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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량품들의 사계

낙엽, 이 세상 빛깔이 아닌 것 같아 217

by 불량품들의 사계

낙엽, 이 세상 빛깔이 아닌 같아



해 질 녘 마당 귀퉁이 어둠이 내려온다. 어둠이 잔등 너머 터벅터벅 돌아오면 사라졌던 모든 것들이 돌아올 것만 같다.

텃밭 가운데 서 있는 대추나무에 꽃님이는 발톱을 갈고 있다. 나를 보자 밥 달라고 달려든다.

‘순둥이 데려오먼 통조림 줄랑께.’


얼마 전 순둥이는 뒷다리 왼쪽을 절었다. 동네 깡패 노랑이한테 당한 거 같았다.

“순둥이 다리 왜 그래요?”

수돗가에 앉아 있는 성길 씨에게 물었다.

“꽃돌이가 물었어요.”

“순둥이만 보면 도망치기 바쁜디 먼일일까.”

“순둥이가 달려드니까 꽃돌이가 다리를 꽉 물었어요. 꽃돌이도 더는 못 참겠다는 거죠.”

성길씨는 싱글벙글 이었다.

“아저씨, 왜 웃어요? 순둥이가 다리를 저렇게 들고 있는디.”

성길씨는 아차 싶었는지 웃음기가 싹 사라졌다,

“글고 순둥이도 아저씨 애잖아요!”

성길씨는 몇 달 전 밖에서 들어온 꽃돌이에게 싸랑을 흠뻑 주고 있다.


나는 순둥이를 당장 동물병원에 데리고 갔다. 다행이다. 약 먹으면 낫는단다. 대신 십일 동안 방에 가두어 놓으라고 했다.

순둥이는 밖에 나가고 싶다고 울고 보챘다. 8일째 되는 날 성길씨가 나 몰래 창문을 열어줬다. 순둥이는 밖에서 며칠 놀았다. 다리도 나았다. 그런데 애가 삼일 째 집에 들어오지 않는다. 이상 한 생각이 들었다,

“아저씨, 왜 순동이 안 들어 오께라이?.”

“고양이들은 영역싸움에서 지면 떠나요.”

정말 영영 안 나타나면 어쩌지! 갈만하고 숨을 만한 곳을 찾아 돌아다녔다. 순둥이 아비 까불이도, 어미 도도도 하루아침에 사라졌는데. 추워지려면 아직 멀었지만 불길했다.

십 일이 지났는데도 나타나지 않았다. 창문을 열어놓고 처마 그릇에 사료를 듬뿍 그릇에 부어놓았다. 동네 개들과 고양이들이 사료를 먹어치운다.


덥다. 장마가 끝났지만, 그래도 한여름에 비하면 덥지 않다.

평상에 앉아 있는데 마른 옥수수 대가 보였다. ‘옥수수 대나 뽑자’ 밭에 들어서자 놀란 물까치가 토마토를 쪼다 날아가 대추나무와 아로니아 가지 사이를 쉴 새 없이 옮겨 다닌다. 까마귀는 호두를 쪼다 날아가고 참새는 공중에서 눈치를 살피고 있다.

신발장에서 땅콩을 가지고 나왔다. 마당에 던져주었다. 참새들은 마당으로 내려앉을 듯 말 듯 공중에서 날갯짓을 하고 있다.

자리를 비켜 방으로 들어왔다. 책상 위 순둥이 목줄이 눈에 들어왔다. 새와 쥐를 잡아 처마 밑이나, 방에 갖다 놓아 방울 달린 목줄을 채워주었었다. 순둥이 녀석은 답답했는지 기를 쓰고 빼버렸다. 꽃님도 밖에서 잃어버리고 왔다.

목걸이를 서랍 속에 집어넣었다.

‘길을 잃어서도 아니고, 집을 몰라서도 아니여’ 더는 찾으러 다니지 않기로 했다.

쉴 새 없이 떨어지는 낙엽. 꼭 빈집 같다. 성길씨가 대빗으로 마당을 쓸고 있다.

모기한테 물린 발뒤꿈치를 긁다가 나도 마당이나 쓸까 생각했다.

‘쓸면 뭐 해 또 떨어질 것인디.’

풀숲에서 귀뚜라미 날개 비비는 소리, 사마귀 문틈사이로 기어들어 왔다. 책장 반은 더 넘긴 구월이다.

언젠가는 이 집 마당에 낙엽 바스락거리는 소리를 더는 들을 수 없을 것이다. 마당에 쌓인 고엽은 내가 볼 수 있는 마지막 빛깔인 것 같아 사라진 것들이 돌아오지 않을 것만 같다.

물 속 물고기들 공손해지는 저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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