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골에서는 갑자기 폭설이나 소나기가 내리면. 사람이나 개나 닭들 모두 급히 처마 밑으로 피한다. 처마 밑에서 눈이나 비를 털어내며 잦아들기를 기다린다.
그 시절에는 처마 밑에 고드름이 자랐다. 요즘 건물은 처마가 없어 고드름을 보기가 쉽지 않다. 처마 밑에 집을 짓고 살림하는 제비도 없다. 나는 처마 아래 서서 손을 내밀어 눈송이나 비를 받는 것을 좋아한다.
이 집에 이사 왔을 때 처마가 짧은 것이 안타까웠다. 문을 열어놓으면 출입구 안까지 빗방울이 튀었다. 벽지가 물에 젖어 찢어졌다. 낙수 때문에 처마 밑 시멘트도 갈라지고 깨졌다.
성길씨에게 말을 꺼냈다.
“아저씨, 처마를 늘려야 겄어요.”
“그럼 반반 내서 해요.”
그는 숨 한번 쉬지 않고 대답을 했다. 대답을 들은 순간 주인이 해줘야 하는 것 아닌가? 의문이 들었다. 나는 처마 가격도 모르는데 ‘네 그렇게 하게요’ 답이 쉬이 나오지 않았다. 하지만 가로세로 2m 안 되는데 각자 십만 원 이상은 안 나오겠지.
우리는 내 차를 타고 3km 떨어진 함석공장엘 찾아갔다. 내 집에 맞는 처마 크기는 오만 원이라고 했다. 나는 생각보다 저렴해서 얼른 “짜르쑈! ” 했다.
트렁크에 함석을 싣고 집으로 오는 도중 성길씨가 조수석에서 말했다.
“서부농협 맞은편에 엄청 큰 철물점 생겼어요.”
나는 성길씨를 쳐다보았다.
‘시방 거기 가자는 뜻이지요?’
나는 서부농협을 지나 춘궁동사무소 앞에서 유턴해 차를 철물점에 주차했다. 진짜 철물점 안에 사람만 빼고 다 팔았다. 성길씨는 애들이 문방구 가서 구경하듯 샅샅이 들여다보고 다녔다. 그는 실컷 구경하고 난 후 장도리를 하나 샀다. 성길씨는 계산대 옆에 걸려 있는 줄자를 만지락거리 더니 아예 꺼내어 들여다보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다가 내가 말했다.
“내가 사주께요.”
나는 줄자를 그의 손에서 빼 들고 계산대에서 물었다.
“사장님 줄자 얼마요?”
성길씨는 내 옆에서 딱 붙어있었다.
“이만 원요.”
나는 철물점 사장님을 입을 쳐다보다 깜짝 놀랐다. 한 주먹도 안 되는 줄자가 이만 원이란다. 철물점 사장님은 내가 놀라고 있다는 것을 눈치챘다.
“일제예요.”
아무리 일제라지만 너무한 거 아닌가. 나는 ‘지까짓꺼시 7, 8 천 원 허겄재’ 생각하고 사 준다고 나선 것이었다. 한번 칼을 빼는 데 안 사 줄도 없고 “난감허네” 노래가 절로 나왔다. 성길씨는‘됐어요’ 한마디 안 하고 내 옆에 딱 붙어 서 있었다.
나는 줄자 값을 계산하고 나왔다. 내가 이만 원 손해 본 것이다. 처마 값 만 이만 오천 원 합하면 4만 오천을 쓴 것이다. 나는 속이 쓰렸다. 처마도 주인이 해줘야 하는데, 그래 생각했던 오만 원보다는 적으니까... 생각하면서 속을 달랬다. 이 일은 이사 온 해에 있었던 일이었다. 그땐 내가 성길씨를 잘 몰랐다.
그 후 하남 교산 3기 신도시 재개발로 인해 LH에서 나와 지장물조사받는 날이었다. 개발대책위원회에서 지장물조사는 반대를 하라고 했다. 그런데 성길씨는 내 의견도 묻지 않고 하필 이 더운 날 일방적으로 조사원들을 불렀다. LH 용역회사 알바생들이 방안 물건과 밖에 물건들을 일일이 노트에 기록했다. 이사 갈 때 이삿짐을 싣고 가는 내용물을 기록한 것이다. 이삿짐 비용을 준다는 조사였다.
