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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리메 Dec 06. 2023

잘 차려입고 도서관에 간다

 나에겐 취미가 하나 있는데 그건 바로 도서관에 가서 책을 빌리는 것이다. 여기서 한 가지 짚고 넘어갈 부분은 그 영역이 '빌리는 것'이지 '읽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나의 독서량이 그리 많은 편이 아니라는 사실을 솔직히 밝힌다. 하지만 빌리는 책 중 절반은 읽으려 노력한다. 때론 펼쳐보지도 않은 채 반납할 때도 있지만.



그런 취미가 생기게 된 계기가 무엇이었는지 떠올려보면, 집에서 5분 거리에 지어진 도서관에 마음을 빼앗겨서라고 할 수 있겠다. 이제 막 완성된 도서관은 규모가 크진 않지만 쾌적하고 좋았다. 아치형의 창문은 유럽 어딘가의 건축물에서 영감을 받은 듯 보이기도 했다. 다양한 연령대의 사람들이 자기만의 방식으로 도서관을 채우고 있는 모습 또한 내 마음을 움직이게 하는 요소였다.


'나도 이곳을 채우는 사람이 되어야지.'






오늘은 책을 읽고 싶어서 운동을 가지 않았다. 체력이 좋은 편이 아니라 오전에 운동을 다녀오면 4-5시간 정도는 정말 꼼짝도 할 수 없을 만큼 기진맥진해 있기에, 오늘만큼은 편안한 상태로 책에 집중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내가 읽고 싶은 책을 도서관 홈페이지에서 검색해 보니 집 앞 도서관이 아닌 옆동네 규모가 큰 도서관에서 보유 중이다. 동거인이 차를 들고나간 터라 고민이 되었지만 집을 나서기로 다짐하고 옷을 입는다.



TPO(time, place, occasion).

내가 나름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이다. 나는 옷을 시간, 장소, 상황에 맞게 골라 입는 걸 좋아한다. 그 말인즉슨 도서관을 갈 때는 도서관에 어울리는 옷을 입는다는 것이다. 오늘은 어떤 단정한 복장으로 도서관에 갈까 고민을 하다 얇은 검은색 코듀로이 원피스를 골랐다. 거기에 발목까지 오는 검은색 양말을 신고, 외투는 얼마 전 구입한 깔끔한 검은색 롱패딩으로 결정했다. 오늘 코디의 포인트인 흰색 스티치의 닥터마틴 단화를 신고, 몇 년째 쓰고 있는 키티버니포니의 검은색 크로스백을 멘다. 여기까지가 끝인 줄 알았다면 오산! 소니의 베이지색 헤드폰을 씀으로 드디어 오늘의 코디가 완성된다.

엘리베이터에 비친 내 모습이 꽤나 마음에 든다. 이 정도면 도서관에 가는 복장으로 충분하다고.



오늘의 코디가 너무 마음에 든 탓일까. 버스에 타기가 싫어졌다. 어쩐지 걸어서 가고 싶다. 걸어가기엔 조금 먼 거리지만 자신감에 찬 나는 그런 것 따위 아랑곳하지 않는다. 40분을 걸었고, 도서관에 거의 다 도착할 무렵부턴 뒤꿈치가 아파서 엉거주춤한 채로 걸었다는 사실을 고백한다. 그런 내 모습이 퍽 웃겼으리라.




오늘 내가 읽고 싶었던 책 두 권을 검색해서 찾은 뒤 대여를 하고 자리를 찾아 외투를 벗고 앉는다. 김겨울 님의 '아무튼 피아노'를 먼저 읽기 시작한다. 첫 장부터 글에 감동을 받아버려서 앉은자리에서 쉬지도 않고 읽어 내려간다.



"사랑하는 이는 또한 성실해야 한다. 성실하지 않고서는 사랑을 표현할 수가 없다. 혹은 성실하게 표현되지 않는 사랑은 사랑이라고 부를 수가 없다. 나는 사랑은 성실로 증명된다는 원칙에 복무하기 위해 사랑하는 온갖 것에 나의 성실을 바쳐왔다. 어떤 성실은 배신당했고 어떤 성실은 사랑과 함께 증발했고 어떤 성실은 멀어졌다가 다시 돌아왔다. 피아노에 대한 나의 성실은 느슨하지만 끊어지지 않는 성실로, 매일 네 시간씩 바칠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네 달 이상 쉬지도 않는 종류의 것이다.'

<김겨울. '아무튼, 피아노' p14>




나는 도서관을 향한 나의 사랑을 의상으로 표현해 왔다. 절대 그곳을 허투루 가지 않는다. 깨끗하고 단정하게. 그렇게 예의를 킨다. 그런 성실로 나는 오늘  차려입고 도서관에  있다. 또한 책에 대한 나의 성실이 바로 '느슨하지만 끊어지지 않는 성실' 아닐까. 조금 멀리 있지만   곁에 바짝 다가올 것이란 기대를 하며 책을 대해 본다.





인덱스를 붙여놓은 책을 가방에 넣고 도서관을 나선다. 오늘 온전히 도서관을 즐겨서 마음의 티끌만큼의 아쉬움도 없으니 발걸음이 가볍다. 버스정류장에 도착했는데 도착정보가 뜨는 전광판이 꺼져있다. 기약 없는 기다림을 음악과 함께한다. 헤드폰에 Keith Jarrett의 I Loves You, Porgy가 흘러나오고, 그 음악을 듣는 내 눈에 이유를 알 수 없는 눈물이 그렁그렁 맺힌다. '아무튼, 피아노'에 완전히 동화되어서 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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