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텃밭에서 노랗게 속이 찬 배추를 고르고 있었다. 혜숙 언니가 송파에서 놀러 왔다. 언니는 누가 부탁을 하면 오지랖인 나처럼 거절을 못 한다. 나는 말뚝만 한 무를 뽑아 언니에게 보여주며 말했다.
“언니, 요즈음 내가 친구들에게 신세를 지잖어?”
“무슨 신세야! 그동안 그 사람들도 너한테 받았지.”
“그때는 그때고.”
“뭔 말을 하고 싶어서.”
나는 언니에게 바짝 다가갔다.
“언니, 내가 친구들이 용돈 준 거하고 알바한 거랑 모았어. 염색한 천 하나씩 줄라고.”
“너, 염색이 얼마나 힘든 줄 알어?”
“그러니까 언니가 도와줘야지 설마 죽기야 허겄는가.”
“죽을 수 있어.”
“김장보다 힘들어?”
“응. 나는 괜찮지만.”
“돈 주고 사서 주는 것 말고 내가 정성 들인 것을 만들어 주고 싶단께.”
“알았다. 대신 주고 남은 것은 팔아서 네 용돈 써라. 그것 염색하면 인사동에서 장당 6-7만 원에 판다.”
언니는 말이 끝나자 어디다 전화를 했다.
“햇빛이 중요해, 늦은 감은 있지만. 삼일 뒤에 감 염색물하고 머플러 천이 백 장 도착할 거야.”
11월 중순이지만 햇빛이 좋았다. 목포에 전화해 자연산 홍어를 주문했다. 신안 지도 섬 출신인 나는 행사만 있으면 홍어부터 산다. 돼지고기를 삶아 삼합을 하려 했지만, 김치에 싸 먹는 홍어회로 결정했다.
혜숙 언니는 하루 전날 와서 준비했다. 마을버스 종점 커피숍 여사장님, 아랫집 하비비 카페 여사장님, 혜숙 언니랑 막걸리까지 곁들여 전야제를 거대하게 치렀다. 내일을 위해서 우리는 일찍 파했다. 나는 약간 긴장을 했다. 고양이들도 잠을 안 자고 지붕과 천장 사이에서 돌아다녔다. “야들아! 잠 좀 자자.”
언니는 새벽부터 일어나 빨간 나일론 줄로 마당 가 감나무와 호두나무에 연결했다. 밭 가운데 막사에서 연자방아로, 마당에서 감나무로, 수돗가 단풍나무에서 집 처마로 사방에 줄을 연결했다. 언니는 가로세로 허공에 줄을 그었다. 그사이 나는 김장용 통과 빨간 통, 양동이를 내왔다. 집주인 성길씨에게 줄 좀 매달아 주라고 어제부터 말했는데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나는 미역국과 조기를 굽고 작년에 직접 담은 김장김치로 아침준비를 했다.
“언니 많이 먹소.”
“음식 할 줄도 모르면서 이렇게 진수성찬이야?”.
“일단 밥은 멕이고 일을 시켜야재.”
숟가락을 빼자마자 언니는 나가서 또 일을 시작했다. 언제 갈아입었는지 작업복을 입고 있었다. 햇빛 한 톨이라도 그냥 지나가는 게 아깝다며 언니는 날아다녔다. 그런데 이게 웬일? 갑자기 먹구름이 끼다가 해가 나왔다가 흐리다가 애간장을 태웠다. 혜숙 언니는 묵묵히 김장용 통에 감물을 부었다. 빨간 통에는 물을 받았다. 천을 감물에 담갔다가 건져 가볍게 짰다. 그다음 천을 맹물에 적셨다 빼서 손에 힘을 빼고 살짝 짰다. 그리고 줄에 널었다. 널고 난 지 15분쯤 지나 바짝 마르기 전에 걷었다. 나는 처음에는 재미있었다. 흰 천 백 장을 해 떨어질 때까지 이렇게 해야 했다.
“이걸 언제 다 허까.”
“너 지금 후회하지?”
언니가 나에게 물었다.
“노우!”
단호하게 대답은 했지만 해가 질 때까지 끝낼 수 있을까? 슬슬 걱정 들었다.
열 시가 되자 구름이 걷히기 시작했다. 그야말로 우리가 원하는 따갑지도 찌지도 않는 햇빛이었다. 혜숙 언니는 하늘을 보며 웃었다. 내 얼굴도 덩달아 맑아졌다. 혜숙 언니가 가르쳐 주는 대로 했지만 나는 헤매기 일쑤였다. 그러던 참에 도와주러 온 사람들이 집으로 들어섰다. 혜숙 언니 친구 대여섯 명과 나의 지인들이 왔다. "이것, 천보다 사람이 더 많은 것 아니야" 다 같이 널고, 걷고 하니 금방 시간이 갔다.
