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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그냥 글

나의 일 연대기

by 땡비

#1. 재밌는 일을 할 거야


날이 너무 맑아 덩달아 마음도 또렷해지는 날이었다. 가족들과 함께 자주 찾는 절의 대나무 숲을 걸었다. 햇빛을 받아 투명해진 대나무 잎에는 눈이 시리게 초록초록한 기운이 가득했다. 바람에 비벼지는 대나무 잎들의 소리가 마음을 편하게 했다. 대나무 숲을 한 바퀴 돌고 나와 절의 석탑 앞에 섰다. 엄마는 공양미가 담긴 봉지를 꺼내며 각자 소원을 빌어라고 했다. 나는 뽀얀 공양미를 들고서 두 손을 모아 기도했다.


“재밌는 일을 하면서 살게 해 주세요.”


내 소원을 듣자 엄마는 “업이 되면 야구선수도 야구를 싫어하게 돼. 그게 일이야.”라고 말했다. 엄마는 내가 철딱서니 없다 했지만 나는 개의치 않았다. 성공이나 부가 따라오지 않더라도 재미있는 일을 찾아서 하루하루 의미 있게 보내는 삶을 살고 싶었다.


그러나 엄마의 말대로 일은 역시나 일이었던 걸까? 재미와는 거리가 먼 첫 일터에 정착했다. 치열했던 대학생활의 끝에는 허무함이 맺혀 가고 싶은 직장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사람마다 어떤 가능성을 안고 태어난다고 믿었다. 다양한 경험을 통해서 내 가능성이 움틔워지는 순간을 맞이하고 싶었다. 성장에 허기진 사람처럼 모든 시간을 가치 있고 생산적으로 보내야 한다고 스스로를 몰아세웠다. 외국계 기업에서 2번의 인턴, 4번의 산학협력 프로젝트, 2번의 공모전 수상과 방학마다 했던 대외활동으로 내 이력서는 칸이 모자랐다. 대학생활동안 내게 맞는 일을 찾아야 한다고 조급했던 나는 성취감을 원동력 삼아 모두 내가 원한대로 결정해 왔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정작 세상밖으로 나가야 했을 때는 의욕이 꺾인 상태였다. 기업이 원하는 인재로 나를 꾸며내야 할 때마다 괴리감이 나를 괴롭게 했다. 나는 이렇게 이성적이고 전략적인 사람이 아닌데 내가 참여했던 여러 경험들은 나를 그런 사람으로 포장해 주었다.


사람들이 좋다고 하는 조건과 내가 좋아하는 것을 이리저리 조합하여 찾은 교집합 같은 직장에 간택되었다. 합격했다는 연락을 받자 취업 준비의 끝이 기쁘다기보다는 어안이 벙벙했다. 내가 원해서 했던 선택들의 결과라고 믿었는데 혼란스러웠다. 왜 나는 기쁘지 않은 걸까? 첫 직장이었던 공공기관은 권태로운 반복 업무 속에서 새로운 무언가를 하려 가져가면 ‘가만히 있어라’라고 하는 회사였다. 이럴 바에야 회사에서의 시간을 최소화하면서 퇴근 후 시간에서 의미를 찾아보려 했다. 6시 땡 하면 뛰쳐나가 6시 15분에 예매해 둔 영화를 보러 가고, 새로운 걸 배워나갔다. 그러나 9시부터 6시까지 일터에서 보내는 시간은 너무나 길고 길었다. 그 시간이 아까워 견딜 수가 없었다.


#2. 어떻게 계약서대로만 일하니


가슴 설레는 일을 해보자며 스타트업으로 이직을 했다. 두 곳의 스타트업을 거치며 재밌는 일을 향해 가는 과정에서 많은 것을 포기했다. 누구나 들으면 알만한 회사를 다닌다는 명예나 연봉은 애초에 가장 먼저 내려놓았다. 일이 나와 잘 맞고 배울 점이 많은 회사라면 그곳에서의 경험이 지금 내게 필요하다 생각하며 열심히 일했다. 그러나 좋아하는 일을 하려면 착취를 감내해야 했다. 젊은이들로 구성되어 합리적으로 운영될 것이라 생각했던 스타트업 생태계는 오히려 젊은이들의 열정과 미래를 볼모로 더 많은 희생을 요구하는 세계였다. 언제 어디서든 회사와 연결되어 있어야 하고 샤워하는 사이 온 상사의 연락을 놓쳤다가 크게 혼이 나기도 했다. 옆에 있던 동료들이 영문도 모른 채 계속 잘려나갔고, 알고 보니 회사에서 근로 계약서를 쓴 사람은 내가 유일했다. 대표는 “어떻게 계약서대로만 일하니?”라는 말을 던지며 더 많은 업무 요구와 해고 사이에서 간을 보곤 했다. 슬프게도 일은 잘 맞고 재미있었다. 팀원들도 서로의 성장을 응원해 주는 좋은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계속 일하며 갈려나가는 사이 잠들려고 누우면 수많은 질문들이 집 천장을 가득 채웠다. ‘재밌는 일이라 하지만 계속 이렇게 살 수 있을까?‘


