, 감자, 홍고추가 들어있었다. 풀치라는 것을 단박에 알 수 있었다.

계곡 건너에 창고가 있다. 하나로 마트에 채소를 납품하는 창고다. 풀치는 한밤중 창고에 놀러 간다. 일을 도와주고 상처 난 것을 얻어다 문에 걸어두고 간 것이다.  

    

다음 날 아침에 출입문을 여는데 문이 열리지 않았다. 최대한 힘을 줘 문을 열고 고개를 내밀었다. 문밖에 더덕, 오이 박스가 있었다. 손을 내밀어 박스를 밀고 밖으로 나갔다. 풀치였다. 나는 풀치에게 묻지도 않고 오이, 더덕을 친구들에게 주기 위해 비닐봉지에 나누어 담았다.     

오이 세 개를 뒷방 할매 문 앞에 두었다. 성길씨 문 앞에도 오이를 놓았다. 성길씨가 집에서 나오면서 상냥하게 말했다.

“이것 술고래가 내 집 앞에 두고 간 것 내가 그쪽 집 문 앞에 갖다 놓은 거예요.”

“그랬구나! 고마워요.”

성길씨가 담배를 피우러 마당 끝으로 걸어갔다. 마침 풀치한테 전화가 왔다. 나는 전화에 대고 풀치에게 말했다.

“니가 성길씨에게 준 오이랑 더덕 있잖어, 성길씨가 내 집 앞에 갖다 놓았다고 헌디. 잘 받았어.”

“뭐라고요! 그 영감쟁이 나한테 죽으려고, 내가 새벽에 누님 집 문 앞에 갖다 논거야! 누님 준거라고요.”

나는 풀치 말을 믿는다. 성길씨는 자잘한 거짓말을 하다가 나한테 몇 번 들켰다.

풀치는 혼자 씩씩거리다가 엉뚱한 말을 했다.

“누님, 오이소박이 담아서 나 좀 줘요.”

풀치는 나에게 어려운 것을 주문했다.

“나아, 오이소박이는커녕 상추 겉절이도 헐 줄 몰라야. 그래서 소박맞을까 봐 혼자 살지.”

나는 무자비하게 거절했다.

“내가 오이소박이를 제일 좋아해요?”

“나는 됐고. 성길씨한테 부탁해봐. 아니먼 가져가든가.”

“누님, 농담이야. 농담 알았지!”

풀치는 오이소박이 담아주라고 나에게 저 많은 오이를 가져다준 것이었다.

나는 오이, 더덕을 차에 싣고 송파구와 구리에 사는 동생들과 친구들에게 배달했다.

그날 저녁 우리 집 밑 ‘하비비 카페’ 여사장님께서 밑반찬을 만들어 놨다고 나에게 오라고 하였다. 텃밭 가 도라지꽃을 지나 걸어서 내려갔다, 하비비 여사장님은 햇반도 한 박스 사놓았다. 풀치에게 갖다 주라고 하였다. 얼마 전 하비비 놀러 가서 풀치가 맘 잡았다고 이야기를 했었다.     

“우리가 관심을 가지면 그도 자릴 잡겠지요.” 여사장님이 말했다. 그렇게만 된다면 사람의 관심이 그리웠던 풀치도 골목에서 비척거리지 않겠지. 차라리 구치소가 덜 춥고 덜 외로웠을 거라고 느꼈을 풀치가 그래도 바깥이 더 났다는 생각이 들었으면 싶었다.

나는 햇반을 가져다주면서 집에 있는 오징어채 볶음, 멸치볶음이랑 풀치 계단에 두고 왔다.  

    

그날 밤 풀치는 손전등을 들고 밤늦게 마당에 나타났다. 휴대폰 배터리가 닳아 내 집에서 충전시켜야겠다고 했다.

“아따, 귀찮해불구만.”

충전이 다 될 때까지 집에 들어오라고 할 수 없고, 평상에 앉아 기다리라 할 수 없었다. 나의 어정쩡한 태도를 보고 풀치가 말했다.

“누님, 집에 갔다 한 시간 뒤에 올게요.”

풀치는 날이 새도록 집에 오지 않았다. 어디서 술을 퍼마시고 있는 것 같다.    

  

다음 날 아침 나는 막사 철조망 안을 잡은 호박 덩굴손을 떼어내고 있었다. 풀치는 마당으로 성큼성큼 내려왔다. 텃밭 가장자리 돌밖에 앉았다. 술에 취해 있지 않아서인지 내 옆에 앉는 것을 부끄러워했다.

“어 술 안 마셨네.”

“어제 기다리다가 깜박 자버렸어요.”

“술 안 마시고도 잘 줄도 아네.”

“누님, 여자친구 소개해 주세요.”

“오매, 무슨 생뚱맞은 소리여. 살만 헌 갑네. 일 년 동안 소주 안 마시먼 소개해 주께.”

“진짜죠? 만약에 내가 술을 안 마시면 내가 누님을 좋아해도 되죠?”

“언제는 말허고 좋아했냐? 글고 선 넘다가 자빠지는 사람 많이 봤다.”

“누님은 자꾸 선을 긋고 그랍니꺼.”

“이단 옆차기 허지말고. 하기여 사람 일은 모르지.”

풀치는 옷을 털고 일어났다.

안동이 고향인 풀치는 간혹 경상도 사투리가 튀어나온다. 풀치는 한때 꿈이 아나운서였다고 했다. 목소리는 굵고 대형 스피커보다 크다. 그는 사투리를 고치려고 엄청 노력했다고 했다.

나도 그 옛날 방송국에 진출하려고 했었다. 둘이 방송국에서 볼 뻔했다. 어쨌든 우리는 보고야 말사이었나 보다.    

  

풀치는 4일째 술을 마시지 않고 있다. 나는 풀치가 진짜 술을 안 마시면 어떡하지 걱정되었다. 이도 다 빠져 돈도 한 푼 없어, 집은 컨테이너...... 끔찍하다. 그렇다고 술을 마시면 지랄하는 꼴을 봐야 하고 괴롭다.

햇빛이 쨍쨍 찌는데도 나팔꽃은 철조망을 꿋꿋이 기어오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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