허공에 하늘거리는 염색 천이 그야말로 장관이었다. 감나무, 호두나무, 단풍나무 그림자가 햇빛에 반사되어 천에 그대로 떨어졌다. 염색 천에 떨어지는 나뭇가지 그림자가 바람 따라 살랑거렸다. 100폭짜리 병풍이 허공에 펼쳐졌다. 나는 넋을 놓고 있다가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내 사진을 찍었다. 우리 마을을 사진에 담으려고 자주 오는 이왕호 사진작가는 드론을 띄웠다. 용인에 사는 성실이 동생은 카메라를 들고 나타났다. 지나가는 등산객도 마을 주민들도 마당에 입구에 서서 구경했다.
“점심 먹읍시다.”
누군가 소리쳤다.
“아, 이게 뭔 일이래요?”
평상에 펼쳐진 광경에 사람들은 환호성을 질렀다. 오늘을 위해 보령시 오천항에서 은정이 동생이 배를 타고 나가 쭈꾸미를 잡아 왔다. 쭈꾸미 샤브샤브와 각자 들고 온 추어탕, 열무김치, 겉절이, 소 불고기, 홍어회가 차려졌다. 다 같이 구름 한 점 없는 하늘 아래 모여 앉았다. 염색 천은 바람 따라 살랑거렸다. 아치울에 사는 성호 오라버니 부부가 소문을 듣고 과일과 막걸리를 사 왔다. 우리는 서로 덜어주고 밀어주며 밥을 먹었다. 밥 먹다 말고 내가 혜숙 언니에게 물었다.
“언니, 왜 흐컨 천이 그대로 있어요?”
“기다려봐. 세상에 한 번에 되는 것은 없어.”
“점심때가 되도록 저러먼 은제 물이 든다는 거여.”
“배고프다고 쌀 먹고 뜨거운 물 먹을래?”
혜숙 언니가 웃으며 말했다.
“자아! 다 먹었으먼 햇빛 한 톨이라도 애낍시다!”
나는 햇빛 핑계를 댔지만, 사람 있을 때 하려고 재촉했다.
사람이 모이는 곳에는 일하는 사람과 설렁설렁 돌아다니면서 노는 사람이 있다. 그러든가 말던가. 누구 하나 신경 쓰지 않고 각자 자기 일에만 열중하고 있었다. 무사히 하루해가 산 뒤로 넘어가고 있었다. 흰색 천은 아이 보리 색으로 변했다. 밤색으로 되려면 아직 몰랐다. 그래도 지인들 줄 생각에 나는 배춧속보다 더 노랗게 뿌듯함이 차올랐다.
해가 완전히 가라앉았다. 집주인 성길 씨는 일이 끝날 무렵 문을 열고 나타났다. 그는 줄에 널려있는 염색 천을 보며 놀랐다. 나는 노모 드리라고 성길 씨에게 한 개 가져다줬다. 지인들도 각자 머플러 하나씩 들고 집으로 갔다.
다음날 아침 남은 80장을 혼자 물에 담갔다가 널었다 걷었다 반복했다. 그나마 내가 죽지 않고 살아남은 것은 염색물에 담그지 않고 맹물에만 담갔다가 널었기 때문이다. 천을 널다가 혜숙 언니 말이 떠올랐다.
“죽을 수도 있어.”
삼 일째 되는 날 요령이 생겼다. ‘나의 잔머리를 누가 따라가겄냐.’
고무호스를 목욕탕에서 가지고 나왔다. 줄에 널어놓은 채로 물을 뿌렸다. 세상에 이렇게 쉬운 것을. 호스가 안 닿는 곳은 걷어 올 수밖에 없었지만. '이것도 어디냐.'
햇빛을 쐴수록 천은 감색으로 물이 들었다. 내가 상상했던 색깔이 서서히 드러났다. 나는 평상에 앉아 아가가 발걸음 떼듯 붉은빛으로 물들어가는 앞산을 바라보았다. ‘그래, 하루아침에 되는 것이 어디 있겄어, 사랑도 서서히 스며들어야 원하는 색깔이 나타나는 거지’ 감상에 젖고 있었다. 그사이 해는 완전히 사라졌다. 천을 걷을 생각 하니 감상은 순식간에 사라졌다. 천을 걷어들고 집에 들어와 방바닥에 홍어처럼 쭈욱 뻗었다.
다음날 집에 오지 못한 친구들에 돌리고 가족들에게는 택배로 보내줬다. 정말 예쁘고 고급스럽다고 전화가 왔다. 죽었다가 살아난 보람이 있었다. 정성이 들어가면 감탄을 자아낸다는 것을 다시 한번 확인하는 순간이었다.
그나저나 벽과 그릇과 그날 입고 일했던 옷은 감물로 범벅이 되었다. 만만하게 보고 염색을 시작했지만, 내가 허리 수백 번 굽히자 다들 좋아했다. 나는 또 할 수 있을까. 막상 누가 하자고 달려들면 당연 노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