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 큰 일인 줄 알았지만 별일 아니었던 순간
“왜 서울에 안 살고, 부산으로 오려고 합니까?”
면접이 끝나갈 때쯤이면, 의심 가득 찬 눈빛으로 면접관들이 늘 물어왔다. 서울에서 약 10년을 살았던 나는 면접관들에게 ‘언제든 서울로 다시 돌아갈 사람’으로 보이는 듯했다. 면접관은 “그래도 다 서울로 가더라고요.”라며 씁쓸하게 지난 채용을 들추면서까지, 내게 답변을 더 요구했다. 각서를 쓸 수도 없고, 어떻게 짧은 답변만으로 부산에 계속 살겠다고 증명해야 할지 막막했다. 무수한 면접을 거쳐, 면접관들이 고개를 끄덕이기 시작했던 모범답안은 “원래 부산 사람이고, 가족들과 함께 살고 싶어서요.”였다. 그럼에도 “왜 굳이 부산에?”라며 캐묻던 면접관들은 여전히 내 곁에 나타나곤 한다. 부산에 터를 다시 잡은 지 약 10년이 다 되어 가는 지금도 종종 같은 질문을 받는다. 이제는 제법 여유 있는 표정으로 “왜 서울이 좋아요?”라고 되묻는다.
우여곡절 끝에 돌아왔지만, 막상 부산에 다시 살기 시작했을 때는 큰일 났다 싶었다. 어쩌면 면접관들의 예감이 맞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원래 내가 살던 도시로 돌아온 것인데도, 그사이 나는 변해 있었다. 서울 사람과 부산 사람, 그 사이 어느 경계에 서 있었다. 늘 "○○씨"하며 깍듯하지만 쉽게 가까워지지 않는 서울 사람들 사이에 있다가, 안 지 하루 만에 "○○야, 여기 앉아라!" 하며 훅 들어와 투박하게 챙겨주는 부산의 문화에 어질했다. 일자리에서도, 부산에 있으니 서울에서의 빠른 변화와 넘쳐나는 기회가 그리웠다. 마치 부산에 오면서 내 가능성이 닫히는 듯한 불안감이 맴돌았다. 서울에서 내가 다 삼키지도 못하던 기회와 정보들이 마치 내 것이었던 것처럼 배가 아팠다. 인간관계가 다 끊기리라는 두려움도 있었다. 나이 들수록 세 사람도 모이기 힘들다는데, 친구들이 죄다 서울에 있어 잊히겠구나 싶었다.
지금에 와서 보니 과한 걱정들이었다. 다들 '인서울'을 외치며 좋다고 하여 간 서울에서는 성장의 기회들로 즐거웠지만 내 자리가 아닌 것 같은 불편함이 있었다. 무언가를 성취해 갈 때마다 ‘남들이 좋다고 하는 데는 다 이유가 있다’라는 말이 내게는 맞지 않을 수 있다는 걸 조금씩 천천히 알아갔다. 부산에 와서야 나는 더 자유로워졌다. 인간관계에서도, "거리가 멀어지면 우리도 서먹해지겠지?"라던 친구들 말에 대한 대답으로 계절이 바뀔 때쯤이면 서울로 간다. 기차 안에서 몸은 고되지만, 이어지는 인연에 감사하며 부산으로 돌아가는 걸 반복한 지도 어느새 10년이다. 우정도, 내 삶도 무탈하거늘 부산으로 와서 무엇을 그리 영영 잃을까 봐 걱정한 건지 웃음이 나온다.
오히려 부산이라서 진짜 나를 만나는 기회를 가질 수 있었다. 무언가를 계속 성취해야 할 것만 같아 등 떠밀리기보다, 부산은 한층 여유로운 도시다. 내가 필요로 하는 정도의 문화와 정보들이 간간이 온다. 압도될 듯한 인파들에 휩쓸려가지 않고, 스스로 꼭꼭 씹어서 여러 경험과 정보를 소화할 수 있다. 다들 한 방향으로 추구하는 삶을 권하더라도, 내게 맞으리라는 보장이 없고 다양한 저마다의 삶이 있다는 걸 알기 때문에 이제는 순응하며 받아들이지 않는다. ‘서울에서 부산으로 근거지를 바꾼다고 해서 나라는 사람의 가능성이 정말 닫혔을까?’라며 자신을 괴롭혔던 질문이 머리를 계속 맴돌다가 3년 전부터 매일 일기를 쓰기 시작했다. 하루를 차곡차곡 정리해 가면서 내가 직접 마주했던 다양한 경험과 사람들로 다져진 나라는 사람은 변함없다는 걸 깨달아갔다. 내 가능성을 도시, 학교, 회사처럼 속해왔던 어느 집단의 가치에 한계를 두고 볼 필요가 없었다.
