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하는 일이겠지요?
다소 억지스럽고 역설적으로 들릴지는 모르겠지만 책을 읽어야겠다고 생각은 하는데 선뜻 손이 가지 않을 때는 저는 자연스럽게 유튜브를 봅니다. 그래 봤자 근무시간 중일 테고 그중에 태반은 시시껄렁한 콘텐츠일 경우가 많기에 이렇게 글로 소개할 수 없는 곳을 드나들기 일쑤입니다. 그만큼 무어라 특정할 수 없는 곳을 보다 보니 그 흔한 ‘구독’이나 ‘좋아요,’ 하나 날린 적도 없고 당연히 가입 버튼 하나 눌러본 적도 없습니다. 대신 광고 보는 시간이 귀찮고 건너뛰기 버튼 누르는 것도 마땅치 않아 프리미엄 구독을 하는 중입니다.
유익한 건 재미가 없거나, 재미있으면 그야말로 흥미 위주일 뿐 그 세계에서 무엇을 얻을 수 있을까? 자문(自問) 한 적이 한두 번은 넘습니다. 언젠가 일본어를 배워보려고 노력하는 일환으로 영상을 보다가 포기한 이후로는 공부나 학습 목적으로 접근하는 영상은 이제 자연스럽게 멀어졌습니다. 이는 영어도 마찬가지입니다. 아예 습관이 되어버렸는지 철저히 재미 위주로 가다 보니 그것도 하루 이틀일 뿐, 역(逆)으로 책을 잡게 되는 효과를 보더란 말입니다.
이렇게 글로 남기고 펜으로 굴리다 보니 하루의 상당 시간을 독서에 할애할 듯해도 엄밀히 말하면 영상에 투자하는 시간이 좀 더 많은 게 사실입니다. 단 몇 분의 독서를 위해 몇 시간의 시간을 영상에 보태는 셈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전업 작가들은 얼마나 많은 시간을 관련된 작업을 위해 투자하는 것일까요? 저같이 월급을 받으며 직장 생활하는 사람들은 업무 중간중간이 글을 접하고 쓰는 시간이라지만 전업이라는 타이틀이 붙은 분들의 일상은 사뭇 궁금할 수밖에 없습니다. 책을 출간하기 위해 많은 책을 읽고 써봐야 하는 일은, 제가 마취를 잘하기 위해 많은 환자에게 마취해 봐야 하는 이치와 같을지요? 의사들에게는 책보다는 실기가 더 중요하겠지만 글을 위해 사는 분들은 활자가 더 중요할까요, 아니면 글 쓰는 일이 더 중요할까요?
조금은 엉뚱한 이야기이겠습니다만, 내가 무얼 좋아하는지 스스로 궁금할 때가 있습니다. 책방에 가도 그렇고 식당을 고를 때도 그러하며 구체적으로 자리에 앉아 음식을 고를 때도 그러합니다. 다행히 소설보다는 산문을 좋아하고 게 중에 신변잡기 류(類)의 글을 좋아하며 덧붙여 역사와 인문학에 관심 가지고 있다는 정도! 음식도 가리지는 않지만, 밀가루로 만든 음식을 좋아한다는 대범위는 가집니다. 하지만 그 범위를 넘어 구체적으로 고르라고 한다면 제 고민은 엄청난 크기가 됩니다.
언제부터 저는 책을 좋아하고 즐겨 읽게 되었을까요? 이 말은 곧 몸을 움직이는 걸 지겹도록 싫어한다는 말과 일맥상통하기에, 젊은 날에는 부모님께 적잖은 걱정거리였다고 합니다. 그렇다고 공부를 잘하는 것도 아니다 보니 이래저래 하나 있는 아들 녀석이 얼치기 정도로 살아가지는 않을까? 걱정도 많으셨을 것입니다. 어린 날의 내가 부모님과의 대척점에 있었다면, 장년에 들어서고 나니 이제는 나 자신과의 싸움이라고 해도 과언은 아닙니다. 나는 좋은 남편인가? 본받을 만한 아빠인가? 늘 묻고 대답하는 과정 중에 있기 때문입니다.
나에게는 이런 게 하나의 숙제(宿題)인 셈입니다. 숙제란 무엇일까요? 숙(宿) 자는 묵을 숙, 머무는 집 숙이라는 뜻을 품고 있으니, 학교가 아닌 머무는 곳에서 풀어야 할 과제인 셈입니다. 그러니 내가 직장에서 풀어야 할 업무와는 애초부터 그 출발이 다른 종자일지도 모릅니다. 결국 내 인생 내내 풀고 답하고 해결해야 하는 일일 것입니다. 그게 정답이고 해답이면 좋겠지만 행여 오답(誤答)인 줄도 모르고 다 해냈노라고 흡족하지나 않으면 좋겠습니다.
글을 쓰는 오늘 10월 18일은 제 아들의 생일입니다. 서른이 넘고 이제는 제법 자기의 몫도 잘 해내는 중입니다만, 여전히 생일을 맞으면 축하 대신 부모로서의 역할은 내가 잘하고 있는지? 이런 책임감이 책의 내용이나 숙제로 다가오는 건 아닌지 궁금하기도 합니다. 살아가며 내 삶이, 내 생각이 책이 아니요, 숙제가 아니라 경륜이요, 경지이기를 바라는 오늘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