이곳으로 이사 와서 하고 싶은 것 중 평상에서 먹고 자는 것이었다. 나는 어렸을 때 아부지가 만들었던 평상하고 똑같은 걸 만들었다. 나는 이곳에서 쫓겨날 때도 저 평상을 절대로 두고 갈 수는 없다고 누누이 사람들에게 말했었다. 그 시절 평상에 모기장을 치고 식구들끼리 밥을 먹고 모깃불 켜고 잠을 잤었다. 그래서 나는 평상을 이고 사는 일이 있더라도 가져가야 했다. 정말 평상을 두고 이사 가게 된다면 어떡하지. 가슴이 멍해졌다. 나는 앞산을 바라보고 있었다. 조사원들이 내게 물었다.
“이사 와서 돈 들여서 고친데 또 있어요?”
“다 돈 들여서 고쳤죠. 6백만 원이나 주고.”
그들은 내가 말하는 것을 일단 다 적었다. 그때 나는 퍼뜩 처마가 생각났다.
“처마 이것도요.”
그것을 지켜보던 성길씨가 갑자기 팔딱팔딱 뛰었다. “처마는 내 돈 들여 만들었는데 뭔 소리 하는 것이여!” 성길씨는 소리쳤다. 성길씨는 눈이 뒤집히며 “옆집은 내 집에 있는 것 아무것도 손대지 마세요! ”라고 했다.
나는 어이가 없었다.
“아저씨! 그때 내가 줄자 사 준 날 기억나요? 반반 했다고요! 나도 이만 오천 원 냈다고요! ”
“지금 뭔 소리? 내가 다 냈는데!” 성길씨는 자기가 다 냈다고 우겼다.
성길씨는 수돗가로 마당으로 뛰어다니며 있는 힘을 다해 큰소릴 쳤다. 숭어 새끼도 아니고. 나는 기가 막혔다.
“아저씨, 내가 생생히 기억하는디. 비싼 줄자도 사줬는디! ”
“시끄러워요! 내 집에 손대지 말아요!”
검사원 청년들은 놀란 눈으로 밭 가에 서 있었다. 지나가는 마을주민들도 마당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나는 성길씨에게 소리쳤다.
“아저씨 소리 좀 그만 쳐요!”
내 말이 끝나자 성길씨는 달려와 나에게 얼굴을 들이밀며 “나는 못 배워서 왜?”라고 했다.
성길씨는 화를 내며 자기 집으로 쏙 들어갔다. 나는 그에 등에 대고 말했다.
“누구는 배웠고? 못 배웠다고 아저씨처럼 다 그러요?”
나는 분하고 창피했다. 마당에서 숨을 가다듬다 집으로 들어왔다. 청년들이 따라 들어왔다. 나는 그날 틀림없이 이만 오천 원을 내가 냈다고, 반반했다고 했다. 청년들은 LH에서 이차로 다시 나온다는 말을 하고 허둥지둥 떠났다.
슬픈 날은 술을 퍼야 한다. 나는 도저히 집에 있을 수 없어서 상계동 친구에게 갔다. 차 안에서 눈물이 났다. 슬펐다기보다는 분했다. 성길씨는 무엇 때문에 그렇게 나에게 화를 냈을까. 그동안 집을 떠난다는 것에 화를 어디다 풀지 모르다가 나한테 날 잡고 푼 것인가. 설마 돈 그 처마값 몇 푼 때문인가. 때문은 아니겠지. 그래도 그렇지 나는 갈피를 못 잡고 차 안에서 ‘용재 오닐의 섬 집 아이’를 들으면서 콧물 눈물을 닦았다. 영아는 밖에 나와 있었다.
“어디 가서 밥이나 먹자.”
친구는 나를 뷔페에 데리고 갔다.
“내가 도저히 집에 있을 수 없어 왔어야, 이런 일은 내 생전에 처음이어야.”
“부부 싸움하고 집 나왔어?”
“농담이라도 그런 말 허지 마라. 나한테 퍼붓는 거 니가 봐야했는디. 악만 남은 남자 같었어.”
이런 말을 하는 내 처지가 열받은 게 아니라 억울하고 쓸쓸했다. 그 사이 빌딩 뒤로 해가 사라졌다. 하소연도 끝을 내야 하나, 영아 눈치를 봤다. 친구는 밥 하러 간다고 일어섰다.
나는 집 근처 차 안에서 음악을 듣고 있었다. 더워서 어디 가기도 그렇고 갈 곳도 없었다. 할 수 없이 꼴도 보기 싫은 마당에 발을 들여놓았다.
성길씨 방에 불이 아직 켜져 있었다. 나는 성길씨 방에 ‘아나 이거나 먹어라’ 주먹질을 내리 두 번 했다. 까불이가 옆에서 나를 쳐다보고 있다. ‘까불이, 쉿’