행복의 진입장벽을 낮출 수 있는 곳으로 옮겨보는 것이 내겐 전환점이 되었다. 빠르고 손쉽게 내가 행복해지는 장치들이 부산 곳곳에 있다. 그중 하나가 바닷바람이다. 엄마는 머리가 어지러울 때 병원보다 '해풍 앞으로!'를 외치는 사람이다. 나 역시도 시험을 망치거나 잘 안 풀리는 날이면 아버지와 바닷가로 가서 밤바람을 왕창 쐬고서 뜨끈한 돼지국밥을 먹곤 했다. 바닷바람이 어찌나 센 지, 머리칼과 뺨을 타고 들어온 바람이 내 몸속 세포 하나하나까지 뚫고 들어와 궂은 기운을 다 가지고 나가는 느낌이었다. 여느 때와 다름없는 하루 중 어느 장면이었는데 힘들 때면 그 바닷바람이 자꾸 떠올랐다. 한강으로 뛰어가 보기도 하고 자전거를 타고 나 홀로 바람을 만들어내며 서울의 이곳저곳을 누벼보았다. 그러나 강은 바다가 아니었다. 나를 뚫어버릴 듯 관통해 버리는 바닷바람은 어디에도 없었다. 내게 당연했던 삶의 인프라는 바닷바람이었다. 누군가에게는 역세권, 편의점이 필요하듯, 있어서 당연했지만 없어져 보니 필요한 게 바닷바람이었다. 도시의 흐름을 싹둑 끊어내고 머리를 비워내게하는 바다가 나를 소소하지만 확실히 행복하게 한다. 바닷바람같이 나의 걱정을 잠재워주는 것을 내 곁에 더 다양하게 두고자, 조금이라도 흥미가 가고 눈에 들어오는 것은 엄청나게 좋아하는 것과 마찬가지라며 의미 부여를 한다. 그렇게 호기심을 꾸준히 이어 나가면서 새로이 여러 시도를 해보고 웃을 일을 더 만들고자 한다.
내년이면 부산에 다시 터를 잡은 지 어언 10년이 된다. 이제야 나는 이 도시가 주는 여유에 조금씩 안착하기 시작했다. 무슨 일이든 처음에는 적응하느라 시간이 걸리고 벼락치기가 어려운 나는 다시 돌아온 고향에서도 안정을 찾는 데 10년이 걸렸다. 지난 10년을 돌아보니, 삶의 근거지를 바꾸며 걱정했던 것들이 큰 일인 줄 알았는데, 삶은 걱정과는 다르게 흘러갔다. 삶의 근거지를 바꾼다는 게 어떤 이상향을 찾아가는 게 아니다. 부산에 살면서 갑갑하고 불만인 부분도 상당히 많다. 하지만 사는 도시, 환경을 바꿔보는 것 자체에 의미가 있었다. 힘을 좀 빼고 내게 더 편하고 잘 맞는 환경이 뭔지 알아볼 수 있는 타이밍이 온 것이었다. 소소한 행복이 곳곳에 깃든 환경은 나를 행복하게 하는 것들로 주변을 꾸려가도록 더 노력해 나갈 힘을 준다.
일희일비의 널뛰기를 쉽게 하는 나는 글을 쓸 때마다 맞닥뜨리는 어려움에 '이번에도 큰일이 났다'며 머리를 싸맸다. 그러다 점심을 마치고 잠시 들른 포구에서 바닷바람을 맞았다. 새파랗게 구름 하나 없는 하늘과 바다는 눈뜰 수 없을 정도로 빛나고 있었다. 바닷바람을 맞으니 “이 다 뭐라꼬.”라며 혼자 되뇌었다. 글을 써나가는 도중에는 큰일이었지만 다 마무리하고 보니 별일 아닌 게 되었다. 뭘 써도 마음에 들지 않던 불편함이 바닷바람과 함께 날아가 버렸다.
오늘따라 스쳐 가는 바닷바람들이 더 선명하게 품에 느껴진다.
70대 아버지와 40대, 30대 딸이 모여 같은 주제의 글을 써내려가는 뉴스레터 땡비입니다.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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