서울에서의 10년을 정리하고 고향인 부산으로 터전을 옮겼다. 이후 6년 동안 아무 목적의식 없이 회사를 다녔다. 주말에는 한껏 늘어지거나 운동을 배우고, 돈 버는 수단으로써 회사를 무미건조하게 대했다. 한 번씩 TV에서 ‘가슴이 설레는 일을 하세요’라는 연사의 강연을 보고 있자면 질투와 열등감이 뒤섞여 끝까지 볼 수가 없었다. 재밌는 일을 꿈꿨던 내가 떠오르면 피식 웃음이 났다. ‘좋아하는 것도 일이 되면 재미 없어진다’라는 말을 되뇌며 포기했다. 꾸역꾸역 회사와 집을 반복했다.


#3. 망해도 좋아


친한 언니가 내 생각이 났다며 어느 대학원의 모집 공고를 보내왔다. 갑작스러운 제안에 내가 정말 대학원에 가고 싶은지 명확하게 답이 서지 않아 혼란스러웠다. 그러면서도 막연히 ‘학위는 어떻게든 도움이 될 거야.’라며 원서를 써 내려가고 접수까지 마쳤다. 우체국에서 원서 송장을 받고 나오는 길에 오랜만에 갓 취업했을 때의 기분에 휩싸였다. ‘또다시 내가 원하는 것이라 착각하면서 사회가 원하는 학벌이나 스펙을 쌓으려 하는구나 ‘라며 찝찝해졌다.


그때 불현듯 더 이상 미래에 저당 잡히는 삶을 살지 말자는 의지가 솟구쳤다. ’ 나중에 대학 가면, 회사 가면’으로 미루어두고 감내했다가 마침내 그 미래에 도착했을 때는 공허했다. 지금 내가 하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 또렷하게 알아차리고 싶었다. 고민 끝에, 사람들이 ‘굳이? 왜?‘하며 의아해하지만 내게는 의미 있는 일들을 이어나갔다. 대학원 학비로 쓰려했던 돈을 20년 된 부모님 집을 리모델링하는데 썼다. 언니, 아버지와 함께 수다를 떨다가 ‘우리 뉴스레터 한 번 해봅시다.‘라며 글쓰기를 시작했다. 서로 쓰고 싶은 주제들을 가져와 식탁에 펼쳐두고 만장일치제로 주제를 정하고 글을 써 내려갔다. 차곡차곡 쌓인 글들을 모아 막무가내로 동네 서점을 찾아가 책 만드는 법을 배웠다. 패기롭게 책도 없이 신청했던 북페어에 나가게 되어, 부랴부랴 책을 만들고 독립 출판의 세계를 맛보았다. 과정만으로도 의미 있고 재미있는 것들이 맞물려 삶을 채워나가고 있다. 그렇게 나는 ’결국 재밌는 일을 업으로 삼지 못했다‘ 라는 패배의식에서 조금씩 벗어나는 중이다.


여태껏 나는 성장하는 나를 보며 재미를 느낀다고 생각했다. 그 과정에서 성장에 대한 나의 오랜 오해가 있었다. 꾸준히 오른쪽으로 상승곡선을 이어나가는 그래프의 모습을 성장이라 생각했다. 그래프의 가로축은 남들보다 더 빨리 달성해야 하는 시간의 축이었고, 세로축에는 나를 표현하는 수단으로 내가 속한 학교, 조직의 가치들로 줄 세웠다. 그러나 사회가 짜 놓은 판에 나를 구겨 넣을수록 헛헛했다. 그 판과 멀어져 지금 내가 원하는 것을 무작정 해보니 오히려 재밌는 일들이 또렷이 보이고 진짜 나와 가까워졌다. 좋아하는 글과 공간을 향해갈수록 사회의 기준을 벗어나 다채롭게 나를 표현하는 새로운 언어들을 찾은 느낌이었다. ’나도 다른 사람들처럼 해야 하는 건 아닐까?’라고 흔들릴 때마다 떠올린다. ’결과가 망해도 지금 하는 자체가 의미 있고 즐거운 건 뭘까?‘가 요즘 던지는 질문이다. 좋아하는 것들을 찾아서 꾸준히만 해나가면 된다라며 여유를 가지려 노력하고 있다. 그렇게 스스로 지우려 했던 대나무 숲 속에서의 ‘나‘와 조금씩 다시 가까워지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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