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직한 부부, 낯선 도시에서 각자 그리고 씁니다
“다음엔 당신 부인을 그리는 건 어때?”
“강사님이 그러는데 이목구비 뚜렷한 외국인이 그리기 편하대.”
“이왕이면 이쁜 여자가 좋다는 거네.”
“오늘은 졸리와 마지막이야.”
우리 부부는 직장을 같은 날에 그만두었다. 그는 주 근거지인 당진을 그대로 두고 1년 동안 대전살이를 하는 건 어떠냐고 제안을 해왔다. 나 역시 살아본 적 없는 그 도시가 궁금했고, 퇴직 뒤로 미루었던 배움을 어차피 시작할 거라면 그곳에서 하면 좋을 것 같아 흔쾌히 받아들였다. 나는 글쓰기를 그는 그림을 배우기로 했다.
“그런데 뜬금없이 웬 그림이야?”
“예전부터 하고 싶었어.”
오래전부터라고?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데. 살아온 시간을 계산해도 나만큼 그와 오래 산 이가 없다. 어쩌면 시부모보다 잘 안다고 자부할 때도 있다. 어린 시절의 친구 관계나 어머니를 향한 애틋한 마음은 물론이고 답답하면 왜 말이 없는지, 주로 누구랑 술을 먹는지, 올빼미모임의 멤버가 누구인지 등. 그를 대강 추측하며 아는 체했지만, 알고 보니 완전히 잘못 알고 있었던 모양이다.
조그만 오피스텔을 월세로 얻고 꿈을 이룰 수 있는 가까운 곳을 찾았다. 멀지 않은 곳에 평생교육원이 마침 개강을 앞두고 있었다. 그는 붓과 물감으로 그리는 일은 엄두가 나지 않는다며 기초 소묘인 ‘연필화’를 선택했다. 처음 배울 때는 뭐부터 시작해야 좋으며 수채화와 아크릴화는 어떻게 다른 것인지 진지하게 물었다. 이제는 학생을 가르치는 일을 벗어나 오히려 다른 사람에게 배우게 된 기분은 어떨까? 그는 약간 긴장한 듯 보였다. 설렘 반 걱정 반을 적당하게 섞은 상기된 얼굴이었다.
처음 배울 때는 실력이 따라주지 않아도 불안하지 않다. 몰입하는 그 자체로 즐거워서 사소한 것에도 기쁨을 느끼고, 만족감이 크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도 비슷한 감정을 표현한 적이 있다. “연필을 처음 잡아본 것 치고는 이렇게 그리다니, 놀랍지 않아?” 어설프게 시작한 스케치북 위에 ‘모과’와 ‘공’의 모습이 서서히 드러나면서 제법 그럴싸해 보였는가 보다. 그림을 설명하는 표정에서 자신의 가능성을 발견한 듯 자부심이 대단했다.
계속 성장할 수 있다면 좋겠지만, 배움에는 반드시 넘어야 할 산이 있다. 그 산이 아무리 낮아도 처음에는 숨이 차오른다. 배우고 노력할수록 실력은 늘어가지만, 계속 아쉬운 점이 눈에 띄는 건 어쩔 수 없나 보다.
평생교육원에 다닌 지 3개월째였을까. 그는 기초 소묘 수업을 마치고 집에 오자마자 스케치북을 펼쳤다. 표정에서 그림이 뜻대로 되지 않는 답답함이 느껴졌다.
“3시간이나 그렸는데 졸리가 이상해.”
“괜찮은데. 입술이 틀림없는 졸리야.”
조금만 봐달라는 의도를 알면서도 화가가 아니라며 먼저 거절했다. 그럼에도 내 시선은 이미 그림에 머물러 있었다. 나도 종일 노트북을 뚫어지게 보다가 어떻게 써야 할지 고민이 되면 그에게 물어보게 된다. 그때마다 퉁명스럽게 도와주었다면 절대로 가르쳐 주지 않았을 텐데, 그는 대체로 부족한 점을 잘 찾아내어 친절하게 알려주었다. 이제 내가 그에게 같은 방식으로 대할 순간이 왔다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들떴다. 예상치 못한 통쾌함이었다. 사실 내 그림 실력은 몇 년에 걸쳐 화실에서 놀며 배운 게 전부다. 지금은 그림 몇 점이 남았을 뿐 아예 그만둔 상태다. 그래서 티를 내지 못하는데, 그는 내 실력을 이상하리만치 좋게 평가한다.
“눈과 코의 균형만 맞추면 괜찮을 것 같아.” 별것 아닌 지적에도 그는 고심하는 눈으로 그림을 바라본다. 전문가도 아닌 내 조언에 그렇게 귀 기울이는 반응이 싫지는 않았다. 나도 모르게 으쓱해지는 기분에 신이 난 것 같다. 숨길 수 없는 흡족함이 더해지면서 지적은 계속되었다.
서양인들의 특징인 눈을 더 뚜렷하고 크게 그리면 지금보다 나을 것 같고. 오른쪽에 비해 왼쪽 얼굴이 넓으니 부자연스러운 모습이라고. 살짝 그쪽만 줄여주기만 해도 전혀 이상하지 않은 그림이 될 거라고 했다. 지우개를 잘만 이용해도 자연스럽게 만들 수 있다며 왼쪽 볼을 스치듯 지웠다. 얼굴 균형을 조금 맞춰주었을 뿐인데 “역시 전문가다워.”라는 말이 들렸다. 치켜세우는 남편의 칭찬이 이어질수록 입꼬리가 실룩거렸다.
“그림이 시보다 어렵지 않아?”
“시작했으니 졸리 그림은 완성해야지.”
나를 만나기 전부터 시를 좋아했다는 그는 시를 쓰는 사람이다. 시인이라면 책을 읽는 모습이 더 어울릴 것 같았고 평생 글만 쓰며 살 줄 알았다. 그런데 졸리에게 빠지더니 뚫어지게 보고 또 몰두해서 그리기만 한다. 서운한 마음을 담아 질투 섞인 말을 건네보아도, 그는 스케치북만 쳐다보며 반응이 없다. 그런데 그 모습이 이상하게도 싫지 않다. 솔직히 보기 좋았다. 어울리지 않을 거라는 내 편견은 완전히 빗나갔고, 오히려 은근히 잘 어울렸다.
그는 사진 속의 그녀에 대한 예의만은 지키겠다고 다짐하며, 고혹한 눈빛과 매력적인 입술에 연필로 흔적을 남기는 동작을 쉼 없이 이어간다. 오래전부터 하고 싶었던 그 꿈을 순간순간 온몸으로 느끼면서. 닮지 않았다는 시선을 보낸다 해도 오로지 자신이 그린 여인을 흡족하게 바라볼 것이다.