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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은희 Feb 20. 2024

슬픔과 고독의 해부

찬란한 고독을 위한 다정한 위로

제76회 칸영화제 황금종려상 수상작인 쥐스틴 트리에 감독의 <추락의 해부>는 남편의 추락사를 파헤치며 한순간에 유력한 용의자로 지목된 아내이자 유명 작가인 ‘산드라’, 유일한 목격자인 시각 장애 아들을 등장시켜 남편의 추락은 단순한 사고였을지, 아니면 우발적 자살 혹은 의도된 살인이었을지를 끊임없이 추리하게 하는 동시에, 진실에 대해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할 것인가를 관객으로 하여금 끊임없이 고민하게 만드는 영화다.     

무엇이 진실인지 모호한 상황에서 어떤 ‘선택’을 ‘결정’ 하기 위해서는 믿어야 한다는 것, 즉 ‘믿기 위해 이해한다’가 아니라 ‘이해하기 위해서 믿어야 한다’는 지점을 건드리며 '진실'이라는 인식론적 문제를 영화적으로 흥미진진하게 파고드는 이 작품이 아름다운 문장으로 이루어진 릴케의 책을 보며 떠올랐던 이유는, 추락을 해부하며 진실에 대한 인식을 해부하는 지점이 창작을 해부하며 슬픔과 고독에 대한 인식을 해부하는 릴케의 문장과 맞물려 있어 (나 홀로) 흥미로웠기 때문이다.     

릴케는 젊은 시인의 서름한 방황을 바라보며 창작을 위한 슬픔과 고독에 대해 섬세하게 해부한다. 젊은 시인의 습작이나 릴케에게 수신된 편지가 실려있지 않아 정확히 어떤 지점을 어려워했는지는 알 수 없으나, 발신된 릴케의 편지를 보면 카푸스가 창작에 대해, 그리고 슬픔이나 불안, 사랑에 대해 징징거렸을 거라 추정되는데, 정확히 일치하지는 않더라도 누구나 살며 한 번쯤 마주하는 상태나 감정을 정확히 인식하여 건네는 릴케의 위로가 다정하게 다가왔다.   

슬픔이란 ‘미지의 것이 우리의 내부로 들어온 순간’으로, 친숙하고 익숙하던 것이 우리에게서 제거되는 ‘마비의 순간’이다. 우리에게 낯익은 생각이나 감정들이 뒤로 밀리며 차지하게 되는 고요의 순간에서 미지의 것은 침묵하기 때문에 마비된다고 느끼지만 실은 머물러 설 수 없는 과도기의 한가운데에 서있기 때문에 그렇게 느끼는 것이며, 비할 데 없는 불안정감에 몸을 내맡길 때 느껴지는 추락하는 감각은 전례 없는 것이라 할지라도 그 속에서 머물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하다고, 릴케는 말한다.     

또한 그것은 고독 속에서 가능하기에 슬플 때는 고독하게, 주의 깊게 있는 것이 중요한데 우리가 슬픔을 가진 자로서 조용하고 끈기 있고 솔직할수록 보다 깊고 보다 확고하게 그 새로운 것이 우리의 내부로 들어오게 되니, 이를 통해 우리의 본질 어딘가에서 변화가 일어날 수 있다고도.

이러한 이성적 인식이 따뜻하고 다정하게 느껴지는 이유는 그럼에도 인생은 우리를 떠받들고 있으니 그저 일어나는 그대로 내버려 두어야 함을, 그 여정에서 어떤 병적인 것을 만나더라도 이는 유기체가 이질물을 벗어나기 위한 수단으로, 이는 결국 유기체의 진보로 연결될 것이기에 참을성 있고 확신에 찬 상태로 그 순간을 침착하게 건너라는 말을 건네기 때문일 것이다. 물음만 가득한 삶일지라도 먼 미래의 어느 날, 해답 속으로 들어가서 해답을 살아가게 될 터이니 조급해하지 말라는 말도 덧붙여서.     

이렇듯 슬픔과 고독을 해부한 문장들을 읽다 보니 이는 창작하는 자에게 전하는 다정한 구원의 말이었지만, 삶이라는 창작물 속에 있는 모두에게도 가닿을 인식이 아닌가 싶었다. 현재의 삶이 불확실할지라도 인생은 그 자체로 결을 만들어 내고 있다는 생각에 든든한 위로가 됨과 동시에 조급함을 버리고 삶이 만들어내는 무늬를 단단히 지켜보고 싶어졌달까.

그리고 누군가의 기준과 잣대로 만족되어지기 위해서가 아니라, 홀로 느낄 수 있는 절대적 만족을 위해, 무수히 만들어 왔고 앞으로도 만들어낼 결을 위해 글을 쓰고 싶어졌다.
(예술 작품을 비평적인 언사로 대하는 이러한 류의 독후감을 릴케는 정말 싫어했겠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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