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하자면 사랑 같은 것

요시하라 타츠야의 <극장판 체인소맨: 레제편>

by 김기범


체인소맨은 주인공 덴지가 욕망과 본능에 충실한 원초적인 삶에서 가족 같은 동료들을 만나며 점차 인간다운 삶으로 나아가는 이야기입니다. 지배로부터 벗어나 꿈을 찾아 자기 삶의 주인이 되어가는 이른바 자아실현의 서사라 할 수 있죠. 그래서 작품 세계에는 지배와 피지배의 이미지가 곳곳에 깔려있습니다. 좀비, 인형의 악마는 물론이고. 체인소, 소드, 폭탄과 같은 무기인간들 모두 주인과 도구라는 관계 속에서 기능하죠. 덴지 역시 마키마에게 길들여진 개와 같은 존재입니다. 마키마는 갈 곳 없는 덴지에게 기본적인 의식주를 제공하고 아키와 파워라는 버디까지 만들어 줍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덴지를 철저히 통제하기 위함이었고. 레제편 역시 이러한 지배의 연장선에 놓여있습니다.


레제는 소련에서 파견된 암살자입니다. 그녀는 체인소의 심장을 빼앗기 위해 의도적으로 덴지에게 접근하죠. 그녀는 수많은 기회가 있음에도 덴지를 죽이지 않습니다. 오히려 덴지에게 모르는 것을 알려주고 연인처럼 행동하며 함께 즐거운 시간을 보내죠. 레제는 아마도 자신과 같은 처지의 덴지를 보며 연민을 느꼈을지도 모릅니다. 무엇보다도 덴지 곁에 있음으로써 잠시나마 평범한 소녀로 살아갈 수 있었죠. 그리고 그 모든 경험은 그녀가 결코 가질 수 없었던 일상이기도 했습니다. 마치 청춘 영화의 한 장면처럼 둘은 옷을 벗고 물속으로 뛰어듭니다. 모든 속박을 벗어던지고 잠시나마 자유를 만끽하죠. 레제는 덴지의 두 손을 꼭 맞잡고 물에 가라앉지 않게끔 수영을 알려줍니다. 그 순간만큼은 누군가의 소유가 아닌 한 명의 존재로서 서로를 마주하죠. 그러나 안타깝게도 두 사람의 행복한 시간은 오래가지 못합니다.


사랑은 인간이 느낄 수 있는 가장 강력한 감정이라 말합니다. 우리 안에 잠들어 있는 주체성을 깨우고, 누군가의 명령이 아닌 자신의 의지로 살아가게 만들죠. 그렇기에 지배자에게 있어 사랑은 위험한 신호입니다. 마키마는 레제의 움직임을 이미 감지하고 있었지만 곧바로 제거하지 않았죠. 오히려 그녀에게 사랑의 무대를 만들어 줍니다. 마치 사랑을 허락하는 듯 보여도 실은 모두 계산된 억압의 과정입니다. 사랑이 무르익는 순간을 기다렸다가 철저히 무너뜨려서 깊은 상처를 남기기 위함이죠. 실패와 거절의 기억은 인간의 자존을 꺾고 스스로 체념하게 만드니. 그렇게 절망을 경험하게 함으로써 다시는 사랑을 꿈꾸지 못하도록 길들이는 것이죠. 마키마는 알고 있었습니다. 마음속에서 자라나는 감정만큼은 통제할 수 없다는 사실을요.


레제는 덴지가 기다리는 카페를 향해 달려가지만 끝내 마키마에 의해 가로막힙니다. 그녀는 레제 앞을 막아서며 담담히 말하죠. 나는 시골쥐가 좋아. 개가 흙 속의 쥐들을 물어 죽일 때 안심이 되거든. 그녀에게 쓸모없는 것은 그저 사라져야 될 것으로 구분될 뿐이죠. 레제는 덴지를 평생 지켜주고 행복하게 해주겠다고 약속하지만, 마키마는 오직 지배를 통해서만 세상을 바라봅니다. 이렇게 같은 사랑의 이름 아래서 어떤 이는 자유를 꿈꾸고 또 다른 이는 구속을 강요하기도 하죠.


그렇다면 사랑과 집착은 얼마나 다른 걸까요. 사랑은 누군가와 함께하고 싶단 마음에서 출발하지만 때로는 묶어두고 싶다는 욕심으로 변하기도 합니다. 내 곁에 두고 싶다는 마음이 상대를 자유롭지 못하게 한다면 그것은 애정과 집착 중 어디에 가깝나요. 마키마는 지배와 통제를 통해 소유하려 했고, 레제는 그 안에서 잠시나마 서로의 자유를 꿈꿨죠. 덴지가 그 둘 사이에서 갈등하는 것은 마치 자유와 소유의 미묘한 경계 위에 서 있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결국 체인소맨 세계에서 사랑은 누군가를 소유하려는 욕망과 자유롭게 놓아주는 마음 사이에서 끊임없이 충돌합니다. 그것은 2부에서 주인공 아사의 능력인 애착 대상을 무기화하는 능력과도 연결되죠.


아이러니하게도 마키마의 진정한 꿈은 완벽한 세계가 아닙니다. 그녀는 영화관에서 서로를 끌어안는 장면을 보고 눈물을 흘리죠. 사실 지배의 악마가 그토록 갈망한 것은 누군가 자신을 동등하게 안아주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기에 완벽한 세계가 필요했을 뿐이죠. 자신과 동등한 존재로만 이루어진 완전한 세계.


마지막으로 레제는 마키마의 손에 죽습니다. 사실은 이미 죽을 것을 각오하고 덴지를 만나러 간 것이죠. 심장을 꿰뚫린 그녀는 왜 처음부터 덴지를 죽이지 못했는지 스스로에게 묻습니다. 그녀는 덴지를 속일 수는 있었지만 자기 자신만큼은 속일 수가 없었죠. 모두가 체인소의 심장을 원했지만 그녀만이 유일하게 덴지의 마음을 원했다는 것을. 레제는 덴지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쓸쓸히 말합니다.


“사실은 말이야. 나도 학교에 가본 적이 없어…“


비록 둘의 사랑은 이루어지지 못했지만 커피의 씁쓸한 여운처럼 오래도록 덴지 안에 머물겠죠. 말하자면 사랑 같은 